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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118화 (118/200)

제118화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그래, 발라크. 너도 고생 많았다.”

이른 저녁부터 시작된 싸움은, 해가 지고 둥근 달이 중천을 넘어서야 겨우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확실히 성벽에 달라붙는 것부터 쉽지 않았던 저번과는 달리 꽤 분전하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하루 만에 하메른을 무너트리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남문 쪽에서 성벽 위의 병사들을 도륙하며 시선을 끄는 동안, 다들 기어코 해자를 건너 성벽을 오르고야 말았으니까.

비록 급박한 상황에 결국 사제들이 신성력이 퍼부어 하는 수 없이 물러나고 말았지만, 그만큼 무리를 했으니 더는 성벽을 둘러싼 결계가 예전 같지 않을 터였다.

이대로라면 아마 길어야 나흘.

교황이 더욱 빨리 하메른을 포기하고 도망친다면, 당장 내일도 하메른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 터였다.

“카렌, 너도 빨리 들어와서 쉬어라. 내일은 이른 아침부터 거세게 몰아치게 될 테니.”

“음, 알았다. 이것만 끝내고 금방 들어갈 테니 걱정하지 마라.”

나는 전에 가르쳐준 방법대로 열심히 마력을 컨트롤하고 있는 카렌을 지나쳐, 조용히 막사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카르네몬을 벗어난 이후로 특별히 할 일이 없을 때면 항상 손에 나뭇조각이나 커다란 돌멩이 같은 걸 쥐고 있던 덕인지, 그렇지 않아도 썩 쓸 만했던 실력이 이제는 제법 나조차도 감탄할 정도가 됐다.

“형님. 혹시 하메른의 공략이 끝나면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다음 말이냐?”

이 다음이라.

내일을 위해 이만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려던 나는, 발라크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알폰스와 후작을 모두 살려 보내 계획대로 교단의 입지를 흔든다 해도, 교황이 사제들을 데리고 하메른을 미끼로 도망쳤다는 사실이 수도에 닿을 때까진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특별히 계획이 없으시다면, 이대로 마왕님들을 따라 전쟁에서 공적을 올리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흐음….”

나는 이어지는 녀석의 말에 나지막이 침음을 흘리며, 좁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확실히 따로 계획이 있는 게 아니라면, 발라크의 말마따나 이대로 본대에 붙어 이동하는 게 정석이었다.

하지만 여태껏 광산을 무너트려 드워프를 처리할 적을 제외하곤 군말 없이 나를 따르기만 했던 녀석이 굳이 이런 얘기를 꺼냈다는 건,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였다.

“발라크. 혹시 요새 원하는 대로 싸우지 못해서 그러는 거냐?”

난 당장 오늘만 해도 그가 내 명령에 따라 카렌을 지키느라 앞선에서 날뛰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앞서 나가 싸우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발록들의 특성을 고려하면, 슬슬 몸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 없어졌다고 해도 딱히 놀라울 건 없었으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형님.”

하지만 그런 내 예상과는 달리, 발라크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퍽 놀라운 얘기를 꺼내 들었다.

“전쟁이 끝난 뒤의 일도 생각하셔야지 않겠습니까.”

“…마왕군이 중간계를 모두 정복한 이후 말이냐?”

“예, 형님.”

저 빌어먹을 연합 놈들을 전부 처리하고, 중간계가 마왕군의 손아귀에 떨어진 뒤의 일이라.

물론 나 또한 그에 대해 생각해놓은 바가 없던 건 아니었지만, 당장 고민하기엔 꽤나 먼 훗날의 일이라 접어두고 있던 참이었다.

사락-

전쟁 이후.

어찌 보면 남들이 봤을 때 썩 불경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기에, 발라크는 슬며시 천막을 끌어 입구를 막고선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형님이라면 지금처럼 독립대로서 이렇게 전공을 쌓기만 하셔도 금방 사천왕까진 오르실 수 있겠지만, 더 높은 곳을 바라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천왕보다 더 높은 곳.

그 말은 즉, 지금 내게 마왕이 되라 종용하는 것이었다.

“벌써 1급 훈장을 둘이나 하사받으신 건 확실히 전군의 모두가 우러러볼 일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두의 경외를 사실 순 없을 겁니다.”

혼자서는 절대 마왕이 될 수 없다.

단순히 개인의 강함으로만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면, 당장 일곱 자리 중에 못해도 둘은 바뀔 수 있을 터였다.

카르카쉬와 악투스의 사천왕들 중 한둘은, 적어도 게르둠과 릴리스와는 호각 그 이상을 벌일 수 있을만한 실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둘이 각 종족의 지지와 경외를 사고 있기에, 마왕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전쟁이 완전히 기울어버리기 전에, 병사들의 입에서 타고 내릴 무훈들을 새겨놓으심이….”

“그만.”

발라크가 무엇을 걱정하고 이런 직언을 남기는지는 알고 있었다.

쉽게 말해 훗날 마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만한 세력을 일굴 기틀을 다지라는 얘기였다.

이름난 장수의 아래에는 훌륭한 병사들이 모이는 법.

뱀파이어인 나로서는 본래대로라면 체르페슈를 제치고 혈마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따로 그만한 세력을 이룬다면 스스로 마왕임을 천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창 전쟁 중인 지금, 그에 보다 빨리 닿을 수 있는 길은 명백히 후자였다.

체르페슈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선, 그를 받들고 있는 여러 가문들의 세를 줄이고 내 쪽으로 복속시켜야만 했으니까.

그건 단순히 전장에서 이름을 울리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일이었다.

“먼 미래의 일이다. 벌써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우선 눈앞에 닥친 것부터 잘 처리하도록.”

“형님….”

오늘 낮, 막사 앞에서 릴리스가 걱정을 내비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당장은 중간계를 정복하기 위해 모두가 손을 잡고 있었지만, 마왕군은 어디까지나 그 동일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만들어진 연합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모든 게 끝나고 나면 다시금 일곱으로 갈라져, 보다 많은 이권을 챙기기 위해 서로에게 창날을 돌리려들 터.

실제로 그 때문에 용사 시절, 명백히 전력의 우세를 차지하고 있던 마왕군이 쉽사리 연합을 상대로 승기를 잡지 못하기도 했었다.

어떻게든 전력을 다해 부딪치면 이길 수는 있겠지만, 그러려면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으니까.

아무리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이후에 제 몫을 챙길 수 있을 만한 전력이 남아있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특히나 아직 마계에 온건파의 잔당들이 건재하니, 더더욱 서로 눈치만 볼 수밖에.

헌데 그런 상황에 이 땅덩이를 나누어 먹을 마왕이 하나 더 늘어난다니.

절대 그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걱정할 거 없다. 필요하다면 내 알아서 그리 할 테니.”

당장 용족인 카렌과 발록인 그를 제외하고서도, 악마족인 아이시스와 서큐버스인 릴리아나. 그리고 늑대인간인 셀레스트까지.

높으신 분들이 보기엔 퍽 끈끈한 연결고리를 가진 우리가 슬슬 눈에 밟히기 시작한 입장에서, 굳이 그들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괜히 그랬다가 쓸데없이 위에서 견제라도 들어오기 시작하면, 당장 그 빌어먹을 연합 놈들을 처리하는데 에로사항이 꽃피게 될 테니 말이다.

“…예, 알겠습니다.”

나는 무어라 입을 열려다 조용히 고개를 주억이는 발라크를 보며, 다시금 구석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확실히.

전쟁이 끝난 이후의 일은 제쳐두더라도, 하메른을 함락시키고 나서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해선 조금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거 같았다.

[에릭.]

“음?”

그렇게 조용히 눈을 감고서 고민에 빠진 찰나.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슬며시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렸다.

[에릭, 거기 있어?]

난 머리맡에 둔 짐들 중에 수정구 한쪽에 불이 들어온 것을 보며, 곧장 그를 집어 들었다.

“그래. 셀파스트, 무슨 일이지?”

[아, 다행이네. 없으면 또 언제 연락할까 했는데.]

나는 손에 종이 뭉치를 들고 펄럭이며 씨익 미소 짓고 있는 셀파스트를 보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 나가 있을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눈치를 보며 막사를 나서려는 발라크에게 괜찮다 손짓하고선 정보를 옮겨 적을 준비를 마친 난, 다시금 수정구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말해 봐라.”

[흐흐. 듣고 놀라 자빠지지 말라고. 우리 애들이 정말 어렵게 구해온 특급 정보니까 말이야.]

난 한차례 숨을 크게 들이키고선 이내 정보를 전하는 그를 보며, 과연 그 말대로 놀라 자빠질 만한 이야기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정말이냐?”

[그래. 진위 여부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믿을만한 녀석들이 셋이나 직접 확인했으니까.]

테네스 엘븐하임.

나는 엘프 여왕이 직접 남쪽 전선으로 향한다는 소식에 놀란 눈을 깜빡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다. 정보 고맙군.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한 번쯤은 꼭 손을 빌려주도록 하지.”

[뭐, 그럴 필요는 없어. 그냥 네 쪽에서 제대로 한바탕 휘저어주기나 하라고. 그래야 나도 돌아다니기가 편하니까.]

난 이만 손을 흔들며 수정구를 집어넣는 녀석을 보며, 조용히 옮겨 적은 정보들을 다시 살폈다.

벨제붑과 카르카쉬를 막기 위해 출발한 엘븐하임의 군세에 대한 내용의 끝에는, 내가 바라마지 않는 얘기가 한 줄 짧게 적혀져 있었다.

[엘프들의 그랜드 마스터, 에리스는 출전하지 않음.]

다른 누구도 아닌 여왕이 직접 나서는 전선에 에리스가 호위로 따라붙지 않다니.

하다못해 홀로 먼저 또 다른 곳을 지원하러 나가 있는 상태였다면 모를까, 놈들의 최대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녀석을 엘븐하임에 그대로 두고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용사 시절처럼, 그들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때에는 말이다.

“흐흐….”

더구나 테네스를 따라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군세의 규모 또한, 엘븐하임의 전력이라 부르기에는 살짝 민망한 정도였다.

그 말은 즉, 내 예상보다 더욱 빠르게 엘프들의 사이가 갈라지고 있다는 소리겠지.

“발라크.”

“예, 형님.”

“하메른을 정리하고, 우린 남쪽으로 간다.”

“남쪽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면….”

“음.”

나는 발라크의 물음에 고개를 주억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테네스를, 엘프 여왕을 잡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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