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끼익-
방 안을 유심히 살피던 나는, 바닥 아래 빈 곳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 조용히 단검을 뽑아들었다.
카각-
곧장 틈새로 날을 쑤셔 넣어 틈을 벌리자, 바닥이 들리며 텅 빈 공간이 드러났다.
툭-
그대로 바닥 아래로 떨어진 나는, 어두컴컴한 지하를 훑으며 주변을 파악했다.
생각보다 넓고 길이 제대로 나있는 것이, 확실히 무언가 용도가 있어 공간을 내놓은 건 맞는 것 같았다.
찰그랑-
“음?”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다 무언가 발에 차이는 소리에 고개를 숙이자, 웬 쇠사슬 같은 것이 늘어져있는 게 보였다.
“이건….”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슬며시 고개를 들자, 쇠창살로 막혀있는 작은 독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감옥.
아무래도 여긴 죄인들을 가두어 놓는 감옥이 분명한 것 같았다.
하지만 평범한 감옥이었더라면 이렇게 내려가는 길도 없이 지하에 내놓았을 리가 없었다.
분명 어딘가 더럽고 추악한 비밀이 숨어있을 터.
그리고 그 비밀이 무엇이냐에 대한 것은, 지금 내게 있어서도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가능한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더러운 것일수록, 알카에다의 영주가 누군가에게 이 지하 감옥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을 테니까.
끼기기긱-
개중 하나를 열고 안쪽으로 들어서자, 희뿌연 먼지가 그득하게 쌓인 거적때기가 구석에 놓여있었다.
사락-
슬며시 그를 들추자, 허옇게 뜬 백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살점과 내장, 근육 같은 건 진즉에 썩어문드러진 듯 보이지 않았다.
파스슥-
조심스레 뼈를 들추려고 하니, 한순간 가루가 되어 무너졌다.
그 말은 즉, 이 지하 감옥이 뼈가 자연스레 삭아 부스러질 정도로 긴 세월동안 방치되어있었다는 얘기였다.
“…환상적이군.”
나는 손에 묻은 뼛가루를 털어내며, 이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정도면 현 영주조차 이 지하 감옥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만에 하나 알고 있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래봐야 한 번도 살펴본 적 없을 테니까.
지금 내가 이 지하 감옥을 이용해 건물 곳곳을 돌아다닌다하더라도, 누구 하나 알아차릴 사람이 없다는 얘기였다.
만족스러운 미소로 주변을 둘러보며 감옥을 돌아다니던 나는, 어느 독방 문 앞에 멈춰 천장을 올려다봤다.
이쯤인가.
교황과 얘기를 마치고 시종의 안내를 받아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방에 오기까지의 동선을 생각해보면, 이 바로 위가 교황의 방이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뭐든 신중해서 나쁠 건 없겠지.
사사삭-
몸을 박쥐로 흩뜨려 천장에 달라붙은 나는, 조용히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메리엘, 이 빌어먹을 년. 쓸모없는 것을 갖다가 그 자리에 앉혀놨더니, 이러 식으로 내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확실하군.
알폰스, 그 늙은이의 목소리였다.
사악-
곧바로 바닥에 내려와 단검을 그어 창살에 표식을 새긴 나는, 혹여 시종이라도 찾아올까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달칵-
나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들춘 바닥을 다시 제자리에 끼워 맞춘 뒤,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다행히 그 사이에 누군가 방에 들어온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교황의 손님이자 검귀의 제자가 묵고 있는 곳에, 그 누가 함부로 문을 열고 들어오겠냐만은.
어쨌든 이걸로 교황을 잡을 준비는 끝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오늘이라도 그 늙고 추레한 머리를 목에서 떼어주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랬다간 아무리 그와 대화를 나누고 방으로 들어간 뒤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알리바이가 있다한들, 가장 마지막에 같이 있던 사람으로서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더구나 혹시라도 녀석의 방을 조사하다 지하 감옥의 존재를 눈치 채기라도 한다면, 자연스럽게 화살이 이쪽으로 몰릴 터였다.
어차피 오늘만 날이 아니었다.
교황은 성녀를 의식해서라도 어떻게든 나를 계속 제 곁에 두고 싶어 할 터였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가능한 모든 위험요소를 배제한 뒤에 움직이더라도 늦지 않았다.
달칵-
머릿속으로 정리를 마친 나는, 그대로 방 불을 끄고서 침대에 몸을 뉘였다.
거사를 위해선 적어도 하루는 여기서 더 머물러야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일은 좀 바빠지겠군.
* * *
댕-! 댕-!
“적습, 적습이다! 빨리 준비하고 제 위치에 서도록!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이른 새벽.
요란한 소리에 잠에서 깬 나는, 창밖으로 분주히 움직이는 병사들을 보고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끼익-
“가젤! 지금 성문 앞에 마왕군들이….”
“예, 준비됐습니다.”
“허허, 그래. 빠르구먼. 그럼 건투를 빌겠네. 마음 같아선 이 늙은이가 같이 가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애들이 전위로 보내주질 않는구먼.”
“교황님,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움직이시지요! 그리고 가젤님, 제가 인도하겠습니다.”
나는 급하게 교황을 보내며 앞장서는 성기사를 따라, 활짝 열린 성문을 통해 도시 밖으로 나왔다.
“제국의 병사들이여, 겁먹지 말라! 여신님께서 그대들과 함께하고 계심이라! 우리의 땅을 짓밟으려는 저 간악한 마족무리들을, 지금 여기서 몰아내는 거다!”
“와아아아아!”
쿠웅-
한 차례 병력을 쏟아낸 성문이 다시금 굳게 잠겼다.
성벽 위에 자리 잡은 병사들과 달리 밖으로 나온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총 세 가지.
가능한 마왕군이 다리를 건널 수 없도록 틀어막는 것과, 어떻게든 공성병기가 성문에 다다르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
마지막으로 아까 그 성기사를 포함한 몇몇 실력 있는 이들로 구성된 별동대가 맡은 책무인, 적진에 파고들어 안쪽을 헤집어놓는 것이었다.
“여신이시여….”
같이 옆에서 달리고 있는 성기사의 눈빛이 갈수록 거세게 흔들렸다.
여신의 모습을 조각한 목걸이를 꾹 쥐고서,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는 거겠지.
말이야 별동대지, 사실상 그냥 죽으러가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을 터였다.
지금 알카에다를 지키고 있는 연합은, 기껏 저들을 찾아온 검귀의 제자조차 바로 사지에 쑤셔 넣어야만 할 정도로 여력이 모자랐으니까.
콰아앙-!
“아아아악!”
“사, 살려….”
머잖아 두 군의 충돌이 시작되며, 사방에서 폭음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연합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라고 한들, 내가 닥치는 대로 마왕군을 헤집고 다닐 수는 없었다.
어제 그 막사에 모여 있던 수뇌부들은 몰라도, 일반 병사나 장군들은 지금 내가 알카에다에 잠입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니까.
괜히 검귀의 제자라는 이름값을 하려고 눈에 띄는 짓을 벌였다가, 적인 줄 알고 우르르 달려드는 녀석들을 있는 대로 싹 다 죽여야 되는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랬다간 사정을 아는 놈들 또한 제아무리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었다 하더라도, 나를 곱게 봐줄 리가 없었다.
괜히 자처해서 적을 만들 필요는 없지.
가능한 아군에 직접적으로 눈에 띄는 피해를 입히지 않으면서도, 연합 놈들에게 검귀의 제자로서 실력을 증명해보일 방법은 단 하나.
강한 녀석을 찾아 놈의 발을 묶어놓는 것뿐이었다.
콰아아앙-!
재빠르게 전장을 훑은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시커멓고 커다란 용을 보고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능하면 마왕을 상대하는 편이 더 임팩트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마왕군의 전력에 너무 큰 구멍이 생기고 말 터였다.
“죽어라, 이 하찮은 인간 놈….”
카앙-!
“으음… 누구냐!”
허공에서 입을 쩍 벌린 채 대규모 마법을 사용하려던 녀석의 목을 쳐 시선을 끈 나는, 조용히 그를 올려다보며 슬그머니 투구를 벗었다.
“…음?”
[쟈칼 님, 잠시만 맞춰주십시오.]
비록 화상의 흉터가 가득했지만 허리춤의 단검을 보고선 단박에 나임을 알아챈 쟈칼은, 내 입모양을 읽고선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이 덩치만 큰 도마뱀 녀석, 어딜 함부로 그 냄새나는 주둥이를 들이미느냐!”
“뭐, 뭣….”
“저, 저거 봐! 누군가 저 끔찍한 용을 상대로 혼자….”
“거, 검귀! 검귀의 제자 분께서 오셨다!”
좋아, 이 정도면 눈길은 확실하게 끌었군.
이제 적당히 마왕군이 물러설 때까지 시간만 끌면…
콰앙-!
“큭!”
마흐제브의 검을 뽑아든 채로 주변을 훑던 나는, 갑작스럽게 무시무시한 기세로 내리찍어오는 쟈칼의 앞발에 황급히 옆으로 몸을 던졌다.
“무, 무슨… 쟈칼….”
콰아앙-!
“자, 잠시….”
“놈! 전투 중에 쫑알쫑알 말이 많구나.”
…이런 젠장.
너무 도발했나.
나는 눈이 돌아가 전력으로 부딪혀오는 쟈칼을 보고선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렇지 않아도 자존심 강한 용족한테,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인 덩치 큰 도마뱀이란 모욕을 내뱉은 게 문제였나.
아니면 그냥 평소 카르카쉬에게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던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걸지도 몰랐다.
카앙-!
“젠장… 미치겠군.”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였다.
우선 그가 진정할 때까지 적당히 공격을 받아주고선, 그 뒤에 얘기를 나누어보는 수밖에.
“죽어라, 이 애송이 같은 놈!”
콰아아앙-!
그래도 다행히 저쪽에서 진짜 전력을 다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만일 그랬더라면 처음 그걸로 어디 한군데가 부러져있을 터였다.
쟈칼은 그저 위에 카르카쉬가 있기에 사천왕으로 남아있을 뿐, 개인의 강함으로 따지자면 악투스 다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후우….”
좋게 좋게 생각하자.
덕분에 짜고 쳤냐는 의혹을 받을 일은 없을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