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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119화 (119/200)

제119화

“오늘이야말로 성벽을 넘는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왕님께서 함께하신다!”

이른 새벽.

해자 앞으로 나온 나는, 먼저 성벽으로 돌격하는 병사들을 보며 잠시 주변을 살폈다.

어제 사제들이 꽤나 무리를 해줬으니, 이번엔 비교적 수월하게 성문에 닿을 수 있을 터.

교황이나 대주교 정도 되면 모를까.

나머지는 고작 하루, 그것도 저녁부터 끽해야 한나절쯤 휴식을 취했다고 해서 신성력을 모두 회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평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신성력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가뜩이나 모자란 전력에 전날 죽어버린 병사들의 빈자리까지 채워야함을 생각하면, 길어야 해가 중천에 뜰 때쯤 슬슬 무너지기 시작할 터였다.

“막아! 일주일… 아니, 엿새만 더 버티면 된다!”

“크윽, 이 빌어먹을 놈들. 도저히 성벽에 붙을 수가….”

어떻게든 전력의 부재를 숨겨보려는 걸까.

나는 어제보다 더욱 거세게 몰아붙여오는 화살비와 마법들을 보며, 조용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렌. 엄호해라.”

“일단 성벽에 붙을 때까지만 봐주면 되는 건가?”

“부탁하지.”

난 고개를 주억이며 천천히 단검을 빼들었다.

교황이 어느 틈에 사제들을 이끌고 도망칠지 모르니, 될 수 있는 한 빨리 성벽에 올라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형님, 저는….”

“원하는 대로 움직여라. 오늘부턴 마왕님들도 전력으로 나설 것이라 하셨으니, 이쪽으로는 별로 시선이 모이지 않을 거다.”

오늘 밤이면 일전에 적의 보급을 끊기 위해 보냈던 인원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할 테니, 그전에 최대한 하메른의 전력을 깎아놓고 단번에 몰아칠 속셈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들이 북문과 동문으로 몰리는 만큼, 이곳 남문 쪽은 성벽을 공략하기가 비교적 수월할 터였다.

“예, 알겠습니다.”

투웅-

나는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곧장 앞으로 나서는 녀석을 보며, 슬슬 마법이 완성된 듯 등 뒤에 선명히 느껴지는 마력의 파동에 슬금슬금 발을 내딛었다.

“모두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져라.”

번쩍-

“큭, 눈이….”

“대, 대규모 마법이다! 마법사, 마법사들은 어서 방어 마법을 펼쳐라!”

마법진의 완성과 함께 뿜어져 나온 빛이 주변을 에워싸며, 순간 시위를 당기고 있던 병사들의 눈을 때렸다.

덕분에 생긴 그 찰나의 공백.

난 그 짧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단숨에 해자를 건너 성벽 앞에 다다랐다.

쿠구구구-

“저, 저게 무슨….”

저번처럼 작은 박쥐로 나뉘어 벽을 타고 오르려던 나는, 위에서 점차 뜨거워지는 열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금 바닥으로 내려왔다.

과연 괜히 마왕의 핏줄이 아니라는 건가.

난 저 높은 하늘 위에 걸린 구름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불덩어리를 보며, 용사 시절 한창 악명 높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미치광이 붉은 용.

비록 그때처럼 분노에 잡아먹혀 이성을 잃은 채 마구잡이로 연합의 상공을 들쑤시진 않았지만, 본디 수년은 더 지나야 부리고 다녔을 마법을 벌써 완벽히 다루고 있었다.

그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돌을 깎으며 마력의 컨트롤을 다듬은 덕이겠지.

“마, 막아! 어떻게든, 마력을 다 쏟아부어서라도 막아야 한다!”

나는 길게 꼬리를 그리며 성벽 위로 떨어지는 시뻘건 운석에, 슬그머니 성문에 착 달라붙었다.

엄호를 해달라고 했지 다 부숴버리라고는 안 했는데.

뭐 그래도 이 또한 나쁘지 않았다.

크기를 보아하니 멀쩡히 성벽에 닿긴 불가능해보였지만, 저걸 막아낸 이후에 분명 커다란 틈이 생길 테니까.

콰아아아앙-!

“크읏….”

난 결국 마법사들이 모여 펼친 방벽 위로 내리꽂힌 운석을 보며, 그 충격에 흔들리는 몸을 간신히 바로잡았다.

삐이이-

커다란 굉음 이후 밀려오는 이명에 눈살을 찌푸리며 박쥐로 흩어진 나는, 매캐한 연기를 뚫고 들어가 무사히 성벽 위에 다다랐다.

“콜록! 콜록! 크으… 다, 다들 괜찮나?”

“괘, 괜찮습니다! 다행히 방어 마법을 모두 뚫진 못한 모양입니다.”

예상대로 어떻게든 운석을 막아내긴 했지만, 그 후폭풍으로 일어난 충격과 연기까지는 어찌하지 못했는지 모두 혼란에 빠져있었다.

푹-

“끄윽….”

한마디로 누군가 날뛰기 딱 좋은 환경이라는 소리였다.

“뭐, 뭐야? 웬놈이… 커억!”

“저, 적이다! 적이 성벽에….”

쩌억-

나는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 가능한 빨리 주변에 있는 녀석들을 치워 자리를 만들었다.

연기가 걷히고 이후 여유롭게 성벽 아래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선, 될 수 있도록 많은 아군이 같이 성벽 위를 헤집어줘야만 했다.

“저, 저기다!”

“빌어먹을 마족 놈! 그리 쉽게 성문을 내줄 성싶더냐!”

난 머잖아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한 안개를 보며, 하나둘씩 모여드는 병사들을 향해 조용히 손을 들어올렸다.

벌써 이렇게 몰려들면 곤란하지.

뒤늦게 성벽 위로 올라온 마왕군의 수는 이제 끽해야 스물 남짓.

못해도 그 열 배는 되는 인원이 합류하기 전까진, 놈들이 가까이 다가오도록 둘 수 없었다.

“죽어!”

나는 안개가 전부 걷히기도 전에 대검을 붕붕 휘두르며 달려오는 거대한 체구의 기사를 보고선, 천천히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 더러운 마….”

핏-

방금 전 바닥의 시체들로부터 흘러나온 핏물로 만들어낸 검붉은 창이, 단번에 놈의 가슴을 꿰뚫었다.

툭-

“돌격!”

“어떻게든 놈들을 떨어트려! 이 이상 성벽 위로 올라오게 둬선 안 된다!”

난 힘없이 고꾸라지는 시체 뒤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병사와 기사들을 보며, 크게 팔을 휘둘렀다.

촤악-

“커억!”

“아, 아아아악!”

이윽고 바닥에서 튀어나온 손이 그들을 힘껏 내치며, 단숨에 십 수 명에 달하는 인원이 성벽 아래로 튕겨져 나갔다.

혈마법.

일전까지는 오로지 내 피를 이용해 단순히 피로 무기를 만들어 던지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꽤 익숙해진 덕에 남의 피로도 이런 재주를 부릴 수 있었다.

“으, 으으….”

나는 어느덧 전부 걷힌 안개 사이로, 벌벌 떨며 다가오지 못하고 창 끝으로 이쪽을 겨누고만 있는 병사들을 마주했다.

“형님!”

“발라크.”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나는, 뒤늦게 성벽을 오른 발라크를 보며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저도 돕겠습니다.”

“따라올 필요 없다. 그보다는 다른 녀석들과 함께 좀 날뛰어줬으면 좋겠군.”

“그, 그렇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난 꾸벅 고개를 숙이고선 성벽 위로 올라온 병사들과 합류해 적을 도륙하는 그를 보며, 다시금 발을 움직였다.

“거, 겁먹지 마라! 어차피 도망칠 곳은 없다. 저 빌어먹을 마족놈에게 죽든, 이대로 도망치다 성벽 아래로 떨어져죽든 마찬가지야!”

“그, 그래 맞아. 게다가 이쪽으로 오는 건 고작해야 한 명이잖아. 다, 다들 돌격해!”

“와아아아악!”

나는 함성을 지르며 대형을 갖추고 달려오는 병사들을 무시한 채, 슬쩍 성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알폰스, 어디 있나.

슬슬 사제들을 데리고 뭐든 수를 쓸 때가 됐을 텐데.

“죽어어어!”

카앙-

“크윽!”

푹-

“허윽….”

어느새 바로 옆에 도착한 병사가 휘두르는 검을 가볍게 쳐내고 놈의 숨통을 끊은 나는, 천천히 하나씩 정리해나가며 빠르게 성문 근처를 훑었다.

“이 빌어먹을 괴물자… 컥!”

“…찾았다.”

“컥, 컥….”

뚜둑-

호기롭게 달려든 녀석들 중 마지막 한 놈의 목을 쥐어 부러트린 난, 드디어 성벽 아래에서 사제들을 모아놓고 무언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교황을 발견하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상황이 이리 급박한데도 제대로 된 결계를 펼치기는커녕 아래에서 신성력 하나 느껴지지 않은 것이, 아무래도 지금 움직이려는 것 같았다.

하긴 어제는 적당히 간을 보며 몸을 사리던 마왕들이 작정하고 북문과 동문을 두드리고 있는 지금이라면, 적어도 이쪽 남문으로 나갔을 때 그들을 마주칠 일은 없을 터.

그리고 방금 전에 성벽 위로 아주 강력한 마법이 떨어졌으니만큼, 당분간은 그만한 위력의 마법을 연달아 펼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 거겠지.

“빌어먹을, 대체 사제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결계, 결계는 언제 펼치는 거냐고!”

불쌍한 것들.

나는 저들이 버려진 줄도 모른 채 악착같이 버티며 사제들의 지원을 기다리는 병사들을 보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들을 훑었다.

“그럼 다들 출발한다!”

“예, 교황 폐하.”

나는 머잖아 성벽 위로 남문 앞에 진을 치고 있던 마왕군의 절반가량이 올라왔을 때쯤,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사제들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크그그긍-

“뭐, 뭐야?”

“갑자기 바닥이….”

이윽고 커다란 진동과 함께 성벽이 흔들리며, 싸우고 있던 제국군과 마왕군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슥 훑었다.

“저기 봐! 아래쪽에….”

“서, 성문이….”

난 굉음과 함께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 성문을 보며, 그 사이로 얼른 움직이기 시작한 교황과 사제들을 내려다봤다.

“발라크! 가능한 멀리 떨어져라!”

“예?”

곧 그들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빛 무리를 발견한 나는, 곧바로 저 멀리서 기사 한 명의 몸을 반으로 갈라버리고 있던 발라크를 찾아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성벽의 높이가 있으니만큼 휩쓸린다고 해서 크게 다치진 않겠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조심하는 편이 낫겠지.

번쩍-!

나는 발라크를 데리고 자리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폭발하며 성벽 위까지 감싼 새하얀 빛을 보고선, 조용히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좋아, 저 정도면 충분히 알아서 도망칠 수 있겠군.

“아, 알폰스으으으으!”

난 뒤이어 머지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노성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감히 배신을!”

황태자.

나는 악귀 같은 표정으로 활짝 열린 남문을 노려보는 그를 보고선, 곧바로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교황은 몰라도 넌 절대 놔줄 수 없지.

오늘 여기서, 너는 반드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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