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곧장 막사 안으로 들어선 나는, 두 마왕에게 교황의 꿍꿍이를 제외하고 영주성에서 들었던 모든 이야기를 보고했다.
“흐응… 그러니까, 지금 저 안에 병력이 반밖에 안 남았다는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나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하메른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릴리스를 보고선,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보아하니 당장이라도 한바탕 해볼 생각인 거 같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이렇게 지루한 대치를 계속하고 있을 이유가 없겠군.”
“예. 오히려 강하게 밀어붙여야 합니다. 적들의 입이 줄은 만큼, 모자란 군량에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을 테니 말입니다.”
난 천천히 고개를 주억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가고일, 반마왕 게르둠을 보고선 그를 따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뱀파이어. 그 정보는 확실한 거겠지? 릴리스한테 전해 듣길, 지금 이렇게 포위망을 유지한 채로 놈들을 말려 죽이자는 작전도 네 입에서 나온 거라고 하던데. 하루 만에 갑자기 방향을 완전히 반대로 틀어버리다니.”
“상황이 그렇게 바뀌었으니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만큼 저들이 무리를 한 거지요. 물론 들키지 않았더라면 일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슬금슬금 의심의 눈초리를 비추는 그를 향해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이며, 천천히 말을 줄였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야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없으리라 생각했기에, 저들 나름대로 리스크를 감수하고 도박을 건 거겠지.
물론 아주 맨땅에 머리를 박은 것은 아니고, 이쪽이 한 번도 성벽을 넘지 못했으니 그들의 전력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바가 없으리라 생각하고 결단을 내린 것이리라.
아쉽게도 그 도박은 실패로 끝나버릴 테지만 말이다.
“뭐 망설일 것도 없지 않아? 후후. 그렇지 않아도 마침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느라 좀이 쑤셔오던 차였는데, 잘됐네.”
짜악-!
난 고혹적인 미소와 함께 허리춤의 채찍을 뽑아 드는 릴리스를 보며, 슬그머니 뒤쪽을 살폈다.
카렌, 발라크.
방금 마왕의 입에서 나온 말을 통해 대충 상황을 파악한 듯, 곧장 막사 근처에 잠시 내려놓았던 장비를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릴리아나.”
“예, 릴리스 님.”
“모두한테 전하렴. 오늘부터 저 성벽을 넘을 때까지, 휴식이란 없다고.”
“네? 하지만….”
막사 안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방금전과 전혀 다른 지시를 내리는 그녀를 보고선 당황한 릴리아나는, 대체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이쪽을 슥 훑었다.
“더불어 보급대를 저지하러 갔던 인원들도 전부 다시 불러들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가만히 어깨를 으쓱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흐응. 확실히 그게 좋겠네. 이제 와서 놈들의 보급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으니까.”
“그, 그럼….”
“그쪽으로 빠졌던 인원들까지 모두 돌아오라고 그러렴. 릴리아나. 발이 빠른 애들로 스무 명 정도 각출해서, 알았지?”
“…예, 릴리스 님.”
난 릴리스의 말에 무어라 입을 뻥긋이다 힘없이 고개를 주억이고 떠나는 릴리아나를 보며, 속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성벽의 공략에서 빠진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하긴 보급대를 막으러 간 인원들을 열심히 찾으러 다니는 것보단 성벽을 공략하는 쪽이 더 공적을 세울 기회가 많을 테니, 그 부분이 못내 아쉬운 거겠지.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마왕이 직접 내리는 명을 함부로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후후. 귀여운 아이야, 그렇지?”
“예?”
“어머. 아닌 척하긴. 온건파의 한 축이었던 네 숙부를 쳐낸 그 귀한 공을, 저 아이에게 조금 떼어줬잖니? 카르카쉬, 그놈한테 직접 부탁까지 해가면서 말이야.”
나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저 멀리 터덜터덜 걸어가는 녀석과 나를 번갈아보는 릴리스를 보며, 어색한 표정으로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장난이야, 장난. 무언가 바라는 게 있으니 그렇게 밀어줬던 거겠지. 아니면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던가. 너무 걱정하지 말렴. 저 아이가 아스모데우스라고 해서 내가 모질게 대할 일은 없을 테니. 다만….”
난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다 지그시 눈을 좁히는 그녀를 보며, 순간 훅 돋아오르는 소름에 식은땀을 주륵 흘렸다.
“너무 여기저기 손을 벌리고 다니진 말렴. 용족들도 악마족도 늑대인간도 발록도 너희 뱀파이어도 우리 서큐버스들도. 모두를 한곳에 모을 수는 없단다.”
나는 꽤 가라앉은 목소리로 충고를 건네는 릴리스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충고 감사합니다.”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고 그런 말을 꺼냈는지, 대충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카렌, 아이시스, 셀레스트, 발라크, 릴리아나.
다들 이번 전쟁을 통해 빠르게 치고 올라가고 있는 혜성들이 전부 나를 중심으로 연결고리가 있으니, 머잖은 미래에 무언가 불안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지금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겠지만, 중간계를 모두 손아귀에 넣었을 즈음엔 그들 모두 지난 전쟁의 젊은 영웅들이 되어있을 테니까.
그런 녀석들이 혹여나 허튼 생각을 가지고 한데 뭉치기라도 한다면, 그들 입장에서도 꽤 귀찮은 일이 되리라 염려하고 있는 거겠지.
저들 주전파가 카르카쉬와 악투스를 중심으로, 그렇게 온건파를 몰아내고 자리를 잡았듯 말이다.
“릴리스 님, 게르둠 님! 전군 정렬했습니다!”
“후후. 그래.”
릴리스는 금방 준비를 마치고 집결한 병사들을 보며, 이만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이제 저 지긋지긋한 성벽을 넘을 때가 왔구나.”
그녀는 다리 건너 하메른의 성벽을 가리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엔 전처럼 호락호락하게 막히지 않을 거다. 이른 새벽, 저 두터운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이 반이나 빠져나갔으니까.”
나는 이쪽을 훑으며 조용히 미소를 짓는 릴리스를 보고선, 나지막이 고개를 주억였다.
절반이나 되는 적이 도시를 비웠다는 말에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하던 수군거림은,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두 훈장 아래 조용히 파묻혔다.
펄럭-
“자, 모두. 나를 위해 길을 열어주겠니?”
와아아아아-!
이윽고 마왕이 날개를 펼치며 하메른을 향해 그 길쭉한 손가락을 뻗자,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댕- 댕- 댕-
동시에 성벽 위에서도 맑은 종소리가 여럿 울리며, 자리를 지키던 병사들의 발길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날개가 없는 자들은 모두 북문의 다리로, 나머지는 산개해서 사방을 조이도록!”
나는 순식간에 해자 앞까지 다다른 병사들을 보며, 조용히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머잖아 교황이 도망쳐 나올 때를 대비해, 다른 녀석들이 이곳을 채우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요새 나름대로 우리 이름이 많이들 퍼지기 시작한 모양이니, 내가 이쪽을 맡고 있다면 어느 한 곳에 전력이 치우치지 않도록 다들 알아서 다른 성문을 맡으러 가겠지.
“카렌. 넌 여기서 엄호해라. 발라크. 혹시 모르니 카렌의 옆을 지키도록.”
“알았다. 뒤는 걱정 말고 마음껏 날뛰도록 해라.”
“예, 형님.”
촤르륵-
난 조용히 고개를 주억이며 스태프를 들어올리는 카렌을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으며 이만 박쥐로 흩어져 해자를 건넜다.
쐐액-
하늘 위를 시커멓게 메우는 화살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빠르게 해자를 건넌 나는, 성벽에 닿기 직전 위에서 흩뿌려지는 액체에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모습을 드러냈다.
치이이익-
“음….”
나는 방금전까지 작은 박쥐들로 나뉘어있던 곳에 떨어진 뜨거운 기름을 보며,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혼자서는 쉽지 않겠군.”
난 이윽고 나를 향해 쏘아진 수십 개의 화살과 마법을 보며, 조용히 단검을 꺼내들었다.
카가가각-
콰아앙-!
곧바로 검기를 길게 뽑아 화살들을 쳐낸 나는, 뒤이어 날아드는 마법에 옆으로 몸을 날리며 슬쩍 뒤를 훑었다.
“다들 겁먹지 마! 가고일들이 한차례 화살을 받으면, 할 수 있는 한 마법을 쳐내면서 천천히 성벽에 달라붙는 거야!”
아직 아무도 해자조차 건너지 못했지만 그래도 당장 성문 앞에 달라붙은 내 쪽에 꽤 시선이 몰린 덕인지, 다들 순조롭게 조금씩 성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쐐액-
“흡!”
카앙-!
“제, 젠장! 어느새… 빨리 떼어내! 절대 아무도 성벽 위로 올라올 수 없도록 막으란 말이야!”
그렇게 앞에서 가능한 시선을 끌며 버티기를 몇 분.
나는 중간 중간 뒤에서 성벽 위를 향해 날아드는 카렌의 마법과 어느덧 해자를 반쯤 건넌 병사들 덕에, 금세 성벽 위를 목전에 둘 수 있었다.
“기, 기름! 기름이라도 뿌려, 어서!”
“겨, 결계는? 제대로 펼쳐져 있는 거지?”
푹-
“흐, 흐억! 어, 언제….”
금방 성벽을 두르고 있는 결계까지 통과해 바닥을 밟은 나는,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피부에 거칠어진 숨을 훅 내쉬며 겁에 질린 병사들을 슥 훑었다.
계속 결계 안에 들어와 있는데도 생각보다 버틸만 한 걸 보아하니, 교황이 생각보다 더 여력을 아끼기로 한 모양이었다.
“다, 다들 겁먹지 마라! 그래 봐야 이제 한 명이다. 빨리 둘러싸서 처리해!”
“그, 그래! 다른 놈들이 더 올라오기 전에 처리하면….”
“흐흐.”
당황도 잠시.
금방 정신을 차리고 이쪽을 둘러싼 병사들을 보며 스산한 웃음을 흘린 나는,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죽어!”
“이 빌어먹….”
서걱-
“을….”
툭-
“히, 히이익!”
나는 빨간 실선이 그이며 천천히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지는 놈들의 상반신을 보며, 천천히 시체들을 지나 걸음을 옮겼다.
알폰스, 어디 있나.
내가 왔다.
어서 나와라.
원하는 대로, 친히 길을 열어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