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콰앙-!
“크윽… 제법이군. 과연, 자신 있게 홀로 내 앞을 막아설 정도는 되는구나.”
“…쟈칼 님, 이 정도면 된 거 같습니다.”
“크흠. 그런가?”
격렬한 부딪힘 끝에 자연스레 전장에서 멀어진 나는, 알카에다에서 꽤 떨어진 숲에 자리를 잡고 이만 연기를 멈췄다.
“그래서, 용건이 뭐냐. 이렇게 날 전장에서 데리고 나왔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얘기가 있다는 거겠지.”
마찬가지로 쟈칼 또한 공격을 멈추고 인간형으로 돌아왔다.
난 가만히 있으면 혹여나 들킬까 중간중간 마법을 던지며 폭음을 일으키는 그를 보고선,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드워프들이 연합에 합류한 모양입니다.”
“…드워프?”
쟈칼은 내 입에서 나온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드워프라면 그 짜리몽땅하게 생긴 녀석들 말인가? 종족 전체가 장인이라고 들었는데.”
“예. 아직은 직접적으로 전장에 나설 생각은 없고 장비만 지원해줄 생각인 듯합니다만, 사실상 그게 그들의 전력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물론 그렇다고 싸울 줄 아는 드워프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봐야 개중에 유별나게 강한 그랜드 마스터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다른 종족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제국과 엘프들을 상대로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 강력한 장비들 덕분이었다.
특히 수성에 특화된 병기들 말이다.
““으음….”
물론 쟈칼이 그것까지 알고 있지는 않겠지만, 뭐가됐든 적들의 전력이 늘어난다는 건 별로 달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그는 나지막이 침음을 흘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조금 무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빨리 성벽을 무너트릴 필요가 있겠군.”
“아뇨. 너무 급하게 나갔다간 성녀가 성역을 꺼내들지도 모릅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러면 이대로 놈들의 전력이 불어나는 꼴을 지켜만 보자는 건가?”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쪽을 훑는 쟈칼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설마 정말로 그런 뜻이겠는가.
“그러지 말고, 놈들이 눈치조차 채지 못할 정도로 단박에 목줄을 확 잡아채자는 얘기지요. 쉽게 말해 성녀가 성역을 준비할 시간조차 없을 만큼, 빠르게 성벽을 무너트리자는 겁니다.”
“그게 말처럼 간단한 거였다면 진즉에 성벽을 넘었겠지. 헌데 그렇게 자신 있어 하는 걸 보아하니, 네게 무언가 방법이 있는 모양이군.”
방법이야 당연히 있었다.
애초에 그걸 알리기 위해서 그를 데리고 전장을 벗어난 거였다.
난 조용히 귀를 기울여오는 쟈칼을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방금 드워프들이 연합에 장비를 보내올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랬지.”
“가로채시지요. 아마 오늘 밤이나 내일 새벽쯤, 저 산맥을 타고 들어올 겁니다.”
나는 알카에다의 서쪽을 지나는 산맥을 가리키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들여오는 장비들 중에는 아마 수성병기도 있을 겁니다. 수성용이니만큼 저희가 쓰기에는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성문 하나 정도는 가볍게 날려버릴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아무리 드워프들의 손재주가 좋다고는 한들, 그들이 만든 병기의 화력이 벨제붑과 카르카쉬의 마법을 상회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조차 쉽사리 부수지 못하는 성문을, 드워프들의 병기는 어렵지 않게 무너트릴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력으로 이루어져 성문은 물론 성벽 전체를 감싸고 있는 사제들의 결계에 상성이 안 좋은 마법과는 달리, 드워프들의 병기는 딱히 특별할 것 없는 공학의 결정체였으니까.
“만일 개중에 병기가 없더라도 괜찮습니다. 장비를 노획 당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도시 안쪽은 난리가 날 테니까요. 그럼 제가 그 틈새를 어떻게든 비집어놓겠습니다.”
사실 그럴 필요까지도 없었다.
그 노획한 장비만 하더라도 이 알카에다의 성문을 무너트리는데는 충분했으니까.
이제 막 연합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드워프들이 보내는 장비라면, 분명 지금껏 그들의 창고에 처박혀있던 물건들일 확률이 높았다.
그 말은 즉, 활의 귀재들인 엘프와 신성력과 마법을 사용하는 인간들과의 싸움에 아주 유용한 장비들이 마차에 한가득 실려 있다는 얘기였다.
신성력에 한없이 취약한 마족들의 손에 그런 장비들이 들어간다는 건, 저들의 발목을 붙잡던 족쇄 하나를 벗어던지게 해주는 꼴이었다.
당장 눈앞의 쟈칼이 신성력에 내성이 있는 장비를 껴입고 성문을 두드리기만 해도, 당황한 놈들은 곧바로 수를 쓰지 못하고 성문을 내어주게 될 터였다.
“…정보는 확실한 건가?”
“예. 놈들의 회의에서 직접 들은 내용입니다.”
“음, 알았다. 훌륭하군. 고생했다.”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듣던 쟈칼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주억였다.
성문을 무너트릴 수만 있다면 도시를 함락시키는 것쯤이야 금방이었다.
길어야 하루.
드워프들의 장비를 빼앗기는 순간, 알카에다의 운명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럼 이만 돌아가지.”
“아, 마지막으로 하나. 부탁 좀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부탁?”
나는 다시금 용으로 모습을 변화시키며 날아오르려는 쟈칼을 붙잡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일. 가능한 새벽 일찍 공성을 시작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새벽 일찍? 오늘보다 더 말이냐?”
“예. 가능한 두어 시간쯤 빨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내 요구에 갸웃해하면서도, 이내 별 불만 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알겠다. 마왕님들께 그리 건의 드리도록 하겠다. 어차피 놈들이 피곤할 시간에 공격해서 손해 볼 건 없으니. 다만 그러려면 오늘은 조금 일찍 정비할 필요가 있겠군.”
펄럭-
“크으, 제법이구나. 인간, 아쉽지만 승부는 다음에 내도록 하지.”
“네놈, 도망치는 거냐!”
난 하늘로 날아오르며 전장으로 복귀하는 그를 쫓으며, 다시금 연기에 돌입했다.
아, 물론 서로 몸 여기저기 상처를 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쟈칼이 돌아간 후.
머잖아 마왕군 전체가 물러섰다.
그렇게 상황이 모두 정리된 뒤 전장으로 복귀한 나는, 연합군의 환호를 받으며 도시 안으로 복귀했다.
“피해 상황은 어떻지?”
“전날보단 확실히 줄었습니다. 오늘 놈들이 좀 더 빨리 물러난 덕도 있겠지만, 역시 가젤 공께서 그 검은 용의 발을 묶어주신 공적이 가장 큰 것 같습니다.”
“허허, 훌륭하구먼. 역시 검귀님의 제자답구려.”
예상대로 홀로 쟈칼을 상대해준 것이 잘 먹혀들었는지, 어제까지만 해도 나를 바라보며 조금 긴가민가하던 눈빛들이 이제는 전부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드워프들의 장비만 도착한다면 녀석들을 밀어낼 수 있겠군요.”
“밀어내기만 해서 되겠습니까? 아주 박살을 내버려야지요.”
테네스의 말에 모두들 곧 품에 안길 승리를 상상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놈들.
그 장비가 전부 마왕군의 손에 들어가게 될 줄도 모르고 마냥 좋아하는 꼴이라니.
나는 그 바보 같은 모습들을 보며 웃음을 참느라, 회의 내내 고역을 치러야만했다.
“그래서 그 장비들은 언제쯤 도착한답니까?”
“아마 지금쯤이면 산맥을 내려오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 어쨌든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지요. 다들 쉴 수 있을 때 쉬셔야지 않겠습니까. 장비가 도착하면 사람을 보내 이르도록 하겠습니다.”
끼익-
밤늦게까지 이어졌던 어제와 달리, 오늘의 회의는 금세 끝이 났다.
마왕군이 빨리 물러나고 그만큼 피해가 적었으니만큼, 그를 종합하여 보고를 올리는 시간도 짧아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한참 대책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아주 훌륭했네. 과연 마흐제브 님의 제자답구먼. 가젤 공, 오늘도 차 한 잔 어떤가.”
“예, 그럼 오늘도 실례하겠습니다.”
“허허, 실례는 무슨. 뭐든 내키는 게 있으면 말만 하게나. 자네와 이 늙은이 사이에 못해줄 게 뭐가 있겠나.”
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교황의 방에 들어가 적당히 담소를 나누었다.
비밀스러운 제안을 건네던 전날과는 달리 그다지 영양가 없는 얘기들뿐이었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그저 빨리 시간이 흘러 밤이 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어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먼. 미안하네. 자네도 푹 쉬어야할 텐데 괜히 오래 붙잡아뒀구먼.”
“아닙니다. 저도 교황님과 담소를 나눌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허허, 이 친구. 하루 사이에 참 능글맞아졌구먼. 고생했네. 그럼 이만 들어가서….”
콰앙-!
“교, 교황님! 큰일, 큰일 났습니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방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나는 노크도 없이 다급히 문을 열어젖히며 교황을 찾는 병사를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올 게 왔나 보군.
“큰일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리 노크도 없이….”
“마, 마차가… 드워프들의 장비를 실고 오던 마차가….”
“마차?”
병사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알폰스의 표정이 급격히 썩어 들어갔다.
“마차가, 드워프들에게서 지원받은 장비가… 전부 마왕군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뭐야? 그게 대체 무슨 소리더냐!”
성공했군.
난 아군의 비보에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슬그머니 교황의 얼굴을 살폈다.
“이런 빌어먹을! 그럼 이제 어떻게….”
나는 점차 파랗게 질려가는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는 그를 보며,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꾹꾹 참았다.
알카에다도 이제 끝이군.
“…가젤 공.”
“예, 교황님.”
“미안하지만 잠시 자리 좀 비워주시구려.”
“알겠습니다.”
끼익-
-으아아아악! 망할, 망할!
이내 알폰스의 부탁에 문을 닫고 나온 나는, 내 방까지 울려 퍼지는 그의 괴성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빼앗긴 장비보단 자기 걱정을 하는 게 더 좋을 텐데.
나는 슬그머니 어제 들췄다 다시 가려놓은 바닥을 살피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