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이만하면 됐다.”
릴리아나를 통해 황태자로부터 원하는 정보를 모두 받아 적은 나는, 아직도 동공이 풀린 채로 축 늘어져 있는 녀석을 뒤로하고 등을 돌렸다.
“어머, 끝이야?”
“그래.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건 모두 뽑았다.”
현시점에서 가장 까다로운 상대인 가제프의 위치. 그리고 제국에 남아있는 전력의 총량 등.
나는 종이에 빼곡이 적힌 정보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로 천막을 젖혔다.
물론 원한다면 그밖에 다른 것들도 알아낼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러진 않았다.
그녀에게도 떨어지는 게 있어야 될 테니까.
어차피 내 공적은 이 녀석을 잡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여기서 뭘 더 알아내서 보고한다고 한들, 특별히 더 떨어질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마땅히 활약한 게 없는 릴리아나에게 있어서는 꽤 달콤한 공적이 되겠지.
“그럼….”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라. 이만 처리하든 위로 넘기든, 원하는 정보가 있으면 더 캐내든.”
“저, 정말? 아… 흠흠, 고마워.”
난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려다 입가를 가리고 슬며시 고개를 돌리는 그녀를 보고선,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
도와줬을 때 득을 보는 게 있어야 다음에도 달려오는 법이었다.
당장 필요한 정보는 다 얻었고, 나머지는 이후에 반테온을 맡을 누군가가 윗선에 보고한 것을 들으면 될 일이었다.
굳이 여기서 조그마한 공적을 더 타내보겠답시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사락-
“아, 에릭. 일은 다 끝났나?”
“음?”
막사 밖으로 나온 나는 근처에서 발라크와 함께 기다리고 있던 카렌을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발라크에게 얘기를 들었는지, 이미 떠날 채비까지 모두 마쳐놓은 상태였다.
교황과 사제들이 도망치고, 곧이어 성문 밖으로 뛰쳐나왔을 기사들을 상대해야했을 것을 생각하면 꽤 걸릴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빨리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래. 그보다 몸은 좀 괜찮나?”
난 잠시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훑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혹시 내상이라도 입었을지 모를 노릇이었다.
나야 높은 성벽에 있었기에 비교적 쉽게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녀는 해자 너머에서 바로 신성력의 빛을 마주했을 테니까.
“으흠. 본녀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완전 멀쩡하다.”
보란 듯이 팔짱을 끼며 가슴을 쭉 피는 카렌의 소매 사이로, 옅은 화상자국이 보였다.
말은 안 해도 막 빛에 닿았을 당시에는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눈물 좀 빼먹었을 게 분명했다.
이렇게 보니 눈가에 눈물자국이 조금 남은 거 같기도 했다.
아마 지금도 꽤 쓰라릴 테지.
쿡-
“읏! 뭐, 뭐하는 거냐!”
나는 깜짝 놀라 인상을 팍 찌푸리고선 뒤로 물러서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반대쪽 손으로 흉터를 살살 쓸어내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역시 아직 고통이 채 가시지 않은 듯했다.
“무리하지 말고 마차에서 쉬고 있어라.”
“으… 알았다.”
난 삐죽 입술을 내밀며 자리를 뜨는 카렌을 보고선, 옅은 미소와 함께 등을 돌렸다.
“형님, 짐은 이미 전부 짐칸에….”
“알고 있다. 곧 갈 테니, 너도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도록.”
사락-
“릴리아나.”
“응? 뭐야, 떠난 거 아니었어?”
그렇게 발라크마저 마차로 보낸 나는, 다시금 릴리아나와 반테온이 남은 막사로 돌아왔다.
“약 좀 받을 수 있을까 하는데.”
“약? 흐응… 네가 다친 건 아닌 거 같은데. 혹시 그 용족 공주님 때문인가?”
나는 놀림거리를 찾은 아이처럼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은근히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선,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치이… 재미없긴. 그런데 약이라면 그냥 밖에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됐을 텐데.”
“원래부터 보초를 서는 인원을 제외하곤 아직 도시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뭐, 그렇다면야.”
스륵-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렴.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자, 따라와.”
난 전보다 더 단단히 홀린 황태자의 볼을 어루만지며 달래고선 막사를 나서는 릴리아나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내가 보급 받은 거라도 가지고 나올 테니까.”
이윽고 제 막사를 찾아 들어간 그녀를 보며, 기다리는 동안 잠시 반테온에게서 얻어낸 정보들을 되뇌었다.
현재 가제프가 있는 곳은 대륙 북쪽.
투마왕과 혈마왕의 군세가 향한 수인들의 땅 아래, 마랑왕의 수족들이 날뛰고 있는 제국 북부를 막기 위해 떠났다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건, 적어도 남쪽 전선으로 향한 엘프 여왕을 처리하는 동안에는 녀석을 마주칠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더구나 제국에 남아있는 전력 자체도 많이 부족한 상황.
지금쯤 열심히 수도에서 하메른으로 달려오고 있을 지원군을 제외하고서는, 더 이상 변수가 될 만한 것이 없었다.
딱 하나를 제외하곤 말이다.
“용사….”
카르네몬에서부터 대충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용사 시절 겪었던 미래가 개변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때가 되긴 했지만, 아직 시간이 조금은 남아있었을 터.
하지만 반테온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교단의 성물이 밖으로 나왔다고.
“뭐야,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그 여자가 그렇게 많이 다쳤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약은 고맙군. 그럼 이만 가보겠다.”
어느새 막사에서 나온 릴리아나로부터 구급상자를 받아든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마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뜨겁네, 뜨거워. 왕자님께서 지극정성이구만.”
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보다 내 얼굴이 많이 어두웠던 모양이군.
날 배려해서 답지 않게 농담까지 던져주다니.
“안에서 기다리다했더니, 왜 밖에 나와 있나.”
“아, 형님! 오셨습니까.”
“금방 온다더니 조금 늦었구나, 에릭. 그런데 손에 그건 무어냐.”
금방 마차 앞에 도착해 짐칸 앞을 서성이고 있던 두 사람을 마주한 나는, 들고 있던 구급상자를 카렌에게 내밀었다.
“안쪽에 연고가 있을 거다. 괜히 나중에 흉 지지 말고 발라라.”
원체 회복력이 좋은 뱀파이어나 늑대인간들이라면 모를까.
용족인 그녀라면 그대로 흉터가 남을 수도 있었다.
조금만 멀리 떨어져 있었어도 그런 걱정은 없었겠지만, 마땅히 빛으로부터 몸을 가릴 게 없는 평야에서 사제들의 보조를 받은 교황의 신성력을 받아버렸으니…
어찌 보면 저만큼으로 끝난 게 다행이었다.
아마 전날에 미리 경고해주지 않았더라면, 당분간은 어디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다쳤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으, 으응… 고맙다.”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약을 받아드는 카렌을 뒤로하고, 곧바로 마부석에 올랐다.
“다들 꾸물거리지 말고 타라. 남쪽 전선까지 가는 데만 일주일이다. 이번만큼은 늦으면 우리가 먹을 공적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마룡왕과 악마왕.
단순히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인 용족과, 압도적인 화력의 마법을 자랑하는 악마족이 뭉친 군세.
현재 넷으로 찢어져 분투하고 있는 마왕군들 중에선 가장 강한 전력을 가진 쪽이었다.
반면에 그들을 막아서고 있을 연합의 개들은 엘프 여왕을 위시로 한 엘븐하임의 일부와, 비장의 패를 하나 잃어버린 성녀뿐.
지금 교황과 그 아래의 사제들이 그쪽으로 합류하기 위해 도망치고 있긴 하겠지만, 당장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는 전력 차였다.
물론 메리엘 그년이 성역을 선포하고 틀어박힌다면 또 모를 일이었지만…
히히힝-!
카렌과 발라크가 짐칸에 오른 것을 확인하고 고삐를 당긴 나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마차를 보며 조용히 심란한 마음을 다스렸다.
교단의 성물.
그는 분명 이방인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열쇠 중 하나인, 여신의 손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얼핏 세계수의 가지로 만들어진 엘븐하임의 보물들처럼 고목을 재료로 만들어진 그 지팡이는, 본디 사용자의 신성력을 기하급수적으로 올려주는 법구라고 들었다.
물론 용사 시절에도 이미 소환을 위한 제물로 바쳐졌기에 직접 본적은 없었지만, 가능하면 언젠가 교단 본청을 찾을 때에 빼앗아 막아보려고 했거늘.
이미 한 달도 더 전에 꺼내버렸을 줄이야.
“한 방 먹었군.”
이제 와서 찾는다고 한들 그게 남아있을 리 없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이방인들이 그 빌어먹을 저주를 받고서 하나둘씩 소환되고 있겠지.
그래봐야 전장에 나설 정도가 되려면 못해도 앞으로 석 달은 걸리겠지만 말이다.
그마저도 마왕들의 앞에 설 정도가 되려면 최소 5년은 지나야 될 테고.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들을 불러들이는 장소가 변했다는 것이었다.
본래 내가 정신을 차렸던 그 벌판이 아닌, 제국의 수도에 있는 지하 감옥이라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릭! 에릭!”
“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기에 몇 번을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는 거냐.”
한참 고민에 잠겨있다 짐칸에서 들려온 외침에 정신을 차린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하군. 네 말대로 잠시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말이다.”
“그런가. 그보다 노숙은 어디서 할 생각이냐. 슬슬 밤이 늦었다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나는 거의 점심 때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달이 중천 넘어선 하늘을 보며, 머쓱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또 혼자 밤새 마차를 모실 생각은 마십시오, 형님. 일전에 쉴 땐 쉬어야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알겠다. 그럼 슬슬 묶을 자리를 알아보도록 하지.”
마침 옆으로 숲이 지나고 있으니, 적당히 동굴 같은 거라도 하나 찾아서 들어가면 되겠지.
“에릭, 혹시 무언가 고민이라도 있는 거냐? 그렇다면 마음 편히 한 번 털어놔 보거라. 본녀가 다 들어주겠다.”
그렇게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마차를 몰던 나는, 어딘가 걱정스러운 카렌의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해줘서 고맙군. 그 마음만 받겠다.”
“으음, 매번 그렇게 너무 혼자서만 일을 짊어지려고 하지 말거라. 조금은 남을 믿고 짐을 좀 덜어보는 게 어떻겠느냐.”
짐이라.
난 그녀의 따뜻한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이내 동굴을 찾아 마차를 멈춰 세웠다.
“괜찮다. 그보다 어서 들어가 쉬도록 하지. 내일도 부지런히 움직여야할 테니 말이다.”
“뭐… 괜찮다니 다행이구나.”
아쉽지만 내 짐은 어디다 덜고 말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복수.
이건 어디까지나 나를 위한 복수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