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사락-
늦은 밤.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킨 나는, 조심스레 덮어놨던 바닥을 들추고 지하로 내려갔다.
화악-
방에서 가지고 내려온 초를 켜 주변을 밝혔다. 저번에 단검으로 빗금을 쳐놓은 쇠창살을 찾아 걸음을 옮긴 나는,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박쥐로 몸을 흩트려 천장 너머로 귀를 기울이자,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드워프들의 마차를 빼앗겼다는 소식에 급히 열린 회의를 다녀오고선 한참 난리를 치더니, 결국 지쳐 잠든 모양이었다.
스릉-
조심스레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든 나는, 곧바로 틈새를 비집어 천장을 뜯어냈다.
일을 무사히 마치더라도 내가 이 지하 감옥을 통해 움직였다는 사실이 너무 빨리 들통나면 안 됐기에, 혹시나 떨어트려 부서지지 않도록 천천히 들어 올려 옆에다 살포시 내려놓았다.
“으음….”
방으로 올라가자 눈살을 찌푸리며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는 교황의 모습이 보였다.
악몽이라도 꾸나 보군.
차라리 악몽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젠 그보다 더 끔찍한 현실을 마주할 때였다.
후웅-
천천히 침대 앞으로 다가가 이불을 훅 벗겨낸 나는, 드러난 녀석의 목을 향해 곧장 단검을 휘둘렀다.
촤악-
살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후두둑 튀었다.
나는 혹여나 묻지 않도록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다시 날을 치켜들었다.
사악- 삭-
양 손목과 발목.
네 개의 힘줄을 정확히 끊었다.
처음 성대를 잘라냈을 적부터 슬금슬금 깨어난 교황은, 어느덧 두 눈을 부릅뜬 채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놀랐어?”
휘익- 휙-
울컥울컥 피를 뱉어내던 성대에 거품이 일며,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시작해 점차 일그러진 녀석의 얼굴은, 금세 악귀라 부를 수 있을 만큼 험악해져 있었다.
“너무 그렇게 무섭게 바라보지 마. 불쌍하니까. 손 하나 까딱할 수도, 살려달라고 빌 수도 없는 주제에.”
놈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을 내뱉으며, 보란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폰스.”
아직 쟈칼에게 부탁한 대로 마왕군이 공격을 시작할 때까진 꽤 시간이 남아있었다.
제 이름을 부르고선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내 모습에 갈수록 표정이 어두워지던 교황은, 이내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빌어먹을 놈, 어디서 멋대로 포기하려고.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희망을 놓으면 안 되지.
그는 내 복수를 위해서라도 끝까지 살고 싶어 하는 채로 죽어줘야 했다.
그래야 더 고통스러울 테니까.
푹-
옆구리에 단검을 쑤셔 넣고 천천히 돌리자, 꾹 감았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쌕쌕거리는 소리가 확연히 커진 걸 보아하니, 꽤나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하긴 매번 뒤편에서 편히 신성력만 들이부었을 놈이, 칼침을 맞아봐야 뭐 얼마나 맞아봤겠는가.
그륵-
그대로 살살 단검을 밀어주자, 피거품이 목구멍을 틀어막아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런, 조용히 해야지.”
남은 손으로 녀석의 입을 틀어막은 나는, 어느새 눈이 뒤집어진 그를 보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누구 마음대로 편하게 기절하려고하는 건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숨통을 끊어버릴 수 있음에도, 굳이 내가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이유가 뭐겠는가.
전부 알폰스, 이 빌어먹을 놈에게 가능한 고통을 심어주기 위해서 아니었던가.
뻐억-
시이익-!
상처 너머로 주먹을 내리찍자, 뒤집힌 눈이 다시 돌아왔다.
본래대로라면 이렇게 험하게 다뤘다간 금방 망가질 수 있었기에 상처를 비집고 살살 어루만져주는 편이 좋았지만, 지금 그랬다간 손에 묻은 피를 지울 방법이 없었다.
조금 빨리 맛이 가버리더라도, 일단은 들키지 않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마음 같아선 느긋하게 즐기고 싶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그리 많지 않군.”
만일 여기가 적진이 아니었더라면 며칠 정도는 진득하게 놀아줬을 텐데.
앞으로 길어야 서너 시간 정도인가.
“그래도 걱정하지 마. 지금 네가 생각하고 있는 최악, 그보다는 더 바닥을 맛보게 될 테니까. 실망할 일은 없을 거야.”
나는 입가를 이죽이며 다시금 단검의 날을 세웠다. 괜히 피가 튀면 곤란하니, 일단은 살을 저미는 것부터 시작해볼까.
워낙 신성력이 넘치는 인간이라 쉽사리 죽진 않을 테니, 너무 세심하게 봐줄 필요는 없겠지.
“이렇게까지 고문하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서 말이야. 잘못해서 조금 깊게 들어가더라도 이해해줬으면 좋겠군.”
난 노인네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로 작업을 시작했다.
제멋대로 우리를 소환하고, 이용해 먹고, 버리고, 비웃은 이 빌어먹을 놈에게 그동안 쌓인 분노를 풀어낼 때였다.
“아. 전에 성녀를 끌어내리자고 건넨 그 제안 말이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부르르-
한창 거죽을 벗기던 나는, 손끝부터 팔꿈치까지 포가 떠진 채 마음대로 기절하지도 못하고 간헐적으로 펄떡이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메리엘, 그년도 곧 네 곁으로 보내줄 테니까.”
물론 지금은 아니었다.
기껏 교단을 반으로 갈라놨는데, 교황과 성녀를 모두 죽일 수는 없었으니까.
그랬다간 남은 녀석들끼리 절로 뭉치려 들겠지.
기본적으로 알폰스 녀석이 성녀 후보생을 데려다 메리엘을 갈아치우려고 했을 만큼 교황파의 세력이 압도적이었으니, 반대쪽은 우두머리를 살려놓는 편이 균형이 맞을 터였다.
어느 한쪽으로 저울이 기울어 있으면 재미 볼 것도 없이 그대로 먹히고 말 테니까.
“넌 먼저 가서 마흐제브랑 못다 한 얘기라도 나누고 있도록.”
* * *
콰앙-!
움직였나 보군.
알폰스를 한참 가지고 놀던 나는, 밖에서 터진 폭음에 이만 몸을 일으켰다.
“아쉽게도 여기까지인 거 같군.”
새하얀 침대는 저민 살점과 흘러나온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있었다.
씨익- 씩-
두 시간을 넘게 꿈틀거리며 고통에 몸부림치던 알폰스는 이제 몸을 떨 기력조차 없는지, 잘려 나간 성대로 바람이 빠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푹-
온몸의 살점을 저미고 한 바퀴 돌아 근육까지.
마치 인체모형처럼 절반은 뼈가 드러난 그의 가슴에 날을 깊숙이 찔러 넣은 나는, 이내 축 늘어진 녀석의 시체를 보며 단검에 묻은 피를 슥 닦았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쓰러트렸습니다.]
[마력이 ‘3’ 증가합니다.]
[레벨이 증가합니다.]
나는 이만 단검을 집어넣으며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를 훑었다.
솔직히 일대일이라면 몇 번을 부딪쳐도 질 수 없는 녀석이었지만, 무식하게 높은 신성력 덕분인지 꽤 짭짤한 보상을 타먹을 수 있었다.
콱-
이후 가능한 피가 묻지 않도록 조심스레 녀석의 어깨에 이를 박아 넣은 나는,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핏물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달달하니 맛이 썩 괜찮군.
“프흐….”
[교황, ‘알폰스’를 흡혈했습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마력이 ‘4’ 증가합니다.]
난 이내 말라비틀어진 시체에서 입을 떼고선 곧바로 자리를 벗어났다.
시체의 상태가 영 수상하긴 했지만, 살을 완전히 저며 놓은 데에다가 상황도 급박하니 딱히 마족의 소행이라 바로 눈치채진 못할 터였다.
달칵-
아까 드러낸 천장을 통해 지하 감옥으로 돌아온 나는, 옆에 놔두었던 목판으로 다시 구멍을 가리고선 재빨리 방으로 돌아갔다.
“저, 적습! 적습이다!”
그렇게 혹여나 흔적이 남은 부분은 없나 잘 살펴본 나는, 밖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갑옷을 챙겨 입고선 밖으로 나왔다.
“적습이라니, 이 시간에 말인가?”
“예, 예! 현재 동문과 남문, 양쪽으로 마왕군이….”
“음, 알겠다. 바로 합류하지.”
자연스럽게 병사를 지나쳐 밖으로 나온 나는, 급하게 성문으로 향하지 않고 슬그머니 뒤를 살폈다.
“교, 교황니이이임!”
이제야 발견했나.
나는 저택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멈췄던 걸음을 떼었다.
교황이 살해당했다.
제국군은 물론 연합 전체가 발칵 뒤집힐만한 대사건이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마왕군이 새벽에 기습을 강행한 순간이었다.
제아무리 교황이 죽었다 한들, 이 급박한 때에 당장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후처리를 하더라도 일단 마왕군을 무사히 막아낸 뒤에야 고민해볼 일이었다.
“크흐흐….”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알카에다는 오늘 마족들의 손에 떨어질 테니까.
혼잡한 와중에도 교황이 죽었다는 소식은 금세 퍼지겠지만, 누가 범인인지는 알 수 없을 터였다.
그 말은 즉, 내가 마왕군을 막아서다 점차 밀려나 저들 옆에 서게 되더라도 누구 하나 의심할 사람이 없다는 얘기였다.
피잉-
급하게 동문에 도착한 나는, 이미 성벽 위에 올라 시위를 당기고 있는 테네스를 올려다봤다.
메리엘은 일단 교단 본청으로 무사히 돌아가 줘야 할 이유가 있으니, 남은 건 저 가식적인 엘프 여왕뿐이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테네스.
네년도 금방 알폰스의 곁으로 보내줄 테니.
“상황은 어떻지?”
“아! 가, 가젤 님! 그게… 영 좋지 않습니다. 마족 놈들이 가로챈 장비들의 성능이 워낙 좋아서, 화살이 대부분이 튕겨 나오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녀석들이 성벽에 달라붙는 것도 시간문제….”
“젠장, 투석기다! 드워프 놈들의 투석기야!”
성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로부터 보고를 받던 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엘프의 말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있었나 보군.
수성에 쓰라고 보내온 병기들이.
그것도 본래는 공성으로 더욱 자주 쓰이던 투석기를 보냈다니.
호재도 이런 호재가 없었다.
아무래도 제국이 공성탑을 많이 짓다 보니, 그걸 깨부수기 위해 수성용으로 잔뜩 달아뒀던 투석기가 좀 남은 모양이었다.
“빠, 빨리 성문을 열어라! 놈들이 성벽을 깨부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투석기를 부숴야….”
콰아아앙-!
투두둑-
“히, 히이익!”
성능 쓸 만하군.
나는 허겁지겁 성문을 열어젖히기 무섭게 성벽을 때려 조금 무너트린 쇳덩이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금방 뚫리겠군.
이제 남은 건 자연스럽게 밀리는 연기를 부리며 테네스와 함께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여기서 바로 처리해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래서야 재미없지.
검귀의 제자, 가젤은 아직 제국의 영웅으로 남을 필요가 있었다.
알카에다가 무너지고 적당히 마왕군으로부터 도망치다 흩어져버렸다는 핑계를 댄다면, 한 번쯤은 더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