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파이어 볼.”
화륵-
나는 가장 먼저 뒤쪽에서 날아드는 불덩이를 보고선, 다급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의외로군.
가뜩이나 불이 붙기 쉬운 지형에서, 자칫하면 제 일행들도 휘말릴 수 있는 마법을 망설임 없이 택하다니.
그만큼 같이 움직이는 제 동료들을 믿는다는 거겠지.
다른 녀석들도 별 말 없이 제 공격을 준비하는 걸 보아하니, 한두 번 합을 맞춰본 솜씨가 아닌 듯했다.
콰아앙-!
“테네스 님, 왼쪽입니다.”
“그 정도는 저도… 읏!”
후욱-
폭발로 인해 솟아오른 매캐한 먼지구름을 뚫고, 시퍼런 검기가 테네스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생포하라는 아이베른의 명 때문인지 깊숙이 들어오진 않았지만, 뿌연 시야에도 정확히 손목의 힘줄을 노리고 있었다.
가까스로 몸을 빼낸 테네스는 화살을 메기고 주변을 슥 훑었다.
아직 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진 않았지만, 하이엘프의 눈을 가릴 순 없었다.
그녀는 곧장 어느 한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재빠르게 시위를 당겼다.
파앙-!
시위를 떠난 화살은, 이쪽으로 달려들고 있던 녀석의 미간을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콰악-
“어, 어떻게….”
하지만 화살이 놈에게 닿기 직전, 바닥이 불쑥 솟아올라 녀석의 앞을 가로막았다.
덕분에 애꿎은 토벽을 때린 화살은, 이내 원래대로 푹 꺼진 바닥을 따라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흐흐, 잡았다.”
“어, 어느 틈에… 꺄악!”
나는 그 잠깐 토벽이 세워진 사이, 옆으로 돌아 테네스의 발목을 잡아챈 악마족을 보며 나지막이 감탄을 흘렸다.
훌륭하군.
과연 아이베른 녀석이 자신있어 할 만했다.
보통은 쟈칼을 상대로 시간을 끌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를 앞에 두고서 맞설 생각을 하진 않을 텐데.
확실히 이만하면 이렇게 여덟이서 사천왕 하나쯤은 한 번 상대해볼 수도 있을 거 같았다.
푹-
“아, 아아아악!”
하지만 어디 쟈칼이 그냥 사천왕이던가.
그에 비하면 이놈들의 수준은 아직 턱없이 모자랐다.
사실 다른 사천왕들도 애 좀 먹겠다 싶을 뿐이지, 딱히 못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나 또한 아직 사천왕들을 상대로 정면에서 승부를 볼만큼 강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적의 눈을 가리고 수를 쓰는 형식의 싸움이라면 도리어 내가 그들보다 몇 수는 위였다.
정정당당하게 맞붙는 싸움보단, 오히려 이쪽이 내 주 무대였으니까.
“무, 무슨… 네놈, 설마….”
스억-
난 제 손목을 꿰뚫고 나온 시뻘건 창날을 보고선 당황한 눈빛으로 이쪽을 훑는 녀석을 보며, 무어라 더 말을 내뱉기 전에 재빨리 놈의 목을 베었다.
이대로 테네스가 끌려가면 일이 복잡해질까 하는 수 없이 혈마법 쓰긴 했지만, 이는 아직 놈들에게 들켜서는 안 될 일이었다.
“가, 가젤 경. 방금 그건 설마 뱀….”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선 이놈들부터 처리하지요.”
테네스는 방금 제 발목을 잡아챈 악마족의 손목을 꿰뚫은 혈마법을 보고선, 놀란 눈으로 이쪽을 훑었다.
이내 그 한구석에 의심의 빛이 서렸지만, 그녀에겐 당장 사방에서 날아드는 마법과 검기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페네리스! 젠장… 여왕도 그냥 죽여 버려!”
카앙-!
“읏….”
“테네스 님은 일단 피하는 데만 집중하십시오.”
제 동료의 죽음을 본 녀석들의 공격이 전보다 훨씬 거칠어졌다.
이대로 가다간 저들이 당할 수도 있으리란 생각에, 공적을 어느 정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더는 손속을 두지 않는 모양이었다.
촤악-
“아아악!”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명의 공백을 메울 수는 없는 법.
그것도 아까 절묘한 순간에 벽을 세워 화살을 막아주고, 마법이 풀리는 틈을 타 옆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처럼 서로 유기적인 연계가 가장 큰 장점이었던 녀석들이니만큼, 더더욱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스억-
“컥….”
툭-
이걸로 두 명째.
“아, 으….”
“괴, 괴물… 대체 어떻게 그 틈에서….”
놈들은 벌써 수십 번은 쏘아진 마법들 사이에서 모두 살아남은 걸로도 모자라 제 일행 둘을 베어 넘긴 나를 보며, 슬슬 겁을 먹었는지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거, 겁먹을 거 없다! 바닥을 봐라. 저 피, 녀석도 상태가 정상은 아닐 거다!”
나는 내가 서있는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를 가리키며 스태프를 들어 올리는 아이베른을 보고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확실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
실은 아까 혈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일부러 낸 상처에서 흐른 것들일 뿐인데 말이지.
“그, 그래. 아무리 쟈칼님을 상대로 버틴 녀석이라도, 거기서 무사히 빠져나왔을 리가 없지.”
“더 거세게 몰아붙여! 어차피 저 엘프도 한계인 거 같으니, 빠르게 둘을 죽이고 본대로 복귀한다!”
뭐 이렇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붙어준다면 나야 환영이었다.
괜히 남은 여섯이 뿔뿔이 찢어져서 도망치기 시작한다면, 그걸 다 따라가서 잡는 것도 고역일 테니까.
아니, 고역이 아니라 몇 명 정도는 놓아줘야 될 수도 있었다.
자칫 놈들을 쫓는데 정신이 팔렸다간, 테네스가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방금 그 혈마법으로 인해서 한 번 의심을 산 상황에서, 그런 위험부담을 질 수는 없었다.
“파이어… 컥!”
콰악-
“헬케인!”
나는 또 뒤편에 자리 잡고 불덩이를 날리려는 놈의 미간에 틀어박힌 화살을 보며, 슬쩍 테네스를 돌아봤다.
“하아, 하아… 미안해요. 그동안 도움이 못돼서.”
슬슬 여유가 생겼나 보군.
이 정도면 혼자 둬도 되겠어.
검을 든 녀석도 이젠 셋 중에 하나밖에 안 남았으니, 공격을 피하는 것뿐이라면야 문제없겠지.
난 숨을 고르며 곧장 다음 화살을 메기는 그녀를 보고선, 조용히 앞으로 쏘아져나갔다.
“스톤… 흐억!”
후웅-
“멍청하긴. 피할 거면 완전히 자리를 벗어났어야지.”
“뭣….”
푸욱-
나는 제 목을 노리고 들어온 단검을 제자리에서 허리를 숙여 피한 놈의 척수에 날을 박아 넣고선, 곧바로 옆에 있는 놈을 향해 뛰었다.
“으, 으아아악! 오, 오지….”
스억-
이걸로 넷. 아니, 테네스가 잡은 놈까지 하면 다섯인가.
난 정수리에서 피를 뿜으며 뒤로 고꾸라진 시체를 옆으로 치우며, 슬그머니 주변을 훑었다.
“비, 빌어먹을… 완전 쌩쌩하잖아! 아이베른….”
퓻-
여섯.
나는 제 가슴을 꿰뚫고 뒤에 있던 나무에 박힌 화살을 돌아보며 픽 쓰러진 놈을 지나쳐, 망설임 없이 등을 돌린 두 놈을 향해 단검을 들어올렸다.
휘익- 쩌억!
“컥….”
허공에 원을 그리고 날아간 단검이 앞서 도망치던 녀석의 뒤통수에 틀어박혔다.
애초에 저들끼리 사천왕과 합을 나눌 수 있을 만큼의 실력자를 상대로 덤벼든 것부터가 문제였다.
자기들 딴에는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겠지. 아이시스랑 같은 세대인 녀석들이 평화로운 마계에서 사천왕들의 실력을 본다면 뭐 얼마나 봤겠는가.
그래도 다들 제 나이대에선 이렇다 할 적수가 없을 만큼 뛰어났던 건 사실이니, 여기저기서 많이들 인정받고 다녔을 터였다.
실제로 아이베른, 이 녀석은 벨제붑의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였으니까.
안타깝게도 그게 괜히 저들의 자신감만 하늘 높은 줄 모르게 계속 올려준 꼴이 됐겠지만 말이다.
“아이베른.”
“히, 히이익… 오, 오지 마! 이 괴물 자식!”
나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망치려는 녀석을 보며,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테네스는… 많이 지친 것 같으니,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푹-
“아, 아아아악!”
쿵-
“으으윽… 뭐, 뭐야. 대체….”
순간 날카로운 통증에 바닥을 구른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황급히 제 발목을 살폈다.
“이, 이건… 피?”
발목을 꿰뚫고 삐져나온 시뻘건 창날.
놈은 당황한 표정으로 잠시 그를 살피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선 창을 빼내기 위해 날을 집었다.
“끄으으으….”
촤악-!
금방 힘을 주어 창을 빼낸 녀석은, 바닥을 짚고 일어서 구멍 난 발목 때문에 다리를 절면서도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이만 포기하지 그러나.”
“흐, 흐어어억!”
여유롭게 놈을 지나쳐 나무 뒤에 숨어있다 모습을 드러내며 앞을 가로막은 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자빠지는 녀석을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네, 네놈… 뱀파이어, 뱀파이어가 왜….”
아이베른은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올려 나를 가리켰다.
저런, 많이 겁먹었나 보군.
“이, 이 빌어먹을 배신자 놈! 부끄럽지도 않나! 우리 마족을 배신하고, 저 엘프 놈의 아래에 붙다니!”
놈은 고함을 지르며 나를 나무랐다.
배신이라, 이거 섭섭하군.
내가 마왕군에서 쌓아올린 공적이 얼만데.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천천히 녀석의 앞에 쭈그려 앉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마족을 배신하지도, 저 엘프 여왕의 아래로 들어가지도 않았으니까.”
“그, 그럼 우린 왜….”
스윽-
난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마주한 아이베른을 향해, 슬며시 투구를 벗었다.
“너, 넌….”
아직 화상의 흉터가 진하게 남아있긴 하겠지만, 지금쯤이면 내 얼굴을 아는 사람들은 얼핏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재생이 되었을 터였다.
“곧 여왕도 네 곁으로 보내줄게. 그 정도면 배신하진 않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겠지?”
푸욱-
“그륵….”
툭-
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 그대로 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버린 시체를 뒤로하고, 다시 산맥을 올랐다.
마음 같아선 그 여덟 놈들 모두 확 흡혈해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공으로 덮고 자시고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게 되겠지.
“음?”
그렇게 금방 자리로 돌아온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저 멀리 사라진 테네스를 보며 나지막이 고개를 저었다.
참, 이래서 엘프들은 안 된다니까.
이렇게 생명의 은인조차 못 믿고 그새 도망을 쳐서야.
“하악, 훅….”
“테네스.”
“아… 꺄아아악!”
금세 테네스를 따라잡은 나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 그녀를 보고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섭섭하게 뭘 이런 걸 가지고 놀라고 그래. 마치 못 볼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앞으로 얼마나 더 놀라고 비명을 질러야 할 일들이 많은데, 벌써부터 이러면 쓰나.
나는 겁에 질린 사슴처럼 벌벌 떨고 있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