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네, 네놈… 대체 뭐냐! 대체….”
“누구긴 누구야, 가젤이지. 검귀, 마흐제브의 제자.”
테네스는 이상하리만치 겁먹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내가 혈마법을 쓰는 걸 보고 뱀파이어일 거란 사실은 진즉에 눈치 챘겠지만, 그렇다고 몰래 도망칠 필요까지 있나.
적어도 그녀 앞에선 도와준 기억밖에 없는데.
정체를 속인 것 때문에 의심을 좀 할 수는 있어도, 이렇게 겁을 집어먹는 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테네스에게서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있는 경우는 단 하나.
아무래도 아까 아이베른을 쫓았을 적에, 몰래 따라와서 얘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거, 거짓말! 네놈, 진짜 정체가 뭐냐.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마흐제브의 제자를 사칭해 나를 속인 거냐. 그것도 같은 마족들까지 죽이면서….”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으며, 조심스레 화살통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나 참, 어째 엘프라는 족속들은 하나같이 이리 똑같은지.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내 주의를 분산시키고 허점을 노리려드는 것이, 아주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거 섭하군. 난 딱히 거짓말한 적 없다. 정말로 마흐제브, 그 노인네의 제자였으니까. 물론 며칠 안 돼서 그만뒀지만 말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정식은 아니고 검술만 조금 배운 입장이었지만, 그쪽에서 제자 한 번 해볼 생각 없냐고 부탁해왔으니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네놈, 궤변을… 윽!”
꾸욱-
나는 뒤로 뺀 손에 화살을 쥐고 슬그머니 활대를 잡는 그녀를 보고선, 조용히 발을 뻗어 손등을 밟았다.
“안타깝게 됐네. 너희 엘프들이 하는 약아빠진 짓거리들을 너무 많이 봤거든. 적어도 내 앞에선 이렇게 뒤에서 몰래 뒤통수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괜히 더 아파질 테니까.”
“크읏….”
난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무는 테네스를 보고선, 조용히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이러면 다신 활은 못쓰겠지.”
으드득-
“아, 아아아악!”
그녀의 손을 완전히 뭉개버린 나는, 귀를 후벼 파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놈의 머리채를 잡았다.
“아쉬워. 참 아쉬워. 이대로 네 목이 쉬어버릴 때까지 놀아주고 싶은데 말이야. 아까 죽은 그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모습, 남한테 들키면 안 되거든.”
“아윽, 흐으윽….”
나는 그대로 테네스를 질질 끌며, 아까 그녀를 데리고 산맥을 오르던 중에 봐놓았던 동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괜히 그 자리에 계속 있다가, 아이베른과 추적조들이 놓친 놈들이나 혹여 서문으로 빠져나왔을 놈들이 이 모습을 보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으니까.
“으흑… 사, 살려… 제발 살려… 흡, 으읍!”
“쉿. 말했잖아, 남한테 들키면 안 된다고.”
중간에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지르려는 녀석의 입을 틀어막고서 동굴 안으로 들어선 나는, 곧바로 구석에 그녀를 몰아넣고 단검을 빼들었다.
“자, 어디서부터 하면 좋을까.”
“흐읍, 으….”
난 구석에 웅크려 벌벌 떠는 테네스를 내려다보며, 그녀의 말 한마디에 쓰러져나간 동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하찮은 종족 주제에 그 더러운 눈길로 나를 훑다니.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저 탁한 눈알을 뽑아버려라. 였던가?”
“으, 으읍? 흐으으읍!”
녀석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저를 향해 다가오는 나를 보고선, 꽉 막힌 비명을 지르며 그 얇은 팔을 휘둘렀다.
텁-
“가만히 있어. 계속 움직이면 네 눈알이 탁한지 아닌지, 확인할 수가 없잖아.”
“흐, 흐으으….”
쪼르르-
나는 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축축하게 젖어가는 그녀의 바지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흐흐. 뭐냐, 벌써 지려버린 거냐?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말이야. 그 고고하신 여왕 나리께서, 수백 살이나 처먹고 남 앞에서 이런 추태를 부려서야 쓰나.”
난 이윽고 공포심에 새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뜨는 것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로 녀석을 훑었다.
반응이 좋군.
이거 복수하는 맛이 있겠어.
“흐으읍… 으, 프하! 하악, 흐윽….”
“미리 경고해두겠지만, 소리 지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랬다간 가장 먼저 성대를 잘라버릴 테니까.”
“왜, 왜…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왜….”
그녀는 입에 물린 천 조각을 빼주자마자 떨리는 목소리로 이유를 물었다.
그러게 대체 왜 그랬을까.
네놈들은. 우리에게.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히, 히이익! 제, 제발 이러지… 쿠흑!”
뻐억-
“내가 방금, 소리 지르지 말라고 안했던가? 마지막 경고야. 입 꾹 다물고 있으라고.”
나는 제 눈을 향해 들이민 단검을 보며 새된 비명을 지르는 테네스를 보고선, 있는 힘껏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
“커흐… 허윽….”
이제 좀 조용해졌군.
“너무 억울해하지 마. 그리고 이유를 찾으려고 들지도 마. 다 네가 저지른 일이고, 저지르게 될 일이었으니까.”
난 그저 자신을 몇 초 이상 쳐다봤다는 이유만으로 수호자들에 잡혀 그녀의 막사로 끌려간 동료들의 최후를 떠올렸다.
두 눈이 뽑히고, 두 귀가 뜯어지고, 길게 빼놓은 혀가 잘리고.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대놓고 전장 한복판에서 일을 벌이진 못했지만,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걸 보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어. 용사 대접도 못 받고 최전방에 나가 구르던 일개 이방인 시절에, 어떤 놈이 전날 보급으로 나온 내 술을 몰래 털었단 말이야. 그런데 그 빌어먹을 녀석이 제 몫만으로는 도저히 취할 수가 없었다고, 다음날에 갚겠다더니. 막사에도 돌아오질 않았단 말이지.”
그렇게 내 몫을 돌려받으러 놈을 찾던 중에 듣게 된 것이었다.
우리 이방인들의 막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
주변에 경계를 서는 수호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여왕의 막사 안쪽에서 그의 흘러나오는 비명 소리를.
그리고 당연하게도, 다음날 남자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이후로도 몇 번씩.
그녀가 있는 전장에선 하나둘씩 이방인들이 사라져갔다.
그 넓은 막사 안에서 무슨 빌어먹을 짓거리를 벌이고 있는지 그 진상을 캐게 된 것은, 내가 용사로서 인정받고 활약하기 시작한 후로도 몇 년이 지나고서였다.
“아, 아아…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용사? 이방인? 몰라, 모른다고! 가, 가젤. 당신 지금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아니에요! 저, 저는… 우웁! 흐으으읍!”
“아니, 너야. 확실해.”
나는 억울한 목소리로 항변하는 테네스의 입을 틀어막으며, 단검의 날을 세웠다.
물론 아직은 아니겠지.
하지만 곧 저지를 일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내게 있어선, 이미 일어났던 일이었다.
“전부 네년이 우리 이방인들에게 벌인 짓이야. 테네스 엘븐하임.”
푹-
“으, 으으으으읍!”
시퍼런 날이 젤리 같은 무언가를 파고 들어가는 촉감이 손끝에 전해져왔다.
그대로 손잡이를 슬쩍 비틀어 단검을 빼낸 나는, 바깥으로 딸려 나온 얇은 시신경 뭉치와 이어진 눈알을 살폈다.
“탁해.”
나는 벌어진 틈새로 찐득하고 허연 액체를 줄줄 흘리고 있는 하늘색 눈동자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에리스, 그 망할 년의 동생은 좀 더 맑았는데 말이야.”
“흐으… 내, 내 눈… 내 눈이….”
눈 한쪽이 밖으로 튀어나온 채 보는 풍경은 어떤 느낌일까.
아무리 신경이 그대로 이어져있더라도 동공이 찢어졌으니 그냥 뿌옇게만 보일까?
뭐, 어찌됐든 멀쩡히 남은 한쪽 눈에는 제 탁한 눈동자가 그대로 비치고 있을 거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아, 아아… 싫어! 오지 마! 괴, 괴물자식… 멈춰! 멈추라고! 아, 아아아악!”
푸우욱-
나는 하나 남은 눈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날을 보며 난동을 피우는 테네스의 팔을 붙잡고, 천천히 단검을 밀어 넣었다.
이번엔 그녀가 보다 잘 느낄 수 있도록, 조금씩. 조금씩.
“으, 아….”
난 결국 버티지 못하고 기절했는지 고개를 툭 떨군 녀석을 보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귀도 혀도 남았는데 벌써부터 이러다니.
갈 길이 멀겠군.
스륵-
품에서 밧줄을 꺼내든 나는, 방금처럼 귀찮게 허우적거리지 못하도록 그녀의 팔다리를 모두 묶었다.
사악-
그리고 시신경과 이어져 밖으로 튀어나온 눈알을 잘 챙긴 뒤, 조용히 손을 들어올렸다.
이건 나중에 에리스한테 선물로 주면 되겠군.
가능하면 전처럼 머리를 잘 포장해서 보내는 게 제일 좋겠지만, 아무래도 여기서 엘븐하임까진 거리가 꽤 있으니 힘들겠지.
그때 가면 다 썩어서 알아보는 것도 힘들 테니 말이다.
짜악-!
“허윽!”
좋아, 일어났나.
“…아? 안 돼, 안 돼 안돼안돼!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그럴 리 없어. 하, 하하하하하! 꿈이야, 이건 꿈이라고!”
미친년.
완전히 정신이 나갔군.
나는 생각보다 너무 빨리 망가져버린 테네스의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테….”
“히, 히이익! 사, 살려…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부디, 부디 살려….”
두 눈을 잃은 탓일까.
난 작은 목소리에도 기겁하며 몸을 떠는 그녀를 보며,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이래서야 더해도 의미가 없겠어.
“테네스.”
하지만 그렇다고 도중에 멈출 생각은 없었다,
이 망할 년도 그러지 않았으니까.
“조금 있다 물어볼 게 있으니, 혀는 남겨주마.”
“아….”
스륵-
나는 절망적인 상황에 고개를 툭 떨군 녀석을 보며, 조용히 단검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