제140화
“빨리 와라! 네가 마지막이다.”
“허억, 훅… 예, 예!”
한손에 축 늘어진 토끼의 귀를 잡고 산맥을 내려온 창식은, 저 멀리 성문을 지키고 선 기사의 고성에 발을 재촉했다.
“짐승은… 음. 아주 못 써먹을 놈은 아니군. 조금 늦긴 했지만, 빈손으로 돌아온 녀석들보다는 훨씬 낫다. 좋아, 들어가도록.”
손에 쥔 토끼를 들어 보이며 성문을 통과한 그는, 죽을상으로 기사의 뒤쪽에 일렬로 엎드려 뻗친 사람들을 지나쳐 도시 안으로 들어섰다.
“응? 뭐야, 아직 남아있었나. 통과했으면 빨리 배식이나 받으러 가도록. 아니, 꼭 서두를 필요는 없나. 지금 밖에 있는 놈들만큼 입이 줄었을 테니 말이야.”
창식은 큭큭 웃으며 손에 든 육포를 입에 넣는 기사를 지나쳐, 저 멀리 길게 이어진 배식 줄 끝에 섰다.
누구는 먹다 만 잔반에 대충 물만 쏟아붓고 끓인 것 같은 꿀꿀이죽이나 내주면서, 저들은 제대로 된 끼니에 멀쩡한 육포까지 간식으로 씹고 있다니.
가뜩이나 제 의사도 없이 끌려와서 빌어먹게도 힘든 훈련을 강제 당하느라 죽을 거 같은데.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컥한 마음에 눈물이라도 쏟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기, 누가 함부로 쓰러져도 된다고 했나! 저 넓은 산맥에 고작 짐승 하나 찾아서 잡아 오는 것조차 못하는 쓰레기들이, 무슨 낯짝으로 편하게 누우려는 거야!”
쩌억-!
“아악! 죄, 죄송…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비참한 건, 이런 처지에도 바깥에 남은 사람들과 비교해 자꾸만 안심이 든다는 거였다.
특히나 본래대로라면 그 또한 그곳에 있어야 할 입장이었기에, 더더욱 그런 마음이었다.
만일 그때, 누군가 토끼 사체를 건네주지 않았더라면…
“…어?”
창식은 아까 성문 앞에서 기사에게 건넨 토끼를 떠올리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누구한테 받은 거였지?
“윽….”
순간 머릿속을 스친 의문에 조용히 눈살을 찌푸린 그는, 이내 신경을 거두고 고개를 털었다.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 좋은 사람이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선뜻 이렇게 도움을 줬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저, 저기요. 안 드세요?”
“…예? 아, 죄송합니다. 잠시 딴생각 좀 하느라.”
멍하니 점점 줄어드는 줄을 따라가던 창식은, 어느새 제 차례가 온 것을 보고선 식판을 내밀었다.
달그락-
배식 당번으로 뽑힌 남자가 덜어준 음식을 받은 그는, 근처 아무 바닥에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맛대가리 없는 꿀꿀이죽.
물을 얼마나 넣었는지 묽다 못해 죽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한 수준이었지만, 이런 거라도 먹어야 내일을 버틸 수 있었다.
위쪽에 둥둥 뜬 이 누런 기름도, 씹을 때마다 퀴퀴한 냄새가 올라오는, 다 뭉그러지는 건더기들도.
꾸역꾸역 전부 목구멍 안쪽으로 쑤셔 넣은 창식은, 싹싹 비운 식판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다 먹었으면 이만 들어가서 쉬어라! 내일은 새 기수들이 오는 날이니만큼, 평소보다 더 힘든 훈련이 있을 예정이니까. 후임들한테 보여주기에 지금처럼 민망한 수준이면 안 되겠지?”
“제기랄… 평소보다 더? 빌어먹을 놈들, 우린 지금도 한계라고.”
“쉿. 그런 건 속으로만 생각해. 그러다 괜히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빈 식판을 자리에 올려놓은 그는, 청천벽력 같은 기사의 말에 술렁이는 이들을 지나쳐 다 쓰러져가는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도중에 도시 중앙에 있는 우물을 보며 근처를 슥 둘러본 창식은, 내일 새로운 사람들을 불러들일 의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히 움직이는 기사들을 보고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끼익-
“망할, 그놈들 입에서 힘들다는 말이 나올 정도면 대체 얼마나… 어? 창식 아저씨, 통과하셨네요?”
“어, 어어. 그래. 운이 좋았지.”
곧 숙소에 도착해 좁아터진 방 안으로 들어선 그는, 가능한 기사들이 지나지 않는 밤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품에 든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할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않으면?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꼭 해내야만 하는 일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철걱- 철걱-
“뭐야? 밖에 갑자기 무슨 소란이래. 다들 뛰는 거 같은데?”
그렇게 세 평 남짓한 방에 열 명이 낑겨 누워 시간을 보내던 중.
밖에서 들리는 다급한 철신 소리에 정신을 차린 창식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숙소를 나왔다.
“이런 젠장! 최소한의 인원만 남고, 다들 빨리 빨리 움직여!”
“도대체 어떤 놈이 산에서 불을 지핀 거야! 마법사, 마법사들은 아직인가?”
건물을 나오기가 무섭게 저 멀리 시뻘겋게 불타오르고 있는 산맥 꼭대기를 마주한 그는, 양동이든 뭐든 무언가 담을 수 있을 만한 물건을 모두 챙기고선 우물로 향하는 기사들을 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
지금, 바로 지금이었다.
갑자기 왜 저 산맥에 화마가 덮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망할 기사 놈들이 하나둘씩 도시 밖으로 자리를 비우기 시작한 이때가 바로 기회였다.
“거기 너, 왜 밖으로 나온 거냐! 빨리 숙소로 돌아가 있어!”
“저, 그게… 목이 말라서….”
“뭐? 아니, 차라리 잘됐어. 지금 가서 안에 쉬고 있는 놈들 데리고….”
“알렉스! 이방인들은 그냥 내버려두고 어서 움직이기나 해! 저놈들 체력에 물을 이고 가봤자 이미 마법사 놈들이 다 꺼트린 뒤일 게 뻔한데, 뭐 하러 나중에 데리고 돌아오기 귀찮게 그래. 그리고 너, 목이 마르면 조금 기다렸다 떠 마시도록 해. 당장은 불을 끄는 게 우선이니까.”
“예, 예!”
하마터면 기사에게 붙잡혀 다른 사람들까지 데리고 또 저 산맥을 오를 뻔한 창식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그래, 딱히 급할 건 없었다.
중요한 건 어떻게든 우물에 가루를 털어 넣는 거지, 고작 몇 분 빨리 넣는 게 아니었으니까.
스윽-
그렇게 잠시 뒤쪽에서 기사들이 모두 떠나기를 기다리길 몇 분.
주변이 휑해진 우물가를 보고선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 그는, 우물에 매달린 바가지를 쥐고선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어휴, 그나마 근무 중에 일이 터져서 다행이네. 하마터면 잘 쉬다가 불러나갈 뻔했어. 귀찮게.”
“와, 넌 진짜 타고났다 타고났어. 예전에도 뭐 나갈 일만 생기면 다 근무 중이라 대기더니. 이번에도 쏙 빠져나가는구만.”
빌어먹을.
대부분 떠났는데 하필이면 멀지 않은 곳에 기사 둘이 남아 경계를 서고 있었다.
과연 저 괴물 같은 놈들 눈을 속이고 우물에 가루를 풀 수 있을까?
잠시 고민에 빠진 창식은, 이내 나지막이 고개를 저었다.
다음을 노려야 하나.
정 안 되면 새벽에라도 몰래 나올 궁리를 하던 그는,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온 발소리에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기, 기사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뭐야? 무슨 일이야?”
다급한 목소리로 기사들을 부르며 창식을 지나친 네 사람은, 뒤이어 누군가의 등에 업혀 오는 남자를 가리켰다.
“피, 피가… 방에 들어오다 넘어졌는데, 하필 벽에 머리를 박아서….”
“아이 씨, 한창 안 나가서 좋다 싶었는데. 잠깐만 봐봐.”
기사는 기절한 듯 축 늘어진 남자에게 다가가 피범벅이 된 머리를 보고선 눈살을 확 찌푸렸다.
“젠장, 멍청한 놈들. 애가 넘어지면 앞에서 받아주기라도 했어야지! 멍청하게 그걸 보고만 있었어?”
“그, 그게… 죄송합니다.”
“됐어. 마법사들은 다 불려 나갔지만, 사제들은 아직 남아있으니까. 다들 그 녀석 들고 따라와.”
이후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을 이끌고 어딘가를 향해 앞장선 기사들 보며, 창식은 조심스레 품을 뒤적였다.
부스럭-
그렇게 기사 하나를 데리고 사라지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상대가 눈을 찡긋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 기회였다.
그대로 혼자 남은 기사가 반대편 성문 쪽을 보고 있는 틈을 타 주머니를 꺼내든 창식은, 빠르게 내용물을 우물 안쪽으로 털어 넣었다.
“…됐어.”
이내 텅 빈 주머니를 빠르게 다시 품속에 숨긴 그는, 자연스럽게 뒤로 돌아 숙소로 향했다.
* * *
“여신님께서 이 미천한 종들을 위해 자애를 베푸시니….”
이른 새벽.
발라크와 셀레스트 그리고 늑대인간 무리를 이끌고 먼저 제단 근처에 숨은 나는, 드디어 의식을 시작한 사제들을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스릉-
대주교로 보이는 녀석이 외우는 기도문을 따라 지팡이를 높게 치켜드는 마법사들을 보며 단검을 빼든 나는, 이내 이쪽을 돌아보는 셀레스트를 향해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직이었다.
곧 놈들이 성물을 빼어들 때까지…
사락-
이윽고 대주교가 옆에 선 사제에게 손을 내밀어 작은 석상을 받아드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제야 고개를 주억이며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갔다.
스억-
푸확-!
“뭐, 뭐야?”
“적습! 적습이다!”
곧바로 사제와 마법사들을 지키고 둘러싼 기사들 중 한 놈의 목을 베어낸 나는, 위로 치솟았다 떨어지는 핏물을 맞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 쓸어버려!”
“맡겨만 주십시오, 형님!”
“이 망할 인간 놈들, 이런 데서 몰래 수상한 꿍꿍이나 꾸미고 있었다니. 뭐든 그게 네놈들 마음대로 될 줄 알았어?”
촤악-!
“아아아악!”
“젠장, 하필이면 의식이 진행 중일 때… 다들 소환이 끝날 때까지만 버텨라!”
스릉-
나는 저들에게 달려드는 늑대인간들을 보고선 황급히 검을 빼든 기사들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 비겁한 놈들. 이런다고 너희가… 어, 어어?”
촤악-!
“흐흐. 마력, 못 쓰겠지?”
“어, 어째서….”
제대로 걸렸군.
난 당황한 기사들을 보며, 조용히 피 묻은 단검을 들어 올렸다.
학살의 시간이다.
이 빌어먹을 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