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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136화 (136/200)

제136화

“에릭! 어떻게 됐나. 괜찮나?”

무사히 회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나는, 안전부절한 표정으로 건물 앞을 서성이던 카렌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별일 없었다. 조금 경고를 받긴 했지만 말이야.”

“…경고?”

다행히 아이베른과 그 일행을 죽인 죗값은 큰 징계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본래 이번 알카에다 공략에서 세운 공적으로 수여받을 예정이었던 1급 훈장을 박탈당하긴 했지만, 그거야 뭐 이미 두 개나 있으니 딱히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내 복수지, 이 거추장스러운 메달 쪼가리가 아니었으니까.

“그보다 발라크는 아직인가? 가능하면 일찍 출발하고 싶은데.”

“방금 도착했다 아이시스랑 함께 보고하러 갔으니, 곧 다시 돌아올 거다. 그보다 출발이라니, 또 어디로 가는 건가?”

“음. 꽤 괜찮은 소식을 들어서 말이다.”

나는 테네스를 고문해 알아낸 정보들을 떠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에리스의 실책 이후 그녀에게 내려진 형벌은 기껏해야 가택 근신뿐.

엘븐하임 내에 그랜드마스터인 그녀를 막아설 수 있을 만한 인물이 있을 리 만무하니, 사실상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긴 제아무리 여왕이라고 한들, 모든 엘프들의 우상이나 다름없는 에리스를 어찌 가둘 수 있겠는가.

헌데 그마저도 이번에 제국 남부에서 마왕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에리스의 죄를 사면하고 근신마저 풀어버린 모양이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일단 그녀가 엘븐하임에 남은 수호자들을 이끌고 지원을 와주길 바랐던 거겠지.

하지만 에리스는 보란 듯이 테네스의 기대를 배신해버렸고, 결국 여왕은 제국군과 함께 패전을 거듭하다 내게 붙잡혀 죽어버리고 말았다.

테네스의 죽음은 머잖아 엘븐하임에 전해질 테고, 그렇게 되면 당연히 누군가는 그 빈자리를 채워야할 것이다.

본래대로라면 테네스의 핏줄이 왕좌에 올라야 마땅하겠지만, 아쉽게도 그녀에겐 자식이 없었다.

물론 그래도 형제가 없는 건 아니니 그녀의 여동생이나 남동생이 자리를 물려받아도 되겠지만, 실제로 누가 왕위에 오르게 될지는 뻔했다.

테네스 그 멍청한 년이 왕가에 보다 호의적이던 수호자들을 전부 데리고 나와 죽어버렸으니, 현재 엘븐하임에 남아있는 녀석들은 에리스의 감시를 위해 놔둔 몇몇을 제외하면 대부분 그녀를 더 따르는 무리들뿐일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어떤 왕족이 미치지 않고서야 제 계승권을 주장하려 들겠는가.

하다못해 에리스가 백성들에게 미움이라도 사고 있었다면 모를까.

오히려 왕가의 그 누구보다 더 존경받던 인물이었다.

사실상 엘븐하임은 이걸로 에리스의 손에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린 북쪽으로 간다.”

“북쪽? 지금 수인 놈들이 있는 곳 말이냐? 하지만 거긴 너무 멀지 않느냐.”

“괜찮다. 아마 올라가던 도중에 만나게 될 테니까.”

“…도중에 만나?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카렌의 물음에 씨익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북쪽 전선이 꽤 잘 풀리고 있던 모양이야. 수인들이 제 땅을 버리고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더군.”

에리안의 죽음 이후, 조사를 위해 숲으로 불러들였던 엘프들을 제외하고도 엘븐하임 밖에 나가있던 엘프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엔, 당연하게도 제국이 아닌 수인 연합의 땅까지 넘어가 자리를 잡은 이들도 있었다.

내가 테네스로부터 얻은 정보들 중에 가장 쓸 만했던 게 바로 이것.

그녀가 그런 엘프무리들 중 하나와 연락해 얻은 정보로, 수인들이 결국 발록과 뱀파이어들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제국으로 도망쳤다는 이야기였다.

“우리 마왕군의 손에 그 넓은 땅덩이가 통째로 들어오게 된 건 확실히 좋은 일이지만, 그 수인 놈들이 제국 땅에 무사히 자리잡아버린다면 오히려 이쪽이 꽤 곤란해진다. 백 명이서 백만큼을 지키고 있는 곳보단 백 명이서 오십만큼 지키고 있는 쪽이 더 뚫기 어려운 법이니까.”

물론 그들에게도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켜야할 땅이 좁아진 만큼, 그 땅에서 얻었을 곡식들 또한 줄어든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식량부족이라는 게 그렇게 단시간에 문제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다.

못해도 수개월, 자칫하면 연단위로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물론 그렇게 내준 땅을 결국 언제까지고 되찾지 못한다면 결국 제 살을 파먹는 짓만 하게 된 꼴이겠지만, 놈들이라고 아무런 대책 없이 그런 일을 저지른 건 아닐 터였다.

분명 이방인들을 써먹을 생각을 하고 있는 거겠지.

이미 제국 내에서 이방인들의 소환이 시작됐다고 했으니, 머잖아 그들이 슬슬 전장에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그 잠깐의 시간을 버티는 것뿐.

그렇기에 저들의 땅을 내주어가면서까지 제국으로 들어와 똘똘 뭉치려는 거겠지.

“으음… 그럼 그 수인 놈들이 자리를 잡기 전에, 우리가 먼저 올라가서 쓸어버리자는 건가?”

“그래, 바로 그거다.”

“하지만 에릭, 그래봐야 본녀를 포함해도 얼마 되지 않는 인원으로 무얼 하겠다는 건가? 제 땅을 모두 버리고 내려올 정도라면 한둘이 움직이는 게 아닐 텐데.”

나는 카렌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발라크와 나, 그리고 그녀까지.

끽해야 세 명밖에 안 되는 인원으로는 아무리 좋은 계책을 써먹는다고 한들 한계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거야 함께할 인원을 더 늘리면 그만 아니겠는가?

“걱정하지 마라. 이럴 때를 대비해서 그간 도와줄 만한 녀석들을 키우고 다녔던 거니까.”

아이시스와 셀레스트.

두 사람은 내게 빚진 게 있으니 마다하지 않을 터였다.

릴리아나도 이번에 반테온의 신변을 넘겨 받으며 얻은 게 있을 테니, 병사들을 끌고 오진 못하더라도 그녀 하나만큼은 확실히 챙길 수 있을 터였다.

“그래도….”

“괜찮다.”

턱-

나는 그럼에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카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아무리 그간 모아온 인연들을 모두 써먹는다고 해도, 여타 다른 마왕들이 이끄는 부대에 비하면 그 십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약소한 전력이었다.

그런데 고작 그걸로 수인들을 전부 상대하겠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딱히 전면전을 치를 생각은 없으니까. 그저 놈들이 제 땅을 버리고 내려올 만큼 믿고 있는 구석을 부수러 가는 것뿐이니까.”

물론 나 또한 그들을 데리고 수인 놈들을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노리는 건 오직 하나.

이방인들의 소환을 멈추는 것뿐이다.

그것만 막을 수 있다면 연합의 멸망은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읏… 아, 알겠다! 알겠으니 이제 이 손 좀 그만 치워라!”

짝-!

“으음….”

나는 내 손을 팍 쳐내며 고개를 픽 돌린 카렌을 보고선, 어색한 미소와 함께 손을 거두었다.

“어쨌든 이제 슬슬 출발해야 될 것 같은데.”

난 회의실에서 있었던 내용이 어디 흐르기라도 했는지,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무서워라.

계속 있다간 악마족들한테 시비라도 걸리는 거 아닐까 모르겠군.

뭐 어쨌든 아이베른을 죽인 탓에 그들에게 미움을 산 것뿐만 아니라도, 출발을 서둘러야 되는 이유는 또 있었다.

지금이 바로 이방인들의 소환을 멈춰 세울 적기였으니까.

엘븐하임은 테네스의 죽음으로 인해 당분간 움직일 수 없었다.

만일 에리스가 왕좌를 잇게 된다면, 기존 왕가의 처우부터 시작해 제국과의 관계 등등.

앞으로 정리해야 될 게 산더미였으니까.

수인들 또한 이제 내려오기 시작했으니, 지금 이 때를 놓친다면 아예 이방인들을 소환하고 있는 도시 자체에 다가서는 것부터가 불가능해질지도 몰랐다.

“형님!”

도착했나.

나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방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발라크.”

“형님, 무사하셨군요!”

녀석 또한 돌아오면서 내가 마왕들에게 불려갔다는 얘기라도 들었는지, 내가 멀쩡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그보다 방금 일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쉬는 시간도 없이 미안하지만, 바로 떠날 채비를 하도록.”

“예? 떠나다니요?”

“가능한 빨리 없애야 할 곳이 있다. 자세한 건 가면서 설명해주지.”

“아, 예. 알겠습니다!”

나는 씩씩하게 고개를 주억이는 그를 보고선, 만족스러운 미소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시스.”

“…응, 에릭.”

난 발라크의 옆에 서있던 아이시스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도와주겠나?”

“응, 물론.”

좋아.

나는 마찬가지로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천천히 영주성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다들 준비를 마치고 북문으로 나오도록. 난 카렌이랑 같이 먼저 가서 마차를 준비해두겠다.”

“예, 형님!”

꾸욱-

“…음?”

그렇게 마차를 구하러 막 내성을 나서려던 찰나.

난 누군가 소매를 당기는 느낌에,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에릭.”

아이시스인가.

그녀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 천천히 말을 이었다.

“고마워. 내 부탁, 무리한 거였는데도….”

뭐야, 그 얘긴가.

싱겁긴.

“그렇게 고마워할 거 없다. 그만큼 이번에 부려먹을 생각이니까. 그리고.”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새하얀 머리칼에 손을 올렸다.

“그 자식, 솔직히 나도 별로 마음에 안 들었거든.”

대놓고 눈앞에서 시비를 걸어오는데 굳이 피해줄 이유는 없었다.

힘이 있으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 빌어먹을 용사 시절이었다면 모를까.

이제는 더 이상 바보처럼 당하고 부려 먹힐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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