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사락-
“오셨습니까, 형님.”
시체들의 흡혈을 마치고 두 사람이 있는 막사로 돌아온 나는, 밖에서 나를 맞으며 천막을 젖히는 발라크를 보며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준비는 다 마쳤나?”
“예, 거의 끝났습니다.”
좋아.
자신 있는 대답에 만족스러운 얼굴로 안쪽에 들어선 나는, 양 손목이 밧줄에 묶여 허공에 매달린 반테온을 마주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손이 참 많이 가는 녀석이군.
우선 깨워야…
“음? 릴리아나는 어디 갔지?”
“아, 그게… 형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무언가 준비할 게 있다고 잠시 나갔습니다.”
“준비?”
그냥 옆에서 반테온이 멀쩡한 판단을 내릴 수 없도록 적당히 매혹만 걸어주면 되거늘.
대체 무슨 준비가 따로 필요하단 말인가.
“알았다. 그럼 녀석이 돌아오기 전에 먼저 이놈부터 깨워야겠군.”
짜악!
“으….”
손바닥을 쫙 펼쳐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황태자의 뺨을 올려붙인 나는, 옅은 신음을 내뱉는 그를 보며 반대쪽 손을 들어올렸다.
생각보다 깊이 기절했나 보군.
하긴 그러니 남문에서부터 도시를 가로질러 북문을 빠져나올 때까지 가만히 늘어져 있었겠지.
짜악-!
“아윽….”
처음보다 좀 더 힘을 주어 날린 덕일까.
나는 전과 달리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보며, 다시 한 번 손을 올렸다.
짜아악-!
“아악!”
난 세 번 만에 정신을 번쩍 차리며 짧은 비명과 함께 눈을 뜬 반테온을 보고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손바닥을 펼쳤다.
“자, 잠깐….”
쩌억-!
“아, 아아아악! 허, 허기…!”
“이런, 턱이 빠졌나 보군. 그러게 왜 움직였나. 가만히 있었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텐데.”
괜히 한쪽만 두 번 때리면 섭섭할 거 같아서 짝을 맞추려했건만, 녀석이 맞기 직전 고개를 들어버리는 바람에 턱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심문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귀찮게 만드는군.
저대로 두었다간 무어라 대답하더라도 알아먹기가 힘들 테니, 하는 수 없이 원래대로 끼워 맞춰주기로 했다.
뚜둑-
“허으, 허억… 네, 네놈.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런 짓을!”
“알다마다. 반테온 프리디리히. 제국의 황태자. 인류의 빛이라고 했던가? 웃기지도 않는군. 이런 구역질나는 쓰레기가 빛이라니, 인간 놈들은 하나 같이 머리가 돌아버리기라도 한 건가.”
“뭐, 뭣… 이 더러운 마족 놈이 감히… 큭!”
빠진 턱을 맞춰주기가 무섭게 같잖은 협박을 해오는 놈의 머리채를 잡아 눈을 마주친 나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넌 지금 포로도 뭣도 아니야. 그저 네놈의 주둥이를 통해 들을 이야기가 있으니, 그 알량한 목숨을 잠시 동안 늘려준 것뿐이지.”
“하, 하하… 하하하하하!”
나는 갑자기 숨이 넘어갈 듯 미친 것 마냥 웃음을 터트리는 녀석을 보며, 살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희망의 끈을 놓고 실성해버리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아직 눈동자가 살아있었다.
“하아, 하…. 흐으. 멍청한 놈. 협상의 기본이 안 돼있구나. 그러면 내가 입이라도 뻥끗할 거 같나? 무얼 해도 결국 죽을 뿐이라면, 넌 내게서 아무것도 들을 수 없을 거다.”
“흐음….”
그런 이유였나.
안타깝게 됐군.
어떻게든 제가 알고 있는 정보와 목숨을 같이 저울에 올려보려는 속셈인 듯했지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걱정해주는 건가?”
“흐흐. 충고일 뿐이다. 자, 그럼 다시 얘기를….”
뻐억-
“크웁!”
고작 그걸로 자기가 주도권을 잡았다 생각한 건가.
나는 주제도 모르고 씨익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멋대로 말을 붙이는 반테온을 보고선, 말없이 녀석의 복부를 걷어찼다.
“어윽, 으… 어, 어째서….”
“쓸데없는 충고였다. 네가 무얼 하든 살아서 제국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내게서 벗어나더라도, 더 독한 놈한테 넘겨져 모진 고문 속에 서서히 죽어갈 뿐이다.”
나 또한 용사 시절 도적으로 활동하며 보고 배운 것이 있기에 남 부끄러운 실력은 아니었지만, 고문을 업으로 삼는 기술자들에 미칠 바는 아니었다.
“네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네 어미의 뱃속에서 웅크려 자라고 있을 적의 이야기들까지 하나하나 전부 털어놓게 될 거다.”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보름에 걸쳐 천천히 살을 저미는 녀석들의 손에 들어갔다간, 아무리 대단한 정신력을 가진 놈이라도 일주일을 채 버티지 못하고 술술 입을 열기 마련이었다.
겉은 번지르르해도 속에선 악취가 풍기는 이런 쓰레기 따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제발 죽여 달라 소리를 지르게 되겠지.
“자, 그럼 시작하지. 가능하면 여기서 숨기지 말고 다 말하는 게 좋을 거다. 그러면 적어도 시체로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만일 그러지 못한다면….”
“흡….”
나는 내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고선 흠칫 몸을 떠는 반테온을 향해 삐뚜름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빈센트. 네 그 벌레 같은 형제와 같은 신세를 지게 되겠지.”
“비, 빈센트… 그럼 네놈이!”
쩌억-
“어윽!”
“지금부턴 내 물음에 대답하는 것 외에는 말을 아끼는 게 좋을 거다.”
스릉-
난 눈을 번뜩이며, 조용히 단검을 뽑아들어 녀석의 손톱 아래에 대었다.
“생각보다 스무 개가 그리 많진 않더라고.”
* * *
스륵-
“금방 준비하고 오겠다더니, 조금 늦었군.”
천막이 걷히는 소리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조용히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아으으윽….”
양 손톱이 모두 떨어져나가고 발톱 또한 엄지가 모두 떼어진 녀석을 뒤로하고 등을 돌린 난, 평소와 다른 모습의 릴리아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걸 좀 더 서큐버스다워졌다고 해야 하나.
착 달라붙어 몸매가 드러나긴 했어도 가릴 곳은 다 가리던 가죽옷은 어디 가고, 아슬아슬하게 바뀐 옷차림에 계속 보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미안, 막사가 멀어서 시간이 좀 걸려버렸네.”
“…뭐냐, 그 차림은.”
“응? 후후. 왜, 흥분할 것 같아? 별건 아니고 이 녀석, 생각보다 품고 있는 마력이 상당하더라고.”
그런가.
요컨대 매혹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과감한 의상으로 바꿔 입고 왔다는 얘기인 것 같았다.
서큐버스들의 매혹도 어디까지나 저들의 마력을 이용한 기술이니만큼, 상대와의 격차에 따라 그 성공률이 갈리곤 했으니까.
물론 지금은 그리 대단한 걸 바라는 건 아니고 적당히 혼을 빼놓을 정도만 되어도 충분했기에 굳이 그렇게까지 나설 필요는 없었지만, 놈을 제대로 홀린다고 해서 손해 볼 건 또 없었다.
“그보다 벌써 애 상태가 말이 아니네. 생각했던 것보다 심문이 훨씬 거칠었나 본데. 무슨 원한이라도 있었어?”
“글쎄, 모르겠군. 딱히 거칠게 다룬 것도 없는 거 같은데.”
“흐응… 뭐, 됐어. 아무리 중요한 포로라도 결국 이놈을 잡아온 건 너니까. 어떻게 써먹든지 그건 다 네 마음이겠지.”
나는 좁은 눈으로 나를 살피다 이내 시선을 거두고 반테온의 앞에 서는 그녀를 보며,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한 대로, 특별히 용사 시절의 원한 때문에 녀석을 험하게 굴리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저 계속되는 질문에 자꾸만 거짓을 내뱉기에, 약속했던 대로 손톱과 발톱을 하나씩 들어낸 것뿐.
“아으윽… 말했, 말했는데….”
난 고통에 몸부림치며 억울한 목소리로 항변하는 놈을 보고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기 딴에는 내 쪽에서 진위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적당히 꾸며낸 이야기로 넘어가려고 한 모양이었지만, 다른 마족들이라면 몰라도 내게는 통하지 않았다.
지금껏 물어본 질문들은 죄다 용사 시절에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정보들뿐이었으니까.
“입만 연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너도 느끼고 있을 텐데. 사실을 말해라. 계속해서 같잖은 수작을 부리려들지 말고.”
“흐으으….”
세 번.
열다섯의 질문 중에 그가 사실을 고한 건 고작 그게 전부였다.
앞으로 남은 발톱은 여덟 개.
가능하면 이 안에서 끝을 볼 수 있으면 좋겠군.
딱히 넘어가도 다음은 손가락을 하나씩 분지르면 그만이었기에 상관없었지만, 이 이상 계속 시간을 잡아먹는 건 사양이었다.
괜히 꾸물거리다가 테네스, 그년이 혹시나 다른 놈들에게 먼저 붙잡혀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으니까.
그 빌어먹을 엘프 여왕도, 도망친 교황도 그리고 눈앞의 황태자도 모두.
망할 연합의 개자식들을 죽이는 건 전부 내 몫이었다.
놈들의 목은 절대, 그 누구에게도 넘겨줄 수 없었다.
“후후.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기만 하면 안 되지. 자, 아이야.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얘기를 털어놔 보렴. 잘 대답하면 무사히 나갈 수 있게, 이 누나가 도와줄 테니까.”
나는 살포시 황태자의 볼을 어루만지며 턱을 끌어당겨 시선을 맞추는 릴리아나를 보며, 잠시 뒤로 물러났다.
“아….”
“그래, 착하지. 사실대로만 이야기 한다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물론 돌아갈 수도 있을 거고.”
난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점점 눈이 풀리기 시작하는 반테온의 모습에,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끝났군.
“좋아, 그럼….”
방금 전까지 이어졌던 모진 고문 탓일까.
나는 금세 무너져버린 황태자를 품에 안고서 슬그머니 이쪽을 돌아보는 릴리아나를 향해,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질문을 전했다.
“가제프는 지금 어디 있니?”
“가제프….”
생각보다 효과가 확실하군.
아무리 여러모로 상황이 갖춰졌다고는 해도, 단번에 심층의식까지 지배 아래 둘 줄이야.
마력이 없는 잡병이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깊게 매혹당하는 경우는 드문 일일 텐데.
그녀 또한 못 본 사이 실력이 꽤 붙은 모양이었다.
“가제프 경은….”
난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무미건조하게 입을 여는 그를 보고선, 품에서 적을 것을 꺼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