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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121화 (121/200)

제121화

“교황은 어떻게 됐지?”

마침 동문을 정리하고 다가오는 게르둠과 마주친 나는, 자리에 보이지 않는 교황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그를 보고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신을 추스르고 봤을 땐 이미 해자를 넘어간 터라 놓치고 말았습니다.”

“…뱀파이어. 너라면 쫓을 수 있었을 텐데.”

난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살피며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훑는 게르둠을 보고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빌어먹을.

움직이는 석상이나 다를 바 없는 주제에, 눈치 한번 빠르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큰 상처 하나 없이 멀끔한 내 몸을 보고선 그냥 놓아줬으리라 지레짐작하는 건지.

뭐 어느 쪽이 됐든 딱히 상관은 없었다.

핑곗거리야 이미 차고 넘쳤으니까.

“제 능력을 높이 사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사제들뿐만 아니라 성기사들까지 교황을 둘러싸고 있어 쉽사리 쫓을 수 없었습니다.”

“방금 그 빛 무리에 당해 남쪽 전력의 절반이 쓸려나갔다고는 해도, 아직 해자 앞에 진을 치고 있던 병사들도 많이 남아있었을 텐데.”

“놈들이 또 다른 수를 숨겨놓았을지도 모를 노릇이지 않습니까. 더구나 그 길로 황태자 녀석까지 호위들을 이끌고 도망치려고 한 터라, 쉽사리 도시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발라크!”

“예, 형님.”

나는 여전히 탐탁지 않은 표정의 그를 보며, 기절한 황태자를 둘러멘 발라크를 불러 녀석을 잠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혹시라도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전부 놓칠 바에는, 제대로 한 놈이라도 붙잡는 것이 나으리라 판단했습니다.”

“으음….”

난 결국 나지막이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주억이는 마왕을 보며, 조용히 입가를 씰룩였다.

애초에 아무리 교황을 놓쳐버렸다고는 해도, 그건 내가 문책 받을 거리가 아니었다.

엄연히 따지자면 나는 투마왕 휘하의 독립대를 이끌고 있는 입장이었으니까.

어디까지나 황태자를 잡기 위해 이곳 전장을 도우러 온 것뿐.

더구나 따로 남문을 맡은 지휘관 또한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굳이 누군가 책임을 떠안아야 된다면, 그쪽이 받아야 함이 옳았다.

눈앞의 가고일과 그 사천왕들 또한 그를 알고 있기에, 여기서 무어라 더 책망하지는 못했다.

“게르둠 님. 지금이라도 제가 가서 잡아 오면 되겠습니까?”

“…됐다. 이미 한참 전에 해자를 넘었다 했으니, 이제 와서 따라가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나. 에릭이라고 했던가? 고생했다.”

나는 제 옆에 선 사천왕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돌아서는 게르둠을 보고선,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은 황태자를 들어 올렸다.

의심 많은 성격과 달리 겉으로는 여전히 딱딱하군.

뭐, 그 또한 가고일들의 특성이라면 특성이겠지.

“형님, 제가 들겠습니다.”

“괜찮다. 그보다 뒤에 기사 놈들 시체 좀 들고 오도록.”

어쨌든 약식이긴 하지만 보고도 마쳤겠다, 이제 마음 편히 뒷정리를 마치고서 이 빌어먹을 황태자 놈을 심문하면 될 것 같았다.

난 황급히 대신 짐을 맡으러 오는 발라크를 뒤로 보내고선, 막사로 돌아가기 위해 천천히 북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제, 사제들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이 멍청아! 조금 전에 못 들었어? 그 망할 놈들 전부 남문으로 도망갔다고! 사제들뿐만이 아니야. 아까 보니까 기사들도 몇몇 뒤로 빠져서는….”

촤악-

그렇게 중간중간 앞길을 막는 제국군을 하나둘씩 처리하며 성문을 향해 나아가기를 몇 분.

기사들의 시체를 잔뜩 이고서 따라오고 있는 발라크 덕에 시선이 쏠릴 만한데도, 대부분 전혀 우릴 눈치 채지 못했다.

하긴 당장 남문과 동문이 모두 뚫려버린 데다가 북문에서도 쉴 새 없이 적들이 들이닥치고 있는 판국에, 어디 주변을 살필 여유가 있겠는가.

크그그긍-

“어머. 우리가 제일 늦었나 보네.”

나는 막 근처에 다다르기가 무섭게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는 북문을 보며, 그 사이로 유유히 걸어 들어오는 릴리스를 바라봤다.

“후후. 수고했어. 그럼 이만 잘 가렴, 아이들아.”

“크윽, 그으으으….”

툭-

난 제대로 매혹에 걸린 듯 그녀의 명령대로 성문을 열고선 제 목을 졸라 자살하는 제국군들을 보고선, 식은땀을 주륵 흘렸다.

얼굴이 새하얗게 뜬 채 고꾸라진 시체가 대충 어림잡아도 기백은 되어 보였다.

물론 대부분이 기사조차 되지 못한 평범한 병사들에 불과했지만, 저 두터운 성벽을 사이에 두고서도 이렇게까지 매혹을 써먹을 수 있다니.

역시 괜히 공성에 있어 제 능력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는 게 아니었다.

“남쪽은 모두 정리가 끝났나 보네. 서쪽이랑 동쪽은 아직인 거 같고. 먼저 가는 거야?”

“예. 심문할 녀석이 있어서 말입니다.”

“흐응… 그놈이 황태자, 맞지? 조금 전에 보니까 게르둠, 그 돌덩이 표정이 멀리서 봐도 말이 아니던데. 아무래도 교황은 결국 놓친 모양이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해자를 넘어서 말입니다. 뒤따라 도망치려는 쥐새끼라도 붙잡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나는 게르둠과 마찬가지로 영 석연치 않은 눈빛으로 이쪽을 훑는 릴리스를 보며,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가 됐든 지금껏 어련히 알아서 잘해줬으니까, 굳이 더 캐묻진 않을게.”

“감사합니다.”

마왕은 가만히 나를 지켜보다, 이내 진한 미소를 띠며 마저 걸음을 옮겼다.

“아, 릴리스 님.”

“응? 무언가 부탁할 일이라도 있니?”

그에 마찬가지로 다시 발을 떼려던 난, 잠시 그녀를 멈춰 세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 한 명, 심문에 써먹을 인원을 좀 데려갈 수 있겠습니까?”

“안 될 건 없지. 혹시 따로 원하는 아이라도 있니? 아니면… 아! 그러고 보니 조금 있으면 도착할 때가 된 거 같은데.”

후웅-

“어머, 마침 딱 맞춰서 왔네.”

“음?”

나는 말을 하다 말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싱긋 미소 짓는 릴리스를 보고선, 그녀를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릴리스 님. 나가 있던 모두, 전달을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난 날개를 펄럭이며 모습을 드러낸 릴리아나를 보고선,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아무래도 가능한 어떻게든 늦지 않게 하메른의 공략에 끼어보고 싶어, 꽤나 서두른 모양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미 상황은 거의 다 끝나있었지만 말이다.

“그럼 이제 에릭을 따라가서 좀 도와주겠니?”

“네?”

겉으로 티를 내고 있진 않아도 평소보다 빠르게 부풀었다 들어가는 가슴을 보아하니 상당히 무리해가면서까지 먼저 돌아온 듯했지만, 그녀에게 주어지는 일은 바라던 성문 공략이 아닌 심문 보조였다.

뭐 그래도 이미 부스러기밖에 남지 않은 도시에 남아 자잘한 전공을 주워 먹는 것보단, 차라리 나를 따라 황태자를 심문하는 것이 더 좋은 일일 터였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왕의 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며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따라와라.”

“너… 으, 알았어.”

나는 무어라 말을 꺼내려다 이내 주먹을 꾹 쥐며 말없이 따라붙는 릴리아나를 데리고선, 곧바로 성문을 통과해 다리를 건넜다.

릴리스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마냥 귀여워 보였는지, 별말 없이 뒤에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 건데?”

“별로 어려울 거 없다. 그저 이놈을 심문하는데 매혹을 좀 걸어줬으면 해서 말이야.”

“뭐? 이게 누군데.”

촤악-

금세 주둔지에 도착해 빈 막사를 찾아 입구를 젖힌 나는, 메고 있던 녀석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황태자다. 차기 황제.”

“…화, 황태자?”

난 짐짓 놀란 표정으로 반테온과 나를 번갈아 살피는 릴리아나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라. 가능하면 심문할 준비도 미리 마쳐놓으면 더 좋고. 금방 일 하나만 마치고 돌아오겠다. 발라크!”

“예, 형님.”

나는 멍한 얼굴로 기절한 황태자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녀석을 안에 두고서, 밖으로 나와 발라크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내려놔라. 그리고 혹시 황태자 녀석이 깨어날지 모르니, 돌아가서 허튼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잘 감시하고 있도록.”

“알겠습니다. 먼저 가서 심문의 준비도 마쳐놓도록 하겠습니다.”

근처 막사로 들어와 이고 온 시체들을 모두 바닥에 내려놓은 발라크는, 내 명령에 고개를 주억이고선 곧장 릴리아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자, 그럼 이제 먼저 보상을 받아볼까.

“흐흐.”

난 막사 한구석에 가득 쌓인 시체를 보며, 천천히 이를 드러냈다.

콰악-

[황태자의 호위기사, ‘에문트’를 흡혈했습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체력이 ‘1’ 증가합니다.]

[황태자의 호위기사단장, ‘벨트람 아리스만’을 흡혈했습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힘이 ‘2’ 증가합니다.]

[체력이 ‘1’ 증가합니다.]

“프흐….”

금세 흡혈을 마치고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낸 나는, 퍽 아쉬운 표정으로 바닥에 남은 시체들을 내려다봤다.

그래도 조금은 건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열댓 명 되는 시체들 중에 고작해야 둘이 전부인가.

뭐, 그만큼 이젠 능력치가 오를 대로 올랐다는 얘기겠지.

[에릭 가이오스]

[뱀파이어]

[레벨 : 72]

[힘 : 198][민첩 : 202]

[체력 : 195][마력 : 159]

앞으로 조금.

비록 용사 시절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머잖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더구나 이제는 전에 없던 혈마법까지 가지고 있으니, 단순히 강함만으로 따지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파삭-

바닥에 남은 시체를 즈려밟으며 이만 막사를 나선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황태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이제 네가 가진 모든 걸 토해낼 시간이다, 반테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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