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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126화 (126/200)

제126화

“여기 있습니다, 에릭 님.”

“그래, 고맙군.”

“아, 아닙니다! 이렇게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어 영광입니다!”

영광까지야.

근처에서 아무 병사를 찾아 갑옷을 챙긴 나는, 그대로 주둔지를 빠져나왔다.

주변을 둘러보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기름을 적신 천을 두른 횃불에 부싯돌을 튕겨 불을 붙였다.

화륵-

시뻘겋게 일렁이는 불꽃을 마주한 채로 잠시 숨을 골랐다.

빌어먹을.

아무리 교황과 엘프 여왕의 눈을 속이고 알카에다로 들어가기 위해서라지만, 별로 내키진 않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이내 마음을 다잡은 나는, 천천히 얼굴에 횃불을 가져다대었다.

치이익-

“끄으으윽….”

꾹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비집고 나왔다.

교황의 신성력에 온몸이 살갗이 타들어갔을 때와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녹아내린 살점이 흘러내리는 감각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툭-

“아으윽….”

손에서 횃불을 놓았을 땐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짓무른 상태였다.

물론 이 정도야 뱀파이어의 재생력이라면 조금 시간이 걸릴지언정, 충분히 원래대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일부러 마력을 조정해 가능한 재생을 늦추었다.

한창 전투중인 시기에 연합의 눈을 속이고 알카에다에 잠입하기 위해선, 가능한 뱀파이어로서의 특성을 지울 필요가 있었다.

평소라면 그냥 창백한 인상이라 보일 피부도, 전쟁 중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허억, 헉….”

불은 진즉에 꺼졌지만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남은 불씨가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잠시 짓무른 피부를 더듬거리던 나는,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단검을 뽑아들었다.

우웅-

겉으로 보았을 때 뱀파이어와 인간의 차이점은 크게 두 개가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창백한 피부와 날카롭게 솟은 송곳니.

적당히 검기를 뽑아낸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벌렸다.

카가각-

“흐으….”

생니를 갈아내는 행위는 제 얼굴에 불을 붙인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쉽사리 참을 수 있는 정도의 고통은 아니었다.

특히 자칫 비명이라도 잘렸다간 혀가 반으로 갈라질 수도 있었기에,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작업이었다.

“후욱….”

이내 무사히 작업을 마친 나는, 달뜬 숨을 내뱉으며 식은땀을 닦았다.

“읏….”

…망할.

짓무른 상처를 쓸고 지나간 손등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달칵-

그대로 단검을 집어넣고 투구를 집은 나는, 얼굴을 가리고 이만 알카에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빨리 빨리 정리해!”

“한곳에 모아서 다 태워버려!”

성문 앞에는 마족의 시체를 정리하는 병사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가만히 내버려두었다간 쌓이고 쌓여 화살받이가 되어줄 수 있었기에, 일부러 인력을 들여서라도 치우는 모양이었다.

마침 잘됐군.

안 그래도 필요했는데.

서걱-

그들 몰래 검을 뽑아들어 시체의 수급을 하나씩 잘라낸 나는, 금세 보따리 하나를 가득 채우고선 꼼꼼히 검신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좋아, 이만하면 됐군.

저벅-

“거의 다 끝났어! 이제 불만 붙이고… 응? 거, 거기 누구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성문 앞에 모습을 드러낸 나는, 내 앞에 창을 들이미는 병사를 보고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검귀의 제자가 왔다고 전해라. 도우러 왔다고.”

와르르-

방금 둘러싼 보자기를 풀어 마족의 머리를 우수수 쏟았다.

“아… 예, 예! 알겠습니다!”

병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와 성문 쪽을 번갈아보더니, 이내 창을 거두고선 황급히 제 상관에게로 달려갔다.

“…실례지만 정말로 검귀, 마흐제브 님의 제자가 맞으십니까?”

나는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곧 이쪽으로 다가온 기사를 보고선,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고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이쪽을 훑는 기사를 향해, 말없이 손잡이를 쥐었다..

스릉-

“무, 무슨!”

“뭐하는 짓이냐! 당장 검을….”

“…잠깐!”

갑작스레 검을 뽑아드는 내 모습에, 황급히 병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곧바로 황금빛 검신을 보고선 무언가를 눈치 챈 기사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그 검은….”

“스승님께 물려받은 검이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기사는 더 이상 자신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님을 직감하고, 고개를 숙이며 내게 양해를 구해왔다.

“귀인. 죄송하지만 잠시 여기서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무래도 바로 안쪽으로 모시긴 힘들 거 같습니다.”

“알겠다.”

나는 쏜살같이 성문 안쪽으로 달려간 그를 기다리며,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시체를 치우던 병사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표정으로,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억, 헉… 검귀, 마흐제브 님의 제자라고?”

“그게 사실인가요?”

머잖아 익숙한 얼굴들이 성문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교황과 엘프 여왕.

둘 모두 몇 번이고 마흐제브와 만난 적이 있으니만큼, 그가 섣불리 제자를 두지 않음을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당장 현 제국의 그랜드마스터인 가제프만 하더라도 영 탐탁지 않게 여기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검귀의 제자라니.

하물며 그 가제프조차 넘겨받지 못한 검을 물려받은 사람이라니.

나를 마주한 그들의 눈에는 희망과 불신의 빛이 교차하고 있었다.

“으음, 확실히… 저건 마흐제브 님의 검이 확실하구려.”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알폰스.

그는 내 허리춤에 달린 검을 보고선 나지막이 고개를 주억였다.

“하지만 그분께서 따로 제자를 두셨다는 말은… 아! 그러고 보니 벨라노르에서 그런 소문이 돌았다는 얘기는 얼핏 들은 기억이 있구먼.”

“교, 교황성하!”

교황은 저를 만류하는 사제의 손을 밀어내며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자네를 의심하는 건 아니네만, 혹시 괜찮다면 그 투구 좀 벗어줄 수 있겠나?”

“예, 그러지요.”

달칵-

나는 그의 부탁에 망설임 없이 투구를 벗었다.

“허억… 어, 얼굴이….”

“으음….”

화상으로 인해 잔뜩 녹아내린 내 얼굴을 본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 미안하구먼. 내 그런 줄도 모르고. 그, 괜찮은 겐가? 사죄라고 하긴 뭐하지만, 혹 후유증 같은 게 있다면 이 늙은이가….”

“괜찮습니다. 벌써 십년도 더 전의 흉터니까요.”

난 미안한 얼굴로 손을 뻗어오는 교황을 보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짓 하기는.

만에 하나 그가 신성력으로 나를 치유하려들었다간, 살갗이 타오르며 단번에 정체가 탄로 났을 터였다.

평소 겉으로 인자한 성품을 연기하면서도 쉽사리 힘을 쓰지는 않던 그가 굳이 호의를 베풀려 든 것은, 그만큼 알폰스와 마흐제브의 사이가 각별하기 때문이었다.

용사 시절에 둘 모두에게 듣기를, 자세한 건 몰라도 마흐제브가 알폰스의 은인쯤 되는 관계였던 거 같았다.

“하지만 이걸로는 자네를 완전히 믿기가 그렇구먼. 안타깝게도… 그분께선 벨라노르에서 타계하셨으니 말일세.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한데….”

사실 그런 건 별로 내 알 바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내가 용사 시절, 지금은 그와 검귀만이 알고 있을 비밀을 술 취한 마흐제브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는 거였다.

물론 그건 엘프 여왕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습니다. 바로 증명해드리지요. 다만 괜찮으시다면 귀 좀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좀 뒤로 물려주셔도 좋습니다.”

나는 아직 완전히 의심을 풀지 않고 슬며시 내 쪽을 흘기는 교황을 보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무슨… 교황님! 아니 됩니다! 저 자를 어찌 믿고….”

“허허. 괜찮네. 여기서 무언가 수작을 부릴 생각이었으면 진즉에 검을 뽑아 들었겠지. 하지만 가까이서 귀를 빌려주기는 힘들 거 같구먼.”

알폰스는 뒤에서 저를 말리는 사제들을 가리키며,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뭐 딱히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대놓고 말하더라도 손해를 보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였으니까.

다만 조금이라도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잠시 배려해주려던 것뿐이었다.

“자, 그럼 어디. 자네가 검귀, 마흐제브님의 제자라는 걸 증명해주겠나?”

난 적당히 사람들을 뒤로 물린 교황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폰스. 그 꼬맹이가 아직 주교에 머물 적에 나한테 빌린 금화 이백 개를, 아직도 안 갚고 있단 말이지. 제자야, 원한다면 나중에 네가 그 돈을 가져도 좋다.”

“허, 허허허….”

나는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헛웃음을 흘리는 그를 보고선, 살포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돈은 갚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교황성하. 하지만 이제 저를 믿어주시겠습니까?”

“으음… 이거 참, 아직도 그 일을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구먼. 아니, 언제든 말씀만 해주셨다면 바로 드렸을 텐데.”

교황은 혹여나 누가 들었을까 슬그머니 뒤쪽을 훑으며,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왔다.

“교, 교황님!”

“괜찮네. 이 친구의 신원은 내가 보증할 테니, 이만 들여보내주게나.”

“…예? 아, 네!”

알폰스는 허허 웃으며 나를 이끌고 성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는군.

아직 엘프 여왕과는 얘기를 나누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슬쩍 눈빛을 보아하니, 그녀 또한 교황의 반응에 의심을 푼 모양이었다.

“알폰스. 당신한테 그렇게 큰 빚이 있는 줄은 몰랐군요.”

“으흠! 드, 들었소? 이거 참, 이럴 줄 알았으면 속는 셈치고 귀 좀 대어볼 걸 그랬구먼.”

“후후. 걱정하지 말아요. 딱히 인간들의 일을 가지고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닐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렇게 무사히 알카에다에 입성한 나는, 분주히 움직이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하면 이놈들을 가장 잘 엿 먹였다고 소문이 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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