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끼익-
수로를 타고 알폰스의 뒤를 쫓기를 몇 분.
나는 다행스럽게도 저택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방으로 들어서는 소리에, 가능한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귀를 기울였다.
“교황님, 회의는 잘 마치셨습니까?”
안에 누가 더 있나.
나는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저 의심 많은 교황 하나만 하더라도 쉽사리 잡을 수 있을지 미지순데, 암살하려는 입장에서 적의 머릿수가 늘어봐야 좋을 게 없었다.
그나마 말소리를 들어보니 여럿이 아닌 하나라 다행이었다.
그런데 교황과 독대가 가능할 만한 인물이라.
여럿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지만, 꽤 앳된 목소리를 보아하니 대충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분명 언젠가 지금의 성녀가 쓸모를 다할 때를 대비해 준비해놓은 다음 성녀 후보 중 하나였었지.
전에는 메리엘이 물러나질 않아 적어도 내가 죽을 적까진 계속 후보인 채로 교단본청에 남아있었지만, 이번에는 카르네몬에서의 일 때문에 교황이 미리 데리고 다니며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황태자는 아직 어리고 후작은 어리석더구나. 믿을 구석은 수도에서 출발한 원군뿐이다. 허나 이래서야 그때까지 버틸 수나 있을지 모르겠구나. 메리엘과의 연락은 닿았나?”
“그것이… 성녀님께서도 지금 남쪽에서 다른 마왕군들의 진격을 막고 계신 터라, 아무래도 합류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하십니다.”
남쪽이라.
벨제붑이 이끄는 악마족과 마룡왕의 군세가 있는 곳인가.
“쯧. 쓸모없는 것. 카르네몬에서도 제멋대로 도망쳐 나와 여신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더니만, 이번에도 도통 도움이 안 되는구나. 갈데없는 어린 고아를 데려다가 여신님의 사랑으로 보살펴 길렀거늘. 어찌 그조차 제대로 헌신하지 못한단 말이냐.”
그러나, 확실히 그쪽이라면 지원을 바라긴 무리였다.
본래 제국과 큰 마찰 없이 조용히 들어가 살던 드워프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곳이니만큼, 동부와 마찬가지로 북부와 서부에 비해 전력이 조금 떨어지는 곳이었으니까.
당연히 알폰스 또한 그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렇게 트집을 잡는다는 건, 이미 메리엘을 쳐내기로 마음먹었다는 거겠지.
용사 시절 그에게 직접 버려진 성녀의 처우에 대해 들은 바가 있던 나로서는, 절대 녀석이 원하는 대로 일이 흘러가게끔 둘 수 없었다.
지상에 여신의 말씀을 전할 사자가 둘이나 있어선 그 권위가 퇴색되어버린다고 했던가.
때문에 앞전 성녀는 그 신성력을 폐하고 묻는다는 모양이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그 빌어먹을 년한테 그런 편한 죽음은 허락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조금 무리하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서 이 늙은이를 잡고 갈 필요가 있을 거 같았다.
“허면 저희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일단은 막아보자꾸나. 이쪽도 아주 승산이 없는 건 아니니.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나쁠 건 없겠지. 상황을 봐서 아이들에게 신성력을 아껴놓으라 일러두는 것도 좋겠구나. 남문과 동문의 다리를 끊으면 그쪽의 포위망은 자연스레 얇아지게 될 테니, 놈들이 북문의 다리로 밀려들어오는 틈을 잘 노린다면 우리는 아무도 잡히지 않고 지날 수 있을 게다.”
잠깐, 도시를 미끼로 쓰고서 도망치겠다고?
조금씩 기회를 엿보다 그들을 죽여 버리려고 했던 나는, 알폰스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얘기에 놀란 눈으로 급히 계획을 변경했다.
“그, 그 말씀은 황태자님과 하메른을 버리고….”
“어디까지나 만일을 대비하자는 게지.”
난 성녀 후보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슬쩍 한 발 뒤로 빼는 녀석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는 물론 후작과 하메른을 지키는 병사들을 모두 버리고 빠져나가겠다니.
그림이 그려졌다. 이거 잘만 하면 교단의 입지를 완전히 실추시켜버릴 수 있을 거 같았다.
남문과 동문.
굳이 도망친다면 마왕군이 몰려있는 북문과 가장 떨어져있는 남문을 통해 빠져나가려고 들겠지.
교황은 물론 그를 따라 나온 실력 있는 사제들이 많이들 머물고 있으니만큼, 정말 그들의 목숨만 챙기려든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계획이었다.
“여신님의 종인 우리가 제 쓰임을 다하지 못하고 이런 곳에서 스러져서야 되겠느냐. 혹 염려대로 그런 상황이 온다 한들, 이는 그들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다. 제국의 안녕과 여신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어린양들의 희생을 말미암아 더 나은 길을 찾아가는 게지.”
나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성녀 후보를 설득하는 노인네의 추레한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이만 벽에서 귀를 떼고 몸을 돌렸다.
“이제 녀석을 잡으러 가는 건가?”
“아니, 생각이 바뀌었다. 우린 사제들이 하메른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다.”
“예? 형님,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분명 교황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에릭. 그런 거물을 여기서 잡아들여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도망칠 수 있도록 돕겠다니. 대체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
난 당황한 표정으로 곧장 나를 말리는 카렌과 발라크를 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런 거물이 황태자와 도시를 버리고 도망치겠다니 놓아주겠다는 거다. 제 딴에는 놈들을 미끼로 쓰더라도 뒤탈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겠지. 앞서 벨라노르를 지키다 포로로 잡힌 3황자의 생사가 불분명한 걸로 미루어봤을 때, 마찬가지로 하메른이 함락당한다면 그곳을 지키고 있던 황태자 또한 마냥 무사히 제국으로 돌아오진 못할 테니까.”
한마디로 여기서 황태자가 죽는다면, 그리고 하메른의 영주인 후작마저 시체가 되어 입을 다문다면 도시를 버린 교황에게 책임을 지울 사람이 없다는 얘기였다.
사제들끼리 홀로 남문을 통해 도망쳐버린다면, 남아있는 전력으로는 절대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만에 하나 병사 몇이 기적적으로 포위를 뚫고 살아남아 제국에 이 사실을 알린다고 해도, 그들의 주장만으로는 결코 교황에게 죄를 물을 수 없었다.
가뜩이나 사방에서 몰려드는 마왕군을 막아내기에도 손이 모자란 이 상황에, 어찌 일개 병사들의 말만 가지고 교황을 벌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남아있는 놈들 중에 황태자는 잡고, 후작은 살려 보낸다.”
하지만 하메른의 영주인 후작의 말이 가지는 무게는 달랐다.
물론 이 또한 마찬가지로 교황에게 큰 책임을 물을 수는 없겠지만, 교황이 황태자를 미끼로 도시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사실만큼은 빠르게 제국 전체로 퍼져나갈 터였다.
그러면 제아무리 교황이라고 한들, 더는 교단에서 마음대로 입김을 행사할 수 없게 될 터.
“그렇군. 적들이 서로 갈라지게 만들 속셈이구나.”
“바로 그거다. 제국과 교단 사이의 신뢰는 물론, 어쩌면 교단 자체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지.”
카르네몬에서 있었던 메리엘의 실책 이후, 교황이 대놓고 본청의 성녀후보를 제 수행으로 삼고서 돌아다니고 있는 상황이었다.
교황과 성녀의 사이가 얼마나 틀어져 있을지는 딱히 알아볼 필요도 없겠지.
지금이야 교단 내에서 친교황파가 압도적으로 득세하고 있을 테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만, 만일 이번 하메른에서 일어날 일이 제국 전체에 퍼지게 된다면 얘기가 많이 달라질 터였다.
교황과 성녀.
여신의 충성스러운 두 개자식들끼리 서로를 물어뜯는 상황이 만들어지겠지.
“과연, 이해했다. 하지만 정말 괜찮겠나, 에릭? 아무리 너라고 한들 이번엔 마왕님들을 설득하기가 쉽진 않을 거다. 특히 영주는 몰라도 교황은….”
“걱정하지 마라. 교황은 굳이 내가 따로 수를 쓰지 않아도 알아서 빠져나갈 테니. 오히려 괜히 일부러 보내줬다가 녀석이 위화감을 느끼는 것보단, 제 힘으로 도망치게 만드는 편이 더 낫다. 마왕님들을 설득하는 건, 이후에 후작을 놓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냥 놔둔다면 알아서 남쪽으로 도망쳐 근처 도시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내겠지만, 괜히 이쪽에서 수를 썼다가 그 늙은 살쾡이가 무언가 냄새라도 맡는다면 오히려 일이 복잡해질 수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태를 관망하다, 후작이 살아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쫓으려 들 수도 있었으니까.
“그럼 이대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형님?”
“음? 그게 무슨 소리냐.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맨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아무리 이제 잠시 교황을 살려주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한들,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메른을 버릴지 말지 아직 완전히 마음을 정하진 못한 모양이던데.
기왕이면 확실하게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조금 도와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잠시 먼저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어라. 금방 합류할 테니.”
“예, 형님.”
“조심히 다녀 오거라, 에릭.”
나는 슬며시 단검의 손잡이를 매만지며, 아까 후작의 집무실과 연결되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없군.”
벽에 귀를 대어 후작이 자리를 비운 것을 확인한 나는, 조심스레 근처를 더듬어 장치를 작동시켰다.
쿠구구-
이윽고 책장과 함께 옆으로 밀려난 벽을 통해 밖으로 나온 난,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방금 전 교황이 들어간 방을 찾아 몸을 움직였다.
기껏 자신의 패로 준비해놓은 성녀후보가, 안전하다고 생각한 영주성 안에서 암살당해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과연 그 늙은이가 그때도 일주일 뒤에 도착할 원군을 기다리며, 하메른을 지키려고 힘을 쓸 생각을 하고 있을까?
“흐흐.”
그럴 리가 없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병사들을 반절이나 내보낸 덕인지 중간중간 텅 빈 경비들의 눈을 피해 천천히 복도를 거닐었다.
빌어먹을 알폰스.
곧 지금껏 네가 교단에서 일구어놓은 모든 걸, 네 손으로 전부 무너트리게 될 거다.
메리엘, 그 망할 년과 사이좋게 편이나 가르고 있도록.
금방 두 녀석 다 그 무거운 머리를 이만 목에서 떼어줄 테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