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에릭.”
금세 시야에서 사라진 아이베른을 뒤로하고 계속 두 마왕이 돌아오길 기다리던 나는, 내 어깨를 톡톡 건드리는 아이시스를 보며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저기. 왔어.”
이윽고 그녀는 슬슬 끝이 보이는 본대의 행렬 뒤에 모습을 드러낸 카르카쉬와 벨제붑을 가리켰다.
사천왕들까지 전부 모여서 얘기를 나눈다기에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일찍 끝난 모양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카르카쉬 님! 벨제붑 님!”
“그래. 다들 수고가 많군. 그럼 벨제붑, 나머지는 들어가서… 음?”
벨제붑과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초소를 지난 카르카쉬는, 저를 향해 다가오는 나를 보고선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일찍 왔군. 보고받기로는 모래쯤 도착한다고 들었는데.”
“하메른에서 놓친 교황이 이쪽으로 도망쳐서 말입니다. 가능한 서둘러 왔습니다.”
“그래. 게르둠과 릴리스가 그러더군. 교황과 사제 놈들이 곧 이쪽으로 올 거라고. 그렇지 않아도 오늘 성문의 수비가 더 견고해진 참이었다.”
그는 나지막이 인상을 찌푸리며 슬쩍 뒤를 돌아봤다.
알카에다.
하메른이나 벨라노르처럼 특별히 수성하기 좋은 도시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드워프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만큼 그리 모난 부분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보통의 도시들보다는 수성에 있어 더 유리한 편이었다.
산맥을 끼고 사는 드워프들의 특성상 그들과 국경을 맞댄 알카에다도 서쪽과 남쪽으로 산맥과 붙어있었기에, 꽤 높은 성벽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 곳에 성녀 하나만 있어도 함락시키기가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었을 텐데, 교황까지 들러붙었으니.
오늘 전투를 끝내고 사천왕들을 모두 불러 모아 다급히 회의를 열 만도 했다.
“죄송합니다.”
“됐다. 그게 네 잘못은 아닐 테니. 그보다 마침 잘됐군. 따라 오거라.”
나는 개의치 않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 카르카쉬의 부름에, 그 뒤에 붙어 천천히 막사로 향했다.
스륵-
“오셨습니까, 카르카쉬 님!”
“오셨습니까, 벨제붑 님!”
주둔지의 중앙에 세워져있는 커다란 막사의 천막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선 두 마왕은, 미리 준비를 마치고 자리를 잡은 사천왕과 참모들을 보며 상석에 앉았다.
나는 뒤이어 함께 들어온 아이시스마저 제 자리를 찾아 착석한 뒤, 꽉 차버린 의자를 보고선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이거 참 난감하군.
“거기, 밖에 누구 있나?”
“예, 예! 부르셨습니까!”
“의자 좀 하나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탁-
“이쪽에 앉도록.”
“…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난 금방 막사 앞을 지키던 병사를 시켜 제 옆에 자리를 만든 마룡왕의 손짓에, 짐짓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아무리 따로 마련된 자리가 없었다고는 해도, 다른 곳도 아닌 제 옆에다 의자를 놓다니.
이는 두 마왕을 제외하고 나면 가장 상석이 되는 자리였다.
항상 그의 옆을 지키는 쟈칼과 나머지 사천왕들은 물론, 벨제붑의 사천왕들 또한 함께하고 있는 곳에서 이런 일을 벌이다니.
“카, 카르카쉬님!”
“자리가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아무리 그자의 공적이 뛰어나다 한들….”
터무니없는 그의 행동에 예상대로 여기저기서 불만이 튀어나왔다.
특히 저들의 왕인 벨제붑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자리를 만든 것에 불만은 품은 악마족들이 그러했다.
“조용! 곧 회의를 앞두고 이게 무슨 추태더냐. 함부로 언성을 높이지마라. 카르카쉬, 미안하군. 그리고 자네도. 내가 대신 사과하마.”
“베, 벨제붑 님….”
하지만 이내 도리어 그들을 멈춰 세우고 이쪽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벨제붑의 모습에, 막사 안은 다시 정적을 되찾았다.
“그럼 시작하지.”
“예, 카르카쉬님. 우선 금일의 전투 결과부터 보고드리겠습니다.”
나는 일련의 소란에도 별로 개의치 않고 바로 회의를 시작한 마룡왕을 보며, 속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당연히 이리 될 줄 알면서도 일부러 나를 제 옆에 앉힌 모양이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다행히 사상자가 많진 않군. 하지만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 이대로는 공략에 시간이 좀 걸리겠어. 그러고 보니 에릭, 네가 하메른에서 황태자를 붙잡았다고 하던데.”
“예. 비록 교황은 놓쳤지만, 뒤이어 놈이 뚫어놓은 길을 따라 빠져나가려고 하는 녀석은 잡을 수 있었습니다.”
뭐가 됐든 이 상황이 내게 마냥 독이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비록 아직도 영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이쪽을 살피고 있는 악마족들에게 조금 반감을 사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마룡왕이 나를 일부러 제 옆에 앉혔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도 이미 제 사천왕들을 대동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를 제외한 가장 상석에 타군의 사람을 말이다.
“릴리스에게 듣기를, 녀석의 신변도 처음엔 네가 맡았다더군. 혹시 그놈한테서 무언가 알아낸 건 없었나?”
이건 기회였다.
마룡왕의 후광을 입어,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갈 기회.
솔직히 내게 있어 마족 놈들의 평판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지만, 마왕군 내에서 지위가 오르면 오를수록 복수를 위해 써먹을 수 있는 카드가 많아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이번에 반테온의 입을 통해서 이방인들의 소환에 대한 얘기를 들은 만큼, 더욱 단단히 준비를 마칠 필요가 있었다.
“알아낸 사실이야 여럿 있습니다만….”
어떡할까.
나는 잠시 말꼬리를 늘이며, 막사 안쪽을 슥 훑었다.
카르카쉬, 벨제붑.
그 휘하에 있는 여덟의 사천왕.
군의 참모와 몇몇 장군들까지.
스무 쌍이 넘는 눈동자가 모두 내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반테온에게서 캐낸 정보들 중엔, 알카에다를 공략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게 없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괜히 김만 새어버리는 걸로도 모자라, 기껏 온 기회를 걷어차 버리는 꼴이 될 터.
아니, 그 기회와 함께 괜스레 평판만 깎아먹는 일이 될 게 분명했다.
“알카에다의 공략에 도움이 될 만한 건 세 개 정도가 있겠군요.”
기회를 붙잡고 올라가기 위해선 능력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비록 실제로 반테온을 심문해서 캐낸 게 아니니 거짓을 고하는 꼴이 되겠지만, 그거야 릴리아나만 조용히 입을 다문다면 아무런 문제없을 터였다.
지금부터 내가 꺼낼 정보들은 사실유무로만 판단하자면 분명하게 사실인 것들뿐이었으니까.
“가장 먼저 성녀, 메리엘에 대한 얘깁니다. 아무래도 교단에는 성녀들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모양이더군요.”
“특별한 능력?”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을 되묻는 카르카쉬를 보며, 씨익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황태자 녀석의 말로는, 이 중간계에 잠시나마 여신의 성역을 현현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성역?”
“예. 지금껏 교단 놈들이 펼치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신성력을 계속해서 내뿜는 대지랍니다.”
“으음, 그게 사실이라면 좀 더 조심할 필요가 있겠군. 골치 아프게 됐어.”
당연히 카르네몬에서 있었던 신성력의 폭발에 대해 전해들은 바가 있을 그이니만큼, 내 말에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굳혔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만한 능력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사용할 수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실제로 성역을 선포하기 위해선 그를 위해 기도문을 읊는 것만 하더라도 한세월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준비하는 동안 어느 정도 힘이 쌓이면 계속해서 주변에 신성력의 폭풍이 휘몰아치니, 그 전조를 보고서 미리 몸을 빼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그런다고 완전히 그 여파를 피해가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잡병이나 아직 미숙한 놈들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목숨은 건질 수 있을 터였다.
“그렇군. 알겠다. 그럼 나머지 둘은 뭐지?”
“나머지 둘은….”
나는 씨익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비록 마룡왕과 악마왕의 군세가 생각보다 고전하고 있던 건 의외였으나, 그렇다고 저 성벽을 넘을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내겐 저 알카에다를 공략할 비장의 수가 있었으니까.
하메른처럼 따로 안쪽에 들어갈 수 있는 비밀 통로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었다.
엘프 여왕과 교황, 둘이 동시에 지금 저 도시 안쪽에 머물고 있기에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한 번 써먹으면 다시는 못 써먹을 일회용 방법이긴 했지만 말이다.
“…확실한가?”
“예, 확실합니다.‘
“카르카쉬 님, 이건 아닌 거 같습니다. 아무리 포로로 붙잡혔다고는 해도 적의 입을 통해 나온 정보들로 어떻게 놈들을 속여 넘긴단 말입니까?”
“으음….”
금방 얘기를 늘어놓은 나는, 그 즉시 고개를 저으며 만류하려드는 이들을 보고선 조용히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해내보이겠습니다. 애초에 실패하더라도 손해는 모두 저 혼자 질 수 있는 방법이지 않습니까?”
“그거야… 으음.”
난 이내 짧은 고민을 마치고 고개를 주억이는 카르카쉬를 보고선, 슬며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믿겠다, 에릭.”
“예,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카, 카르카쉬 님!”
나는 곧 마룡왕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막사를 나섰다.
“…에릭.”
“걱정하지 마라.”
중간에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아이시스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선 밖으로 나온 나는, 곧바로 짐을 챙기기 위해 배정받은 막사로 돌아갔다.
“음? 에릭,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돌아오셨습니까, 형님!”
“그래.”
그러고 곧장 정리해놓은 짐들을 뒤적인 나는, 구석에서 무언가를 챙겨들고 다시 밖으로 향했다.
“에릭? 또 어딜 가는 거냐. 회의가 다 끝난 게 아니었나?”
“일하러 가는 거다.”
“일? 그런데 그 검은 왜 챙기는 거냐. 서, 설마 이 시간에 혼자 도시로 갈 생각은….”
사락-
“혀, 형님!”
당황한 두 사람을 뒤로하고 그대로 주둔지를 벗어난 나는, 조용히 손에 쥔 검을 내려다봤다.
달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아름다운 검신.
일전에 벨라노르에서 챙겨온, 검귀 마흐제브의 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