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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114화 (114/200)

제114화

“우선 무어든 계획을 짜려면 현 상황부터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겠지요. 오베른 후작님, 지금 하메른에 주둔하고 있는 기사와 병사 그리고 마법사들의 전력이 얼마나 됩니까?”

“새벽부터 보급대의 호위를 위해 보낸 인원들을 제외한다면, 절반가량이 남아서 성벽을 지키고 있습니다.”

절반.

그렇게나 많이 내보냈단 말인가.

아무리 공성보단 수성을 하는 쪽이 유리하다고는 해도, 한손으로 여럿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본래도 전력은 마왕군이 훨씬 우위에 있었거늘.

가뜩이나 모자란 병력을 반이나 날리다니, 생각보다 더 대담한 작자로군.

“허허. 절반… 그래도 수성에 있어 주요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마법사분들이나 저희 교단의 사제들은 모두 자리에 남았으니, 피해야 크겠지만 버티라면 어찌 버틸 수는 있겠군요.”

물론 그들도 대책 없이 일을 벌인 것은 아닐 터였다.

호위로 내보낸 병력들은 어디까지나 적이 달라붙었을 때 백병전을 치를 기사와 병사들뿐.

애초에 성문에 달라붙지 못하도록 막을 수만 있다면, 딱히 비어도 상관없는 전력들이었다.

어차피 공성병기들은 해자에 가로막힐 테니, 궁병과 마법사 그리고 사제들만 잘 운용한다면 며칠 정도야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거겠지.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썩 괜찮은 판단이었다.

실제로 하메른을 공략하는 데 애를 먹고 있는 이유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어 쉽사리 공성병기와 병사들을 성문에 붙이지 못하기 때문이지, 강력한 기사 전력과 보병이 있어서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놈들이 무리해서 성벽을 공략하러 들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지 않습니까. 어젯밤 군량고와 함께 병장고도 불타버린 터라, 그전에 미리 병사들에게 각출해놨던 화살들만으로는 보급이 도착하기도 전에 녀석들한테 먼저 함락당하고 말 겁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수성에 있어 보병과 기사들의 중요성이 비교적 떨어진다고는 한들, 결국 성문에 달라붙은 적군과 성벽을 타고 오른 이들을 밀어내는 것은 그들의 몫이었다.

한 마디로 본래 어떻게든 성문을 지키기만 하면 되던 싸움에서, 이제는 완전히 성벽에 달라붙는 것조차 허용해서는 안 되는 싸움이 됐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를 위해선 마법사와 사제들뿐 아니라, 궁병들의 활약 또한 절실했다.

그렇지만 창고의 화재 이후 하메른에 남아있는 화살이라고는, 황태자의 말마따나 언제까지고 마왕군을 막아설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너무 그리 염려치 마시지요. 화살이 모자라다면 그만큼 화살을 아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화살을 아낄 수 있는 환경이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간단합니다. 다리를 끊으시지요.”

“다, 다리를 말씀이십니까?”

“예. 어차피 서쪽으로는 강이 흐르고 있으니, 원군을 들일 북문을 제외한 동문과 남문의 다리를 모두 끊는 겁니다. 그리하면 적어도 날개 달린 적을 제외하곤 북문의 다리를 통해 움직일 수밖에 없으니, 비교적 화살을 아낄 수 있을 겁니다.”

“으음, 확실히….”

다리를 끊겠다고?

나는 교황의 말에 찝찝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하긴 이미 적군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굳이 저 다리를 내버려둘 필요가 없었다.

괜히 적들이 들어올 방향만 늘리고 있는 꼴이었으니까.

다만 그렇게 되면 보급 또한 오로지 북문의 다리를 통해서만 들일 수 있을 터.

“나중에 보급을 들일 때는 이 늙은이가 힘을 쓸 테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시지요. 메리엘, 성녀에게 전해 듣기로 이미 카르네몬에서 고위 신성마법을 통해 한 차례 마족 놈들의 공격을 저지한 적이 있다는 모양이더군요. 길게는 못 끌겠지만, 급히 보급을 들일 만한 시간은 벌 수 있을 겁니다.”

빌어먹을.

그렇게 나올 셈인가.

확실히 다른 어중이떠중이들도 아니고 교황이 직접 나선다면, 마왕군을 몇 분 정도 물리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하메른 전체를 신성력으로 감싸는 건 무리겠지만, 보급대가 북문으로 들어올 길을 여는 것 정도야 문제없겠지.

“하지만 마족 놈들이 보급대를 보고 북문의 다리마저 끊어버린다면 어떡합니까?”

“허허. 그렇다면 저들 스스로 제 목을 죄는 꼴이겠지요. 후작님, 저희가 왜 굳이 보급대의 호위로 그 많은 인원들을 내보냈는지 잊으셨습니까? 비록 군량고가 완전히 불타버리긴 했지만, 남아있는 식량으로도 잘만 쪼갠다면 사흘은 족히 버틸 수 있는 양이었지 않습니까. 헌데 이제 입이 반으로 줄었으니, 하루 이틀 정도 굶는다 생각하면 일주일은 능히 보낼 수 있을 겁니다.”

“일주일… 그쯤이면 수도에서 보낸 원군이 도착하겠군요!”

“하하! 이거 교황님께서 전술에도 이렇게 혜안을 가지고 계실지는 몰랐습니다.”

나는 집무실에서 새어 나오는 한층 밝아진 목소리에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단순히 보급대를 이끌고 돌아올 때를 생각해서 그리 많은 인원을 보냈으리라 생각했건만, 거기까지 계산해놓았을 줄이야.

수도에서 원군을 보내올 때까지 앞으로 일주일인가.

“에릭, 이러면 녀석들을 말려 죽이는 건 물 건너간 것 아닌가?”

“…그렇겠지.”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직접 성문을 공략하는 수밖에 없나.

“형님, 그럼 큰일 난 거 아닙니까? 놈들이 원군이 올 때까지 계속 안에서 버티기만 한다면…”

“음?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발라크. 뭐가 됐든 결국 하메른의 공략이 실패로 돌아갈 일은 없으니까.”

난 심각한 목소리로 걱정을 늘어놓는 발라크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예상했던 것보다 일이 잘 안 풀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큰일이 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놈들이 알아서 성문 밖으로 뛰쳐나오기를 기다리며 편하게 승리를 가져가려던 계획이 무너진 거지, 하메른을 점령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 없었다.

애초에 그 방법조차 저들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그저 저들의 무기가 다 바닥날 때까지 계속 부딪치면 그만이다. 물론 그만큼 이쪽도 만만찮게 피해를 보긴 하겠지만, 이 성은 물론 안에서 버티고 있는 황태자와 교황을 모두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그 정도쯤이야 별 문제도 아니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교황의 전략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건 아니었다.

아마 높은 확률로 그가 바라던 것처럼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데 성공했었겠지.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애당초 저들의 계획은 어디까지나 적이 그를 몰랐을 때나 성립하는 거였다. 성벽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놈들의 전력이 지금 얼마나 남아있는지. 그에 대해서 우리 마왕군은 잘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으음, 그것도 그렇구나.”

군량고와 병장고를 불태웠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들의 식량과 무기가 한순간에 동이 나버린 것은 아니었다.

저들이 말했던 것처럼 미리 병사들에게 각출해놓은 분량도 남아있을 테고, 민가를 뒤지다보면 그럭저럭 쓸 만한 것이 또 튀어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어떻게든 끌어 모은 것들로 하루 이틀을 버티다보면, 마왕군 입장에선 슬슬 일이 긴가민가해지기 시작할 터였다.

며칠 못가 알아서 뛰쳐나올 거라 생각했던 놈들이 꾸역꾸역 계속 버티고 있는 모습을 보면, 혹시 그때 그 화재가 미끼는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돌아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면 점점 더 성벽을 공략하는 일이 소극적으로 변할 테고, 교황의 뜻대로 하메른은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게 되는 거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 우리가 전부 들어버렸으니까. 놈들이 절반이나 되는 병력을 보급대의 호위로 보내면서까지 입을 줄이고, 남은 군량으로 어떻게든 일주일을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도 정상적으로 배급해서 일주일이 아니라, 아끼고 아껴서 그리고 몇 끼를 건너뛰었을 때를 기준으로 일주일이었다.

그 말은 즉 한 닷새 엿새쯤 되는 날에 총공격을 펼친다면, 제대로 먹지도 못해 힘이 빠진 녀석들을 상대로 쉽사리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는 얘기였다.

물론 놈들이 의심하지 못하도록 그전에도 적당히 찔러줘야겠지만 말이다.

“그럼 형님, 어서 이 사실을 알리러 본대로….”

“아니. 그러면 재미가 없지.”

나는 발라크의 말에 씨익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여기서 들은 사실을 본대에 알릴 시간은 차고 넘쳤다.

일단 한 번 다시 이 수로를 벗어나면, 아래에 처리해놓은 시체들 때문에라도 다시는 들어갈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지금 당장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놓고 가는 게 좋았다.

“흐음, 어쩔까….”

가장 좋은 건 남은 창고 하나에도 불을 붙이는 거겠지만, 그랬다간 당연히 우리 또한 여길 벗어나지 못하고 붙잡힐 터였다.

가능한 활동할 수 있는 범위는 이 영주성 내부뿐.

그렇다면 역시 여기서 머물만한 놈들 중에 가장 까다로운 녀석을 잡아다가 죽여 놓는 게 낫겠지.

“알폰스….”

알폰스 데 드랑.

교단의 늙은 살쾡이.

내가 이방인으로서 연합에 소환됐을 적에 벌써 30년째 교황을 해 먹고 있었으니, 지금도 얼추 28년 정도 되었겠지.

“그럼 회의는 여기까지 하고, 다들 들어가 보시지요.”

“예, 황태자님. 그럼 후작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걱정 마시지요. 지금 당장 마법사들을 시켜서 다리를 끊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슬슬 자리를 파하는 분위기에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교황의 목소리를 쫓아 자리를 옮겼다.

가능하면 영주성에 머물러줬으면 좋겠는데.

죽이기 좋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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