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자, 그럼 마저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지요.”
알카에다 중앙에 높이 솟은 내성 안쪽.
그 한쪽에 위치한 거대한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나는, 가장 상석에 앉아 얘기를 꺼내는 엘프 여왕을 바라봤다.
방금 전 나를 맞이했을 때와 달리 심각한 표정.
검귀의 제자라는 말에 회의도 멈추고 한달음에 달려왔던 건 단순히 마흐제브에 대한 경외와 존경의 표시가 아닌, 그만큼 현 상황이 급박하다는 증거였다.
“알폰스. 피해 상황이 어떻게 된다고 했죠?”
“허허. 그걸 이 늙은이한테 묻는다고 알겠소? 군에 대한 건 그쪽 사람한테 물어야지.”
교황은 그녀의 물음에 너털웃음을 지으며 슬쩍 장군들을 바라봤다.
“교황님께서 사제분들을 이끌고 와주신 덕에, 전보다는 훨씬 경미한 수준에서 그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사망자는 없어도 그만큼 부상자가 늘은 지라, 전력의 손실은 전날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으음…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구먼.”
알폰스는 대장군의 말에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사망자는 없지만 부상자가 다수.
장기적으로 봤을 땐 확실히 전보다는 형편이 나아진 셈이었다.
아니, 부상자라 하더라도 중상을 입은 자가 아니라면 여전히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을 치료하는 데 사제들의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마왕군과의 싸움에서 신성력이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하는지는 그 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부상 당한 병사 몇의 치료보단 오히려 다음을 위해 신성력을 최대한 아껴놓는 것이 이득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신의 이름 아래 자애로 뭉친 교단의 입장에서, 제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다 다친 병사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도에서 지원은 없는 건가?”
“…예. 그쪽도 이젠 더 이상 여유가 없는 모양입니다. 그나마 가제프 경께서 북쪽 전선을 잘 막아주고 계시긴 하지만, 이번에 하메른을 함락시킨 녀석들이 수도 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답니다.”
“허어….”
지금껏 어떻게든 잘 막아내긴 했지만, 교황의 합류에도 불리한 상황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모자란 전력을 채우기 위해선 지원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본디 하메른으로 향하고 있던 병력은 그대로 릴리스와 게르둠의 군세를 막아서기에도 급급한 상태였다.
“테네스. 그쪽은 어떻소?”
교황은 어두운 표정으로 엘프 여왕을 돌아봤다.
제국이 안 된다면 엘븐하임의 손이라도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현재 그녀를 따라 알카에다에 머물고 있는 전력은, 그들의 절반. 아니, 그조차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 말은 즉, 아직 그만큼의 여력이 더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하다못해 에리스.
그랜드 마스터인 그녀만이라도 챙길 수 있다면, 가장 위협적인 존재인 두 마왕의 견제라도 보다 수월해질 수 있을 터였다.
“…죄송해요. 아마 당분간은 무리일 거예요.”
“무리라니, 그게 무슨… 내 알기로는 아직 한참 여유가 있을 텐데. 혹 전쟁 이후를 바라보고 전력을 아끼고 싶어 그러는 거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오. 이대로 제국이 무너지면 엘븐하임이라고 안전할 거 같소?”
“네놈! 아무리 연합을 맺었다 한들, 어찌 여왕님께 함부로 그런 말을….”
“엘베스.”
여왕은 영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저를 쏘아붙이는 교황의 말에 분노한 수호자를 말없이 돌아봤다.
“…죄송합니다, 여왕님.”
그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제 그녀의 눈빛에 흠칫 몸을 떨며,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이런 자리에서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지금 저희 엘븐하임의 상황도 영 좋지만은 않아요. 내부에 썩은 가지가 생겼거든요.”
여왕은 잘근잘근 손톱을 씹으며 말을 이었다.
항상 자리에 맞는 고귀함을 강조하고 다니던 그녀에게서 나올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많이 안 좋나 보군.
아무래도 에리스의 일로 많이 골머리를 썩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두 번 그런 것이 아닌 듯, 이미 테네스의 손톱은 짧다 못해 밑살이 다 드러날 지경이었다.
“자세한 건 알려드릴 수 없지만, 지금 제가 이렇게 숲 밖으로 나와 있는 것도 상당히 무리하고 있는 입장이라는 걸 이해해줬으면 좋겠어요. 알폰스.”
그녀가 그렇게까지 나오자, 교황도 더는 무어라 할 수 없었다.
제국과 엘븐하임.
양쪽 모두 이 이상 지원을 바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결국 여기 남아있는 인원들로만 성을 지켜야 된다는 소리였다.
갈수록 회의장의 공기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전의 그쪽은 아직인가요?”
침묵도 잠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성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쪽?
“아! 그러고 보니 지금쯤이면 도착할 때가 됐겠군요. 당장 알아보라 하겠….”
똑똑-
“대장군님! 드워프 쪽에 보낸 사자가 돌아왔습니다.”
“오, 마침 잘 왔군. 당장 들여보내게.”
드워프?
나는 그동안 잠시 잊고 살았던 놈들의 얘기에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생각해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곳 알카에다는 인간과 드워프들의 국경 근처에 세워진 도시였으니까.
“추, 충성! 알피에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그래, 수고 많았네. 그럼 어서 이야기해보게나. 드워프들이 뭐라던가?”
회의장 안쪽으로 들어온 병사는 긴장된 기색으로 중앙에 섰다.
그리고 곧 품에서 글자가 적힌 두루마리를 꺼내 펼쳐 들고선,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서신은 잘 읽었소. 상황이 꽤 급박한 모양이더군. 그렇지 않아도 그 마왕군이라는 놈들에 대한 처우를 어떻게 할지 얘기 중에 있었소. 허나 이번 사태로 하여금 우리도 언제까지고 고민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소. 원하는 대로 원조를 약속하리다. 다만 그러기 위해 조건이 있소.”
“…조건?”
병사의 입을 통해 전해진 드워프 왕의 말에, 회의장에 있는 모두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급박한 때에 조건이라니.
사실상 말이 조건이지, 반쯤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이, 이상입니다!”
“으음….”
“그 땅딸보 놈들이 아주 단단히 미쳤군! 대장군님, 정말로 저런 조건을 받아들일 생각이십니까?”
뒤이어 나온 세세한 조건들에, 장군들의 얼굴이 악귀처럼 찌푸려졌다.
병력의 지원은 조금만.
다만 질 좋은 광석과 장인들은 모두 지원해주겠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면 그동안 들어간 광석들과 장인들의 비용은 따로 청구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근 무너진 광산에 대한 배상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그 무너진 광산이 뭐기에, 그런 것까지 이쪽에 책임을 묻는 거랍니까?”
“흡….”
“조용, 조용!”
나는 무너진 광산의 이야기에 순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굳은 얼굴로 두루마리를 살피는 대장군을 바라보았다.
광산이라.
분명 내가 일전에 무너트렸던 벨트람 근처의 그 광산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때 가지고 나온 장비들을 모두 제국에 팔아버렸으니, 당연히 그들 입장에선 인간들이 광산을 무너트렸으리라 오해했을 만도 했다.
더구나 그땐 마왕군은 있었어도 아직 대륙 남쪽에는 얼굴도 비추지 않았을 때니까 더더욱 그렇겠지.
계획대로군.
“…놈들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대장군!”
“어쩔 수 없다. 이대로 알카에다까지 밀려버리면 끝이다. 그땐 제국 전체가 위험에 빠지게 될 거다. 다만 이런 조건은 내가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닌 만큼, 황제께 연락을 드리는 게 우선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럴만한 시간이 없다는 거지.”
하지만 어찌 됐든 이대로 드워프들이 전쟁에 끼어드는 건 별로 좋지 않았다.
정확히는 참여하더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가뜩이나 이 알카에다의 성벽을 허무는데 애를 먹고 있는 때에, 드워프들의 장비까지 들어온다니.
절대 그들 마음대로 일이 흘러가게 둘 수는 없었다.
“그, 그러면….”
“협상이 좀 필요할 거 같군. 일단 광산의 건에 대한 배상을 해줄 테니, 당장 장비라도 조금 받아올 수 있는지 한 번 물어보도록. 아무래도 자네가 한 번 더 힘내줘야겠어.”
“예, 예! 알겠습니다!”
다만 다행인 점은 놈들이 원조를 받더라도 그것이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거였다.
적어도 저 사신이 다시 산맥을 넘어 드워프들의 왕국에 닿고, 거기서 장비를 실은 마차를 가져오기까지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아니지.
생각해보면 굳이 그 시간 내에 끝을 보려고 할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곧 드워프들의 원조가 있을 걸 알아냈으니, 적당히 산맥에 몇 명 인원을 배치해서 중간에 가로채면 될 일 아니겠는가.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서둘러 회의장을 나서는 사신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럼 회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회의는 이후 별로 영양가 없는 얘기만 오가다 끝이 났다.
“거기 자네… 음, 그러니까 뭐라 부르면 되겠나?”
나는 회의장을 나서는 나를 붙잡는 교황을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 그러고 보니 검귀의 제자라고만 했지 따로 이름은 알려준 적이 없었군.
“가젤입니다.”
“허허, 그래. 가젤. 혹시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겠나?”
“아, 예. 물론입니다.”
난 웬일로 먼저 나를 제 방에 들이는 알폰스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발로 사지에 머리를 들여놓다니.
어차피 녀석이 무사히 하메른을 빠져나와 이 도시에 닿은 그 순간부터, 교황이 도시를 버리고 홀로 도망쳤다는 증거는 이미 갖춰진 거나 다름없었다.
후작의 도주는 릴리아나에게 잘 부탁해놨으니, 이미 판은 깔아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말은 즉, 더 이상 이놈을 굳이 살려둘 필요가 없다는 얘기였다.
이거 잘 됐군.
나는 그를 따라 천천히 내성 안쪽을 걸어, 그가 배정받은 건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