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116화 (116/200)

제116화

영주성 내부는 복도를 돌아다니며 경비를 서는 몇몇 기사들을 제외하고선, 대부분 텅텅 비어있었다.

입을 줄일 겸 보급대의 호위를 위해 절반이나 되는 병력을 도시 밖으로 내보낸 데다가, 그나마 남은 녀석들도 대부분 성벽 위에 올라 마왕군의 동태를 살피고 있어서 그런 거겠지.

“그럼 말씀하신 대로 사제들에게 신성력을 아껴놓으라 전하면 되겠습니까?”

“아니, 되었다. 그건 이 노구가 직접 이르도록 하마. 너는 여기서 잠깐 쉬고 있거라. 혹 황태자나 후작이 찾아오면 잠시 지친 아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고 전하거라.”

“예, 교황님.”

덕분에 교황이 머무는 바로 옆 방에 자리를 잡고서, 성녀 후보를 처리할 기회를 엿보기를 몇 분.

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알폰스를 보고선, 조용히 단검을 빼들었다.

끼익-

어느 정도 발소리가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복도로 나온 나는, 곧바로 굳게 닫힌 옆방 문고리를 잡았다.

달칵-

“교황님? 혹시 무언가 두고 가신 물건이라도… 컥!”

콱-

곧장 문을 열고 들어가 그녀를 마주한 나는, 교황이 앉았던 자리를 정리하는 듯 분주히 움직이던 녀석의 목을 확 잡아챘다.

“그래. 널 두고 갔더군.”

“케엑, 켁….”

“열심히 준비한 패를 제대로 써먹어 보기도 전에 이렇게 흘리고 다니면 쓰나. 나 같은 불한당이 와서 채가면 어떡하려고 말이야.”

쿵-

그대로 놈을 들어 올려 벽으로 밀어붙인 난, 점점 새파래지는 얼굴로 내 손을 떼어내려 발버둥 치는 그녀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 그럼 널 어떻게 해야 그 얍삽한 늙은이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까.”

그냥 아무렇게나 죽여도 하메른을 버리는 쪽으로 결심이 서긴 하겠지만, 그래서는 재미가 없었다.

본래 이곳에서 놈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던 것만큼, 상황이 바뀌어 살려 보내주게 됐더라도 그 욕심 많은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지는 꼴은 한 번 확인해보고 가야지 않겠는가.

물론 시간이 그렇게 널럴한 편은 아니라 두 눈으로 직접 보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녀석이 공들여 준비한 물건이 망가진 것에 분노하는 것쯤은 들어볼 수 있을 터였다.

항상 자기는 여신님의 충직한 종이라며 대외적으로는 화를 꾹꾹 참아왔던 노인네의 괴성이라.

“흐흐….”

이거 참 기대되는군.

시익- 식-

“음?”

그렇게 차오르는 기대감에 부르르 몸을 떨며 스산한 웃음을 흘리던 나는, 곧 죽을 듯 숨이 넘어가는 녀석을 보며 슬며시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케흑, 켁! 허으….”

“미안하군. 하마터면 쉽게 보내줄 뻔했어.”

이렇게 죽어선 표정을 살릴 수가 없지.

먼저 죽인 뒤에 상황을 연출하는 것과 애초에 그렇게 죽은 시체의 모습은, 처음 마주했을 때의 충격이 전혀 다른 법이었다.

가능한 처절하게.

그 늙은이의 입에서 자그마한 비명이라도 끄집어내기 위해선, 그 정도 준비는 필수였다.

“치, 침입… 흡!”

“안 되지, 안 돼. 죽지 말고 잠깐 숨 좀 고르라고 놔줬더니, 바로 이렇게 사람을 부르려 들다니.”

목을 놔주자마자 곧바로 경비를 부르려는 그녀의 움직임에 입을 콱 틀어막은 난, 보란 듯이 입 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괜한 발버둥을 치는군.

우웅-

그렇게 단검을 빙글 돌리며 더는 함부로 입조차 뻥끗할 수 없도록 목부터 가볍게 베고 시작하려던 나는, 순간 가슴께가 서늘해지는 느낌에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쓸데없는 짓을.”

뻐억-

그녀의 손에서 조금씩 형체를 갖춰가며 빛을 내뿜는 신성력에 눈살을 팍 찌푸린 나는, 그대로 잠시 날을 거두고선 녀석의 복부를 올려 쳤다.

“커….”

짧은 비명이 입을 꾹 틀어막고 있던 손 틈을 비집고 나왔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부들부들 몸을 떨며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를 보며, 조용히 다시 날을 세웠다.

“히이, 히….”

쪼르르-

이윽고 망설임 없이 성대를 베려던 난, 제 배를 끌어안으며 옅은 숨소리를 내뱉던 놈에게서 흘러나오는 물소리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푸흡! 큭, 크흐흣!”

“아, 아으….”

바닥을 적시는 투명한 물줄기에 그만 웃음을 터트린 나는, 고통과 수치심에 몸부림치는 녀석의 모습에 이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팔을 들어 올렸다.

촤악-

투둑-

단번에 그녀의 목을 베어낸 나는, 날카로운 고통에 눈을 크게 뜨면서도 소리 없이 입을 뻥긋거리는 녀석의 모습에 조용히 메리엘을 떠올렸다.

분명 이쯤이었지.

쯔즈즉-

지난번 카르네몬에서 그 빌어먹을 년의 얼굴에 내놓았던 멋들어진 상처의 위치를 되짚으며, 천천히 단검을 움직였다.

살을 가르고 파고드는 섬뜩한 촉감과 불쾌한 소리. 그리고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에, 머잖아 그녀의 눈이 하얗게 뒤집혔다.

서걱-

곧 기절한 듯 게거품을 물며 고개를 툭 떨군 녀석을 벽에 붙이고서 목을 벤 나는, 힘없이 늘어진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선 그 위에 머리를 장식했다.

“훌륭하군.”

만족스러운 얼굴로 교황을 맞이할 작품의 준비를 끝마친 나는, 마지막으로 시체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묻히고선 천천히 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 * *

“고생하셨습니다, 교황님.”

“허허, 고생은 무슨.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네.”

“예. 혹시 마족 놈들에게서 무언가 움직임이 보인다면, 곧바로 아이들을 보내 상황을 이르도록 하겠습니다.”

하메른을 돌며 각 성문의 방비를 맡은 대주교들에게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온 교황은, 자신을 배웅한 주교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만 문고리를 잡았다.

달칵-

“…음?”

그렇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려던 그는, 살짝 열린 틈새로 훅 풍겨져 나오는 비릿한 냄새에 눈살을 확 찌푸리며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아멜리아!”

문득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느낌에 성녀 후보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확 열어젖힌 그는, 이윽고 눈앞에 들어온 풍경에 입을 쩍 벌리며 주먹을 꾹 쥐였다.

“이, 이 천인공노할! 도대체 어떤 개자식이 이런 끔찍한 짓을!”

“교황님? 무슨 일이십… 흐, 흐어억!”

늙은 교황의 입에서 나온 고성과 상스러운 소리에 화들짝 놀라 황급히 걸음을 돌린 주교는, 그의 어깨너머로 보인 끔찍한 모습에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그만 바닥에 엎어졌다.

터벅-

“교, 교황님! 위험합니다!”

시체.

알폰스는 잘려 나간 제 머리를 받힌 채 다소곳이 무릎 꿇고 있는 시체 위에 무언가 적혀있는 것을 보고선, 천천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능한 여신은 자신의 개조차 지키지 못하는가.]

비릿한 혈향 사이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톡 쏘는 냄새에 코를 틀어막은 그는, 피로 적힌 글귀를 보고선 분노에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잡아 와….”

“예?”

“어떤 빌어먹을 놈인지, 당장 잡아 오란 말이다!”

“예, 예!”

타다닥-

“허억, 헉….”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마, 마침 잘됐… 후욱. 교황님께서 머무시는 방에 시, 시체가….”

교황의 노성에 황급히 고개를 주억이며 방을 나선 주교는, 마침 소란을 듣고 모여든 경비들을 보고선 곧장 상황을 읊었다.

“시, 시체 말씀이십니까?”

“당장, 당장 범인을….”

“침입자다! 침입자가 들었다!”

주교의 말에 다급히 교황의 방을 찾아 시체를 확인한 경비들은, 곧바로 주변을 영주성 구석구석을 살피며 침입자가 들어온 흔적을 찾았다.

“아멜리아….”

뒤늦게 다시 시체를 살피며 흰자밖에 남지 않은 눈을 살며시 덮어준 교황은, 그녀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상처를 보고선 조용히 이를 갈았다.

“메리엘.”

성녀.

그 무능한 계집이 카르네몬에서 달고 온 것과 똑같았다.

“누구냐.”

그는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벽에 쓰인 글귀를 다시금 올려다봤다.

무능한 여신.

이는 여신의 가장 충직한 종인 자신을 향한 불경이기도 했다.

끼이익-

“교, 교황님….”

뒤이어 반쯤 열린 문을 밀며 방으로 들어온 기사를 마주한 교황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더듬는 그를 보고선 꿈틀거리는 입술을 떼었다.

“도대체 누구냔 말이다!”

“그것이….”

결국 아멜리아를 죽인 범인은 찾지 못했다.

교황은 후에 지하수로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시체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대주교들을 방에 불러들였다.

“교황님, 부르셨습니까.”

“하메른을 버린다.”

“예?”

“후작, 그 멍청한 것이 서문 밖에 지하수로와 이어진 비밀통로가 있다는 사실을 꽁꽁 숨기고 있더군.”

“어, 어찌 그런….”

희망이 없었다.

교황은 회의실에서 바짝 엎드려 용서를 구하던 무능한 영주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리 마음을 굳혔다.

* * *

“어떤 빌어먹을 놈인지, 당장 잡아 오란 말이다!”

“크흐흐흐.”

무사히 일을 마치고 곧장 집무실 뒤편으로 돌아온 나는, 벽을 넘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노성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만 걸음을 옮겼다.

“돌아간다.”

“예, 형님.”

“고생 많았다, 에릭.”

그대로 카렌과 발라크를 이끌고 지하수로를 지나 비밀통로로 나온 나는, 경비들의 눈을 피해 곧장 본대로 합류했다.

이제 남은 건 안에서 들었던 내용을 보고하고 열심히 북문을 치는 것뿐이었다.

성녀 후보의 죽음으로 교황 또한 완전히 마음을 정했을 테니, 성벽을 둘러싼 결계도 전처럼 그렇게 견고하진 않을 터.

이제 길어야 사흘이면 성벽을 넘을 수 있을 터였다.

“형님, 그 후작은….”

“걱정하지 마라. 녀석을 살려 보내는 건 알아서 내가 알아서 설득할 테니.”

만일 두 마왕이 납득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지금 캐내 온 정보들만 하더라도, 충분히 그의 목숨쯤은 요구할 수 있을 테니까.

황태자만 여기서 잡을 수 있다면, 제 영지를 잃은 영주 하나쯤 살려 보내는 것이 뭐가 그리 대수겠는가.

“추, 충성! 만나서 영광입니다, 에릭 님!”

“그래. 그럼 안내 좀 부탁하지.”

“예!”

나는 그새 또 내 이름이 퍼졌는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맞이하는 병사를 보며, 조용히 그를 따라 마왕들이 모인 막사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