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135화 (135/200)

제135화

“에, 으….”

“쯧. 더는 못쓰겠군.”

툭-

금세 완전히 망가져버린 테네스를 내려놓은 나는, 이만 피 묻은 단검을 닦고 집어넣었다.

끽해야 한 시간 남짓.

너무 오래 끌면 혹여 이 모습을 들킬 가능성이 있었기에 조금 서둘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빨리 끝날 줄은 몰랐다.

반테온도 릴리아나에게 홀린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이거보단 오래 버텼을 텐데.

고귀한 엘프들의 여왕은 무슨.

웃기지도 않는군.

콰악-

“읏….”

나는 적당히 고문의 흔적을 없애고, 그녀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꿀렁꿀렁 입 안으로 들어온 핏물이 목구멍을 지날 때마다, 이루어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이 천천히 차올랐다.

그래도 꼴에 왕족이라고, 맛 하나만큼은 훌륭하군.

“프흐….”

바싹 마른 몸뚱이를 들추어 매고 동굴 밖으로 나선 나는, 어느새 중천에 뜬 해를 보며 조용히 산맥을 내려다봤다.

더 이상 도시에서 연기가 올라오지 않는 걸 보아하니, 저쪽도 대강 정리된 모양이었다.

툭-

“쓸모없는 년. 흡혈해도 능력치 하나 주지 않다니.”

다른 건 몰라도 마력만큼은 조금 올려줄 줄 알았거늘.

썩어빠지긴 했어도 그 능력만큼은 진짜였던 알폰스와는 달리, 왕족이라는 껍데기를 빼고 나면 무엇 하나 남는 게 없는 일개 하이엘프.

테네스는 딱 그 수준밖에 못되는 녀석이었다.

파슥-

적당히 수풀이 우거진 곳을 찾아 그녀의 사체를 내려놓고, 텅 빈 눈두덩을 짓밟았다.

힘없이 바스러져 가루가 되어가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다 이내 발걸음을 뗀 나는, 조용히 도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바스락-.

“누, 누구냐!”

금방 산맥을 내려와 서문 앞에 도착한 난, 이쪽을 향해 무기를 겨누는 경비들을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상하군.

분명 갑옷도 다 갈아입었을 텐데, 못 알아보는 건가?

“…인간? 추적조한테 쫓겨 내려온 건가.”

놈들은 가만히 내 모습을 살피더니, 이내 창날을 세우며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 그러고 보니 화상의 흉터가 아직 남아있었군.

송곳니도 덜 자랐으니 못 알아볼 만도한가.

“투마왕님 휘하의 독립부대장, 에릭 가이오스다. 이만 들어가서 좀 쉬고 싶은데, 다들 비켜줬으면 좋겠군.”

“뭐, 뭣? 에릭….”

“놈! 거짓말하지 마라! 어디서 그분의 얘기를 들은 건진 모르겠지만, 한낱 인간이 감히 우리의 눈을 속이려들다니!”

음, 이거 곤란하군.

나는 오히려 더욱 이쪽을 몰아세우는 녀석들을 보며,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본래 입던 옷들은 다 갑옷을 빌려 입을 때 막사에 놓고 왔던지라, 사실상 내 얼굴을 모른다면 말로만 그들을 납득시킬 순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증명하는 수밖에.

스륵-

“이, 이놈 무기를… 다들 덮쳐!”

난 단검을 뽑아들기 무섭게 이리로 달려드는 놈들을 뒤로하고, 조용히 손바닥을 슥 그었다.

“으, 으응? 이 녀석, 갑자기 제 손바닥을….”

“자, 잠깐만! 피, 피가….”

뚝- 뚜욱-

방울방울 떨어진 핏방울들을 모아 허공에 시뻘건 창을 만들어낸 나는, 놀란 눈으로 흠칫 멈춰선 녀석들을 지나 성문으로 향했다.

아무리 일반 잡졸이라도 혈마법을 모르진 않겠지.

“배, 뱀파이어… 아, 아!”

“모, 못 알아 봬서 죄송합니다! 에, 에릭 님….”

“됐다. 제 역할에 충실했던 것뿐이니.”

다행히 별 탈 없이 성문을 지난 나는, 아직 정리가 모두 끝나진 않았는지 어수선한 거리를 지나 마왕들을 찾았다.

어디… 거리엔 안 보이고.

이러면 역시 어디 영주성 같은데 들어가서 회의 중인 거겠지.

“음? 에릭?”

“카렌. 오랜만이군.”

예상대로 다들 이쪽에 모여 있는 듯 장군급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영주성 안쪽으로 들어선 나는, 금방 정원 의자에 앉아 쉬고 있던 카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랜만은 무슨, 그저께 봤지 않느냐. 아니, 그것보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냐!”

“무슨 짓이냐니, 뭐가 말이냐.”

“그러니까, 묻고 싶은 건 이 몸이다! 도대체 어떤 사고를 쳤기에 아버지께서… 후우. 아니,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어서 회의실로 가 보거라.”

사고?

…이런, 설마 벌써 들킨 건가.

나는 한숨을 푹푹 쉬며 내 등을 떠미는 카렌을 따라, 곧장 회의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발라크는 어디 있지?”

“…그 녀석은 지금 아이시스랑 같이 추적조로 나가있다. 그보다는 네 걱정부터 하도록.”

똑똑-

“누구냐.”

“카렌입니다. 에릭 가이오스를 데리고 왔습니다.”

“…들어오도록.”

끼이익-

카르카쉬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천천히 열린 문 안쪽을 들여다본 나는, 생각보다 무거운 분위기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참, 환대가 거칠군.

“…늦었군.”

“죄송합니다. 일이 좀 늘어져서.”

나는 꽤 흉흉한 시선으로 이쪽을 살피는 두 마왕과 사천왕들을 보며,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특히 벨제붑과 그 사천왕들, 악마족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걸 보아하니 그들의 시체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에릭 가이오스.”

“예.”

날카롭게 한기가 서린 벨제붑의 목소리에 조용히 그를 바라본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에 식은땀을 주륵 흘렸다.

이거야 원 살기만 없다뿐이지, 아주 무서워 죽겠구만.

“어제 쟈칼과 싸웠던 인간 기사가, 북문에서 엘프 여왕을 데리고 탈출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왜 그랬지? 다른 누구도 아닌 엘프 여왕을 빼돌리다니. 그때 북문에 있던 병사들의 손에 공적이 넘어가는 꼴이 보기 싫었나?”

일단은 그쪽부터인가.

나는 악마왕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쓸모가 있어서 잠시 놈을 구했던 것뿐입니다. 정확히는 엘프 여왕이 아니라 그를 구했다는 상황 자체가 필요했으니까요. 그 증거로, 녀석은 이미 죽이고 왔습니다. 저 산맥에 수풀이 우거진 곳에 사체가 남아있을 테니, 확인해보셔도 좋습니다.”

“…녀석을 구한 상황 자체가 필요했다고?”

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리는 그를 보며,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당장은 납득하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그거야 나중에 설명을 덧붙이면 될 일이었다.

문제는 그쪽이 아닌 아이베른과 그 추적조들의 사망 건이겠지.

“됐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그 상황이 왜 필요했는지는 조금 있다 듣도록 하지.”

그 또한 테네스를 생포하지 못한 부분은 좀 아쉽긴 해도 결국 죽였다면 크게 문제될 건 없으니, 북문에서 있던 일은 잠시 묻어두려는 듯했다.

그 정도야 내가 이곳 알카에다를 함락시키는데 세운 공적을 생각하면, 충분히 넘어가줄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같은 마왕군, 그것도 나름 정예라 할 수 있는 아이베른 무리를 살해한 건 도저히 그냥 넘어가줄 수 없겠지.

“…왜 죽였나.”

“예?”

다짜고짜 왜 죽였냐니.

이건 뭐 취조도 없는 건가.

쾅-!

“네놈, 시치미를 뗄 셈이냐! 아무리 마룡왕께서 네 녀석을 좋게 봐주시고는 있다지만, 그렇다고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도 그냥 넘어가려고 하다니!”

“카마렌. 흥분하지 마라.”

“큿….”

나는 다짜고짜 책상을 치고 일어나 나를 쏘아붙이는 중년의 악마족을 보며,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카마렌 살레오스.

악마왕의 사천왕 중 한 명인가.

크로셀 후작과 꽤 절친한 사이였던가.

제 아끼는 친우의 자식이 죽어버렸으니, 그리 화가 날만도 하지.

“다시 한 번 묻겠다, 에릭 가이오스. 왜 죽였나.”

난 카마렌을 자리에 앉히고 재차 물어오는 마왕을 보고선,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능하면 적당히 시치미 좀 떼볼까 했는데,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아하니 무언가 확신이 들 만한 증거라도 찾은 모양이었다.

별 수 없나.

“사고였습니다.”

“…사고?”

“이, 이 빌어먹을 놈이 뚫린 입이라고….”

“카마렌!”

대체 무슨 증거를 찾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놈들과 싸우는 모습을 본 목격자가 없는 것은 확실했다.

그때 녀석들과 붙는 도중에서 중간 중간 주변을 확인하는 걸 잊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당시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선, 아무리 이들이라도 알아볼 바가 없다는 얘기였다.

“처음엔 저도 그들을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북문에서 엘프 여왕을 데리고 빠져나간 이유. 제가 이번에 알카에다에 무사히 잠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뭡니까? 검귀, 그 무지막지한 영감의 제자인 척 잘 속였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렇게 좋은 패를 이번에만 써먹고 버리긴 아까워서, 다음에도 검귀의 제자로 나설 수 있도록 소문을 좀 만들어보려고 했을 뿐입니다.”

“…소문?”

“예. 검귀의 제자가 알카에다에서 엘프 여왕을 구하고 도망쳤다. 하지만 머지않은 곳에서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있었고, 엘프 여왕은 결국 실종되고 말았다. 그렇게만 소문이 퍼진다면, 나중에 다시 검귀의 제자 노릇을 하더라도 의심받을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격렬히 항변을 이어나가며 주변을 슥 훑었다.

분위기가 썩 좋진 않았지만, 적어도 방금 내 얘기에 대해선 딱히 부정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그 정도면 다시 그 좋은 패를 써먹을 수 있으리라 납득한 거겠지.

“그래서 적당히 흔적을 만들고 여왕을 죽이려던 중에, 그들이 나타난 겁니다. 당연히 저는 몰래 설득해서 보내려고 했지만, 다짜고짜 죽일 듯이 달려들지 뭡니까. 사고였습니다. 그들의 실력이 무척 뛰어난 바람에, 힘 조절이 불가능했거든요.”

“…그럼 어째서 그들을 다 죽인거지? 네 말대로 사고였다면 도망치는 이들까지 쫓을 필요는 없지 않았나.”

“도망이라뇨?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도망쳤지요. 끝까지 절 쫓아온 아이베른에게 투구를 벗어 저임을 증명하려고 했지만….”

난 이후 말없이 얼굴의 흉터와 갈린 송곳니를 가리켰다.

그가 믿어주지 않고 계속 공격해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죽일 수밖에 없었다.

“으음….”

다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반박할 수 있는 증거도 딱히 없었다.

“물론 그들을 죽인 건 제 실책이 맞습니다. 그에 대해선 달게 벌을 받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단번에 오묘해진 분위기를 보며, 속으로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자, 이렇게까지 나왔는데 엄벌을 내릴 순 없겠지.

끽해야 보여주기식 징계 정도가 전부일 터였다.

그 검귀의 제자라는 좋은 패를 다시 써먹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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