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다 왔다.”
하메른에서 마차를 타고 꼬박 엿새.
드디어 드워프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도시 중 하나인 알카에다에 도착한 나는, 근처에 마왕군이 주둔해있는 전초기지를 찾아 마차를 세웠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구나.”
“처음 가려던 곳보다 더 빠른 길을 탔으니 말이지.”
원래대로라면 중간에 숲을 하나 더 지나야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성이 하나 더 함락되어 있어서 굳이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혹시라도 왔더니 상황이 다 끝나 있다거나 하는 걱정은 내려놓을 수 있었다.
“보아하니 아직 싸우고 있는 모양이구나. 에릭, 우리도 합류하는 게 좋지 않겠나?”
카렌은 여유롭게 말을 대는 나를 보며,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도시를 가리켰다.
“그럴 필요 없다. 어차피 지금 가봐야 크게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
끽해야 성문 쪽에서 올라오는 연기일 뿐이었다.
성벽 안쪽에선 이렇다 할 문제가 없는 걸 보아하니, 아직 성문조차 뚫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날도 저물었으니,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면 다들 돌아올 터였다.
부스럭-
“거기 누구냐!”
짐을 내려 수풀을 빠져나온 나는, 곧바로 초소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오크와 마주쳤다.
“투마왕님 산하의 독립대다. 아이시스가 얘기하지 않던가?”
“아!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에릭 가이오스 님! 지금 바로 빈 막사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래, 부탁하지.”
난 이쪽으로 불빛을 한 번 비추고선 곧바로 우리를 알아본 병사를 따라, 비어있는 막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이미 위쪽에 이야기가 다 되어있었는지, 괜히 책임자를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짐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쪽입니다!”
“수고했다. 아, 그리고 본대가 돌아오면 좀 불러주도록.”
“예, 알겠습니다!”
나는 군기가 바짝 든 병사를 다시 자리로 보내고선, 곧바로 천막을 젖혀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이 정도면 열 명이서도 넉넉히 지낼 수 있겠군.
넓은 공간에 적당히 짐을 내려놓고서 간이침대에 몸을 뉘이고 있자니,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었다.
사락-
“누구냐.”
그렇게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기를 잠시.
난 누군가 밖에서 노크하는 듯 펄럭이는 천막을 보고선 조용히 상체를 일으켰다.
“에, 에릭 님. 지금 다들 돌아오고 계십니다.”
“…금방 가지.”
“저도 가겠습니다, 형님.”
자리에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막사를 나선 나는, 따라 나서려는 발라크를 돌아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됐다. 굳이 여럿이 갈 필요는 없다. 내일부터 당분간 지겹도록 싸워야할 테니, 지금이라도 푹 쉬어두어라.”
물론 당분간이 아니라 당장 내일 성을 함락시킬지도 모를 노릇이었지만, 그래도 쉬어둘 수 있을 때 쉬어두는 편이 좋았다.
엘프 여왕과 그녀를 따르는 엘븐 하임의 수호자들. 그리고 성녀와 교황까지.
전력은 확실히 우리가 우위에 있었지만, 적들 또한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승리에는 변함이 없겠지만, 그렇다고 막 몰아붙일 수 있을 정도는 못됐다.
괜히 무리하다 한 번 재수 없게 얻어맞느니, 가능한 만전의 상태로 임하는 것이 좋았다.
“아, 에릭. 지금 가는 건가?”
나는 막사 근처에 자리를 잡고 열심히 돌을 깎는 카렌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오늘도 열심이군.
“그래. 금방 다녀오마. 그래도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부르겠다,”
“음. 알았다.”
그렇게 두 사람을 두고 초소로 향한 나는, 앞서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오는 아이시스를 보고선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아이시스.”
“…에릭?”
아이시스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이쪽을 돌아보고선,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일주일, 안 됐는데.”
“중간에 더 빠른 길을 찾아서 말이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응.”
나는 작게 고개를 주억이는 그녀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로 녀석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잘 지냈다니 다행이군. 그보다 마왕님들께선 아직인가?”
“으응… 뒤에, 사천왕님들하고 얘기 중. 곧 돌아오실 거야.”
그런가.
난 아이시스의 말에 살살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저 멀리 끝이 안 보이는 병사들의 행렬을 훑었다.
조금 시간이 걸리겠군.
“아이시스, 바보처럼 거기 멍하니 서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잠시 두 마왕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아이시스와 얘기나 나눌까 하던 나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다가오는 남자를 보고선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뭐하는 놈이지?
“빨리 대답 안 하고 뭐하는… 응? 뭐야, 넌.”
아이시스와 마찬가지로 새하얀 머리와 악마족임을 증명하는 뿔.
얼핏 그녀와 닮은 이목구비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형제나 사촌쯤 되는 모양이었다.
꾸욱-
나는 그를 마주하기 무섭게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소매를 꼭 잡아당기는 아이시스를 보고선, 슬며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에릭.”
혹시 겁이라도 먹은 건가 싶었지만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평소 무표정을 달고 사는 아이시스답지 않게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보자니, 내가 다 몸이 떨릴 정도였다.
아니. 실제로 점점 격해지는 그녀의 분노에 감응한 마력이 스멀스멀 새어나와, 주변의 온도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시스, 진정해라.”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두었다간 뭐라도 일이 터질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쪽이 예전에 마왕들 앞에서 정찰대의 포상을 수여받을 때 느꼈던 위화감의 주인공인, 아이시스의 친오빠인 듯했다.
꼬옥-
“…응. 알았어.”
그녀가 진정할 수 있도록 소매를 붙잡은 손을 꼭 맞잡아준 나는, 이내 점차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한 기온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아이시스, 애인이라도 생긴 거냐? 팔자 한 번 좋구나. 그러려고 그동안 마왕님께 간청을 드려, 부대를 벗어나 여기저기 돌아다닌 거냐?”
남매간에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적개심을 내비칠 줄이야.
나는 대놓고 그녀를 모욕하려드는 녀석을 보고선, 딱딱하게 인상을 굳혔다.
“…아니야.”
“이젠 말대답까지. 많이 컸구나, 아이시스. 뭐, 좋아. 네가 돌아다니던 말든, 연애를 하든 말든. 나랑은 별 상관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잊지 마라. 네년이 가문의 이름에 조금이라도 먹칠을 하는 순간, 네 어미와 함께 곧바로 파문시켜버릴 테니 말이야.”
“아이베른… 읍!”
난 제 어미까지 들먹이는 그의 모습에 결국 참지 못하고 이를 드러내는 아이시스를 보며, 황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이베른이라.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기억에 남진 않은 걸 보아하니, 딱히 그렇게 대단한 활약을 펼쳤던 녀석도 아닌 거 같았다.
사천왕도 되지 못하고 떨어져나간 쓰레기가, 감히 날 옆에 두고서 더러운 주둥이를 나불거리다니.
“듣자듣자 하니 더는 못 봐주겠군.”
“하. 가문의 이야기다. 외부인 주제에 신경 쓰려 들지 마라.”
나는 저를 불러 세우는 내 목소리에 헛웃음을 터트리며 이쪽을 훑는 녀석을 보고선, 나지막이 고개를 저었다.
“크로셀 가문의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다.”
“뭐?”
“상급자를 앞에 두고도 말을 가리지 않는 네 그 건방진 태도를 말이다.”
“…상급자?”
난 와락 인상을 구기며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베른을 향해, 보란 듯이 가슴의 훈장을 내비쳤다.
1급 훈장이 두 개.
듣자하니 마왕군의 어느 부대를 가든, 사천왕의 바로 아래에 달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다 했던가.
엄밀히 따지자면 이것이 계급은 아니었기에 내가 그보다 상급자라 칭할 수는 없었지만, 고작해야 2급 훈장 둘에 3급 훈장이나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그보다는 내가 공적에서 앞서고 있다 볼 수 있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나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 등을 돌리는 놈을 보며, 말없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 참, 귀찮게 일거리가 하나 더 생겼군.
“아이시스.”
“응.”
“저 녀석, 필요한가?”
아이베른 크로셀.
일전에 정찰대를 마치고 돌아왔을 적에 벨제붑의 입에서 나왔던 얘기를 떠올려보면, 그가 크로셀 가문의 적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제멋대로 아이시스와 그녀의 어머니를 파문시키겠다는 얘기를 꺼내는 걸로 봐선, 아무래도 아이시스가 첩의 자식인 모양이었다.
“…응.”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이는 그녀를 보며, 조용히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만일 크로셀 가문 자체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손을 좀 쓰려고 했건만.
아무래도 두 사람 외에는 다른 형제가 없는 데다가, 첩의 소생으로는 가문을 이을 수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도대체 어떻게 이 찝찝한 기분을 떨쳐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이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는 아이시스의 모습에, 나 또한 입 꼬리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내가, 대신할 수 있어.”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더 망설일 것도 없겠군.
“좋아, 그거면 됐다.”
“응. 그런데 에릭, 괜찮겠어?”
나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시스를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같은 편, 그것도 평범한 병사가 아닌 장군급.
악마족의 후작가인 크로셀의 장자를 죽인다니.
만일 걸리기라도 하면 단순히 징계를 먹는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걸렸을 때의 이야기일 뿐.
한창 전쟁 중이라 바쁜 와중에 남들 몰래 누구 하나 뒤통수를 치는 일 따위, 내게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방법은 많으니까”
그가 뭐 대단히 중요한 녀석이었다면 모를까.
딱히 아이시스보다 더 쓸 만하다 할 수 있는 전력도 아닌 듯하니, 그냥 치워버려고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이걸로 그녀의 호감을 좀 더 살 수 있다면 언젠가 큰 이득이 되어 돌아올 터였다.
게다가 이 빌어먹을 놈.
감히 대놓고 나를 엿 먹이다니.
곱게 죽을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