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셀파스트. 저번에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됐나.”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조금 있다 연락하려고 했어. 다들 별 불평 없이 알겠다고 하던데? 생각보다 신뢰받고 있나 보네. 역시 내 친구다워.]
마차를 타고 알카에다를 떠난 지도 어느덧 열흘.
마왕군이 점령한 지역을 통해 금세 제국 중부에 들어선 나는, 슬슬 북부의 도시들을 눈앞에 두고 셀파스트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런데 그렇게 전력을 모아서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걸까? 뭐든 재밌어 보이는 일일 건 분명하겠지만, 조금 위험할 수도 있을 텐데. 안 그래도 마왕님들은 물론 사천왕, 귀족들까지 널 주목하고 있는 지금, 그렇게 눈에 띄는 짓을 계획하다니. 응?]
나는 수정구에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들이미는 녀석을 보며, 가만히 어깨를 으쓱였다.
“별 거 아니다. 수인… 아니, 연합 놈들 모두가 믿고서 버티고 있는 구석을 이번 기회에 완전히 박살내버리려는 것뿐이다.”
[흐음… 녀석들이 믿는 구석이라. 그렇지 않아도 수인 놈들이 대체 뭘 믿고 제 땅을 버린 건지 궁금했는데, 넌 알고 있나 보네? 이쪽이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그것만큼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는데 말이야.]
뭐, 그렇겠지.
반테온 그 자식도 성물이 밖으로 나왔다는 것만 알았지, 이방인 소환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으니까.
아마 관계자들을 제외하곤 황제와 교황 그리고 성녀 같은 극히 일부만이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방인들만큼은 연합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었으니까.
이것마저 실패한다면, 수인족들이 제 땅을 버려가면서까지 제국으로 들어와 거북이처럼 웅크릴 준비를 할 이유가 없었다.
“운이 좋았다. 이번에 엘프 여왕을 붙잡아서 들을 수 있었지.”
물론 거짓말이었다.
테네스가 제국 측 사람과 만난 것은 끽해야 교황과 성녀 그리고 황태자뿐.
황태자야 그놈도 모르고 있었으니 말할 필요도 없고, 교황과 성녀는 아무리 그녀가 여왕이라고는 한들 따로 계획을 알려줬을 리 없었다.
뭐가 됐든 그 사실은 아는 사람이 더 적을수록 좋았으니까.
게다가 테네스가 벌인 짓은 아니긴 했어도, 엘프들이 에란델에서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을 터였다.
놈들이 바보도 아니고,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그녀를 믿고서 이방인 소환에 대한 얘기를 해 주겠는가.
[엘프 여왕이라… 음, 그러네. 확실히, 그 여자는 연합에 호의적이었다고 하니까. 그래서 놈들의 버팀목이 돼주고 있는 게 뭐래? 친구 좋다는 게 뭐야. 나한테만 살짝 알려줘 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이더니 슬그머니 귀를 붙여오는 셀파스트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 녀석한텐 얘기해줘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곧 드러날 일이기도 하고, 그한테는 꽤 도움을 받은 전적이 있으니까.
“이방인이다.”
[…이방인?]
“그래.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소환해서 전력으로 써먹겠다고 하더군.”
[다른 세계? 아니, 잠깐. 그게 대체 무슨….]
난 순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연신 눈을 깜빡이는 녀석을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쉽게 말해서 중간계과 마계가 아닌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들과 함께 싸워줄 이들을 부르겠다는 거고.”
실상은 저들이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는 전투노예들을 데려오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말이다.
빌어먹을 연합 놈들.
우리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그런 게 정말 가능하단 말이야? 아니, 만일 그 말대로 소환한다고 하더라도 놈들은 어떻게 설득시킬 건데? 우리 중간계가 위기에 빠졌어요, 도와주세요. 하면 그냥 도와준대?]
“글쎄.”
으득-
나는 이어진 그의 의문에 슬쩍 고개를 돌리고 이를 악물었다.
그래, 차라리 부탁이었다면 어땠을까.
“연합이 무슨 수를 쓸지는 몰라도, 확실한 건 절대 좋은 방법은 아니겠지.”
[으음… 그야 그렇겠지. 지금 녀석들의 상황에서 아무리 잘 타일러봐야, 생판 모르는 놈들을 위해 목숨을 걸어주는 녀석들이 과연 몇이나 되겠어.]
있을 리가 없지.
그런 멍청이들이.
그래서 억지로 몰아 세워졌고 말이다.
[아무튼 지금 그 이방인들의 소환을 멈추러 가고 있다는 거지? 솔직히 그놈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만에 하나 연합에 합류한다고 해도 전황을 뒤집을 정도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녀석들도 무언가 확신이 있으니 그걸 믿고 뭉치려는 거겠지.]
셀파스트는 아직도 이방인들을 이용해 마왕군을 몰아내겠다는 연합의 계획에 긴가민가하는 눈치였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아직 그 망할 연합 놈들이 얼마나 많은 이방인들을 불러들이는지, 또 그들에게 여신의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더러운 수작을 부리려 드는지 모를 테니까.
[뭐, 듣고 보니 확실히 재미있어 보이는 계획이긴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면 그곳을 지키고 있는 놈들도 보통은 아닐 텐데. 그렇게 위험한 곳에 내 여동생까지 불러들였단 말이지? 이거 참, 그래도 오빠로서 다시 거절하라고 충고라도 해줘야 하나.]
“셀파스트….”
[아하하! 장난이야, 장난. 어떻게 보면 녀석한테도 확실한 전공을 세울 기회기도 하니까. 그렇지 않아도 제국 북쪽은 웬 괴물 같은 인간 하나 때문에 꽤 애먹던 참이었거든. 게다가 빚을 갚아야 한다니 뭐니 하면서, 이 못난 오빠 말은 들을 거 같지도 않고.]
그는 씁쓸한 미소로 말을 줄이며,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무튼, 죽지만 않게 잘 봐줘. 수인 놈들 동선은 계속해서 알려줄 테니까.]
“음, 알았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묵묵히 고개를 주억이며, 이만 통신을 끊었다.
어차피 성물을 지키고 있는 놈들이라고 해봐야, 가제프나 에리스 같은 규격 외의 강자들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녀석들은 지금 최전선에서 마왕군을 상대해야 했으니까.
“에릭, 어떻게 됐나. 얘기는 잘 전했다고 하던가?”
“그래. 다들 알겠다고 했다더군.”
이걸로 가능한 모을 수 있는 전력은 다 끌어 모은 셈이었다.
물론 원한다면 여기서 본대에 더 증원을 요청할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간 연합 놈들의 시선도 끌어버리게 될 터였다.
사실 지금도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어디 우르르 몰려서 다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조금씩 목적지로 모여들고 있는 형태니, 그리 쉽게 눈치 채지는 못했을 거다.
만에 하나 어떻게든 알아냈다고 쳐도, 이쪽이 대부분 전선에 남아있는 만큼 저들 또한 쉽사리 주요 전력을 빼내지는 못할 테고 말이다.
“형님, 그럼 앞으로 얼마나 남은 겁니까?”
나는 발라크의 물음에 조용히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목적지가 있는 방향을 살폈다.
아직 도시는커녕 그 근처의 마을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거리로만 보자면 그리 머지않았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산맥을 돌아가기만 하면 금방이었으니까.
“길어야 이틀이다. 가서 다른 애들을 기다릴 시간까지 생각하면, 넉넉하게 사흘이면 되겠지.”
셀레스트와 릴리아나. 그리고 벨제붑을 설득해 허락을 맡느라 출발이 조금 늦춰진 아이시스들까지.
그들이 오기 전에 먼저 도착해서, 적당히 주변을 둘러보며 작전이라도 짜놓으면 될 거 같았다.
* * *
“다 왔다. 이만 내리도록.”
“벌써 말이냐?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구나.”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밤새 산맥을 빙 돌아 건너편에 도착한 나는, 근처에 마차를 대고서 잠시 머물 만한 동굴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좋겠군. 둘 다 잠시 들어가서 쉬고 있어라. 금방 둘러보고 돌아오마.”
“예? 또 혼자 가시는 겁니까?”
“그냥 조금 살펴보고 오는 것뿐이다. 심심하면 어디 안 들키게 산짐승이라도 잡아서 고기라도 굽고 있도록.”
금방 머물만한 곳을 찾아 두 사람을 놓고 산을 내려 온 난, 넓게 펼쳐진 초원을 지나서 조심스럽게 성벽이 보이는 곳까지 다가갔다.
“거기! 농땡이 피우지 말고 계속 움직여! 그런 식으로는 백날이 지나도 마족 놈들의 발끝에조차 닿을 수 없다!”
“허억, 헉… 으윽!”
툭-
“이, 이젠… 이젠 더 이상 못해!”
“네놈, 뭘 가만히 엎드려서 엄살을 피우는 거냐! 빨리 빨리 일어나!”
짜악-!
“아악!”
도시 근처의 초원에 세워진 커다란 목책과, 그를 따라 달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쫓으며 낙오자들에게 가차 없이 채찍을 휘두르고 있는 기사들까지.
“모레는 네놈들의 다음 기수들이 소환되는 날이다. 그 녀석들 앞에서도 이렇게 한심한 모습을 보일 거냐!”
“크윽… 젠장! 애초에 너희들이 멋대로 데려온 거잖아! 다들 원래 세상에서 잘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불러내서 이런….”
뻐억-
“아, 아아아악! 팔, 내 팔이….”
“이 쓰레기 같은 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지금 너희가 입고 있는 갑옷, 무기. 조금 전에 먹고 나온 음식들까지. 그게 다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거냐! 위대하신 황제 폐하와 지고하신 여신님께서 네놈들을 위해 친히 은덕을 베풀어주셨거늘. 하루라도 빨리 더 강해져서 그에 조금이나마 보답해드릴 생각은 안 하고, 어디서 감히 그런 망발을!”
나는 철저하게 이방인들을 몰아세우고 있는 기사 놈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빌어먹을 놈들.
“아윽, 흐으윽….”
“엄살 부리지 말고 빨리 뛰어라! 계속 농땡이를 피운다면 그땐 팔이 아닌 머리를 분질러줄 테니.”
“히, 히이익!”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다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저런 잔챙이 몇 잡자고 계획을 다 망칠 수는 없었다.
사삭-
이후로 조금 더 놈들을 지켜보던 나는, 이내 해가 중천에 떠오름과 동시에 도시 안쪽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조용히 산맥으로 돌아갔다.
“분명 모레라고 했었지.”
나는 기사의 입에서 나온 얘기들을 되새기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거 타이밍 한 번 끝내주는군.
이방인들을 소환하기 위해선 교단의 성물이 필요하다.
그 말은 즉, 놈들이 의식을 치르기 위해선 반드시 성물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뜻이었다.
망할 놈들, 조금만 기다려라.
곧 성물과 함께 다 저승으로 보내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