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허억, 헉….”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달리기를 이어나가던 남자, 김창식은 벌써 저 멀리 앞서 간 사람들을 보며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다리를 채찍질했다.
퇴근길에 약주 한 잔 걸치고 돌아오던 중, 영문도 모르게 이 빌어먹을 세상으로 떨어진지도 어느덧 한 달.
반 백 살은 진즉에 넘어 이젠 한창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저 젊은 양반들 옆에 붙어 뒤처지지 않고 달리는 건 무리였다.
“거기 너! 농땡이 부리지 말고 빨리 앞에 따라붙어!”
“후욱… 제기럴, 누군 안 그러고 싶어서 이러고 앉았나.”
짜악-!
“어윽!”
“그렇게 궁시렁거릴 여유 있으면 젖 먹던 힘까지 쏟아부우란 말이야! 이래가지고 내일 후임 기수들 보기 부끄럽지 않나?”
하지만 이 망할 기사 놈들은 그런 사정 같은 건 봐주지 않았다.
끝이 뾰족한 철신에 엉덩이를 차인 창식은 눈물을 꾹 삼켰다.
종아리도 허벅지도 당기다 못해 끊어질 것만 같았지만, 여기서 넘어지면 저번처럼 잔뜩 얻어맞기만 할뿐이었다.
“하악, 학… 욱, 우웨에엑!”
결국 어떻게든 중간에 쉬지 않고 출발선까지 돌아오는데 성공한 그는, 그대로 풀썩 쓰러져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자, 이제 휴식은 끝이다. 이만 다들 일어나도록.”
하지만 숨을 채 고르기도 전에 앞서 도착해 쉬고 있던 인원들을 모두 일으켜 세우는 기사의 명령에, 창식은 눈가를 슥 닦으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지난 한 달간 받은 훈련의 성과를 보기 위해, 저기 보이는 산으로 들어가서 각자 산짐승을 하나씩 사냥해보도록 한다.”
“예? 지, 짐승이요?”
“그래.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거 없다. 중턱까지는 끽해야 멧돼지 정도나 나올 뿐이니까. 조심만 한다면 죽을 일은 없을 거다.”
“그, 그런….”
덤덤하게 내뱉은 기사의 말에 여기저기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음에도, 창식은 아직 가쁜 숨과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느라 주변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흐억!”
“음? 뭐야, 거기 무슨 문제 있나?”
“아, 아닙니다. 잠시 발을 헛디뎌서….”
앞서 산을 오르는 기사를 따라 걸음을 옮긴 창식은, 휘청거리는 다리 때문에 몇 번이고 넘어질 고비를 넘기며 힘겹게 초입에 다다랐다.
“자, 여기서부터는 너희들끼리 움직이도록 한다. 시간은 저 하늘이 벌겋게 물들 때까지 넉넉하게 주겠다. 얘기했던 대로, 아무 짐승이든 좋으니 하나씩 사냥해서 돌아오도록. 만일 빈손으로 돌아온다면 다시는 실패하지 못하도록 앞으로 새벽까지 단련시킬 테니 그리 알도록.”
새벽까지.
당장 아침 일찍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 하는 훈련만 하더라도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는데, 거기서 밤새 단련을 더 시키겠다니.
이건 사실상 골병을 내서 죽이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고하건데. 가능하면 여기서 도망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어차피 너희 이방인들이 여길 벗어나 봐야, 어디 갈 수 있는 곳도 없으니까. 아마 길거리에서 굶어 죽지만 않으면 다행일 거다.”
도망칠까.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기류가 돌았지만, 이어진 경고에 다들 고개를 털었다.
기사의 말마따나 힘들다고 여기서 벗어나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실제로 이 망할 곳에 끌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새벽을 틈타 도시를 빠져나갔던 인원들이 사흘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전부 돌아왔지 않았던가.
지금도 그때 피골이 상접하다 못해 얼굴이 누렇게 떴던 사람들의 행색을 떠올리면,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뿐만 아니라 결국 그렇게 다시 돌아오고도 제멋대로 자리를 비우고 도망쳤다는 죄목으로 흠씬 두들겨 맞아, 네 명중 둘은 결국 구덩이 아래 파묻히지 않았나.
적어도 이들 아래에 있으면 죽을 만큼 힘들지언정, 배를 곯아 죽을 걱정은 없었다.
물론 그마저도 어디 가축들에게나 먹일 법한 꿀꿀이죽 같은 것들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럼 바로 시작하지. 한 가지 충고해주자면 가능한 빨리 움직이는 편이 유리할 거다. 몇 번 해봤는데, 꼭 다섯 정도는 잡고 싶어도 얼굴 한 번 못 봤다고 하더군.”
타다닥-
기사의 말이 전부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서 급히 튀어나간 사람들로 인해 흙먼지가 잔뜩 일었다.
무조건 잡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새벽 훈련에 객사해버릴지도 몰랐으니까.
“육시럴! 이 산속에서 도대체 뭘 잡으라는 거야.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구먼.”
가뜩이나 지친 몸으로 산을 오르느라 거칠어진 숨을 고르던 창식 또한, 뒤늦게나마 산짐승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수가 많지는 않은데, 그나마 있는 짐승들조차 먼저 간 이들이 쓸어 담았으니.
결국 슬금슬금 해가 넘어가기 시작할 때가 돼서도 토끼 한 마리 찾지 못한 그는, 급한 마음에 산길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후욱… 이런 망할, 절대 빈손으로 돌아가선 안 되는데….”
쿵- 쿵-
“흐억! 뭐, 뭐여. 이 소린….”
기어코 저도 모르게 중턱을 넘어 산맥 윗부분까지 오른 창식은,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와 함께 덜덜 떨리는 바닥을 보고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크워어어어!
“히, 히이이익!”
지근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흉포한 울음소리에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그는, 꼴사나운 비명과 함께 풀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쩌억-!
쿵-
“아, 아아… 고, 고….”
이윽고 아름드리 커다란 나무를 짚대마냥 가볍게 쓰러트리며 모습을 드러낸 짐승을 마주한 창식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놈을 올려다봤다.
척 보기에도 그의 머리통보다 더 커다란 앞발.
고개를 거의 90도까지 꺾어야 간신히 얼굴을 살필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체구.
시뻘건 안광을 빛내며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괴물 같은 크기의 거대 곰.
-크워어어억!
“아, 으….”
다시 한 번 괴성을 지르며 천천히 앞발을 들어 올리는 놈의 모습에 황급히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던 창식은, 전혀 마음대로 움직여주질 않는 다리에 눈물을 흘리며 바닥을 기었다.
여기까지인가.
난데없이 이런 영문 모를 세상에 끌려와선, 마왕군인지 뭔지 알지도 못하는 놈들과 맞서기 위함이라며 강제로 뼈 빠지게 굴려지기를 한 달.
그럼에도 어떻게든 꼭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죽어라 버텼건만, 이런 개죽음이라니.
그는 억울함과 분통함에 눈물을 흘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푹-
-크웍…
“어머. 아직 한 명 더 있었네.”
…사람, 목소리?
곧 닥쳐올 죽음을 기다리며 가능한 고통 없이 가기만을 바라던 창식은, 귓가를 살살 간질이는 목소리에 슬며시 눈을 떴다.
“아….”
아름답다.
시뻘건 핏물을 뒤집어쓰고도 전혀 가려지지 않는 미모의 여인에게 넋을 빼앗긴 그는, 점차 몽롱해지는 기분에 몸을 맡긴 채 천천히 정신을 놓아갔다.
“흐응… 솔직히 패는 이미 충분한 거 같긴 한데. 뭐, 그래도 더 챙겨서 나쁠 건 없겠지. 아직 가루도 좀 남았고.”
패? 가루?
알 수 없는 얘기에도 홀린 듯 그녀에게로 다가간 창식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저를 내려다보는 여인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명령을.”
* * *
부스럭-
“릴리아나. 준비는 잘 되고 있나?”
기사단의 일부가 이방인들과 함께 산맥으로 향한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도시 근처를 둘러보고 돌아온 나는, 정상에서 누군가에게 가루가 담긴 자루와 함께 토끼 사체를 쥐어주는 릴리아나를 보고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방금 그걸로 끝. 다해서 스무 명 정도 되겠네. 그런데 정말 이걸로 괜찮겠어? 아무리 매혹이 심층까지 들어갔다고 해도, 저 아이들의 능력이 변하는 건 아니야. 다들 시킨 대로 최선은 다하겠지만, 기사들의 눈을 속이고 몰래 우물에 가루를 타는 건 불가능할 텐데.”
“그건 걱정하지 마라. 그 멍청한 기사 놈들은 절대 눈치 채지 못할 테니까.”
나는 릴리아나의 물음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황실 기사단 놈들이 그 우물 근처에 한 명씩만 돌아가며 보초를 서고 있어도, 우물에 무언가를 털어 넣는 그 수상한 모습을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항상 누군가 우물 근처를 지키고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어제와 오늘 도시 근처를 돌며 주변을 확인해본 결과, 지금 에레브를 지키고 있는 기사들의 수는 기껏해야 백 명 남짓.
물론 하나하나의 실력이 실력이니만큼 절대 모자란 전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적당히 주변에서 눈길만 잘 끌어준다면, 오늘 가루를 받아간 녀석들끼리도 충분히 일을 치를 수 있을 터였다.
정 안 되면 몸으로라도 시야를 막아버리면 그만이니까.
“흐응…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무튼 오늘 난 여기까지. 이만 들어가서 쉬어도 될까?”
“마음대로 하도록.”
난 이만 등을 돌려 산맥을 내려가는 릴리아나를 보며, 천천히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조금 있다 해가 저물고 나면, 봉우리 너머 반대편에 불씨를 지필 생각이었다.
이 커다란 산맥이 모두 불에 타 민둥산이 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진 않을 테니, 분명 마법사들을 대동하고 기사단 일부가 밖으로 빠져나오겠지.
그럼 나머지는 매혹에 걸린 놈들이 알아서 움직여줄 터였다.
어떻게든 우물에 가루를 풀어버리기만 하면 끝이었다.
여신의 숨결은 무취, 무미의 독초였으니까.
거기에 아주 소량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으니, 딱히 물에서 녹색 빛이 돌 때까지 풀 필요도 없었다.
제아무리 황실 기사단이라고 한들, 저들의 수원에 이 풀어져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겠지.
이거 참,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내일 그 콧대 높은 황실 기사단 놈들이 잔뜩 당황한 모습을 볼 생각을 하니, 절로 입꼬리가 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