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에릭, 이거 정말 괜찮은 건가? 인간들이 전보다 눈을 더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지 않나.”
“확실히, 쉽사리 녀석들의 눈을 속이고 들어갈 수는 없겠지. 지금까진 어떻게 들키지 않고 왔다고 해도, 해자를 건널 땐 티가 좀 많이 나니까 말이야.”
조심스레 해자 근처까지 몸을 숨기는데 성공한 나는, 불안한 얼굴로 성벽 위를 훑는 카렌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어제는 그나마 한밤중이었던 데다가 달빛마저 어두워 쉽게 건널 수 있었다지만, 지금은 이제 막 해가 떠올라 주변을 훤히 비추는 중이었다.
저번처럼 대놓고 성벽에 붙으려고 했다간, 어찌 해자를 건너더라도 비밀통로로 숨어드는 모습을 들키고 말 터였다.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형님?”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지금 이 전장엔 우리만 있는 게 아니니까. 저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계속해서 보급을 끊고 다니는 적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겠지. 물론 성을 지켜야하니 병력을 전부 내보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안 가느니만 못한 애매한 수를 보내진 않을 터. 그러면 성벽의 감시에도 어딘가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을 거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마왕군의 동향을 확인하지 못할 정도로 감시망에 구멍이 생기진 않겠지만,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부분의 방비는 분명 소홀해질 터였다.
이를테면 유일하게 성문이 나있지 않은, 서쪽 벽이라던가.
쿠구구구-
나는 곧 커다란 진동과 함께 올라가기 시작한 성문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서둘러라! 마족 놈들이 중간에 보급을 끊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그들을 호위해서 들여야 한다!”
난 이윽고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기사와 병사들을 보며, 조용히 성벽 위쪽을 훑었다.
얼핏 보기에도 꽤 많은 수가 빠져나간 듯, 어제와 달리 중간 중간 인원이 빈 부분이 보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하겠군.
“서두르지.”
“알겠다.”
“예, 형님.”
우리는 곧장 바닥에 바짝 엎드린 그대로, 서쪽에 있는 강에 붙어 빠르게 해자를 건넜다.
다행히 보급을 살리러 제국군이 우르르 빠져나간 틈을 타서 성벽을 완전히 둘러싸버리러 온 본대가 시선을 끌어준 덕에, 들키지 않고 어제 그 비밀통로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단 어제 입구를 가려둔 흙더미가 그대로 있는 걸 보아하니, 적어도 이 통로는 들키지 않은 모양이구나.”
“확실히 그런 거 같군.”
나는 어제 수로를 빠져나와 입구를 덮어둔 흙 위에 슥슥 그어놓은 표식이 멀쩡한 걸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땅을 파냈다.
크그그긍-
“들어가지.”
곧바로 드러난 철문을 열어젖힌 나는,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사다리를 타고 안쪽으로 향했다.
먼지 쌓인 바닥 위에 아직 세 명분의 발자국만 찍혀있는 걸 보아하니, 단순히 문만 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 말고는 통로 자체를 드나든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누구든 축축한 수로를 통해 이리로 들어왔다면, 무조건 처음 보는 발자국이 찍혀있어야만 하니까 말이다.
“발라크.”
“예, 형님.”
쿠웅-
난 어제 잘라놓았다가 나가면서 다시 가려놓은 벽면을 옆으로 치우는 발라크를 보며, 슬그머니 수로 바닥을 살폈다.
“…아주 멍청이는 아니라는 건가.”
나는 저 멀리서 첨벙이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조용히 단검을 빼들었다.
비록 비밀통로가 숨겨져 있는 벽까지 들키진 않은 모양이었지만, 어제 우리가 수로를 통해 저들의 도시에 침입했었다는 사실까진 밝혀낸 모양이었다.
하메른의 지하수로는 서쪽에 있는 강과도 연결되어 있으니, 어쩌면 그쪽으로 들어왔다 빠져나가지 않았을까 짐작하고 있겠지.
실제로 발소리가 들리는 방향도 딱 그쪽이고 말이다.
“조금만 기다려라. 금방 처리하고 올 테니.”
난 잠시 두 사람을 그 자리에 두고선, 도시로 이어진 방향과 반대로 걸음을 옮겼다.
한 명, 두 명… 대략 여섯 명 정도인가.
수로에 고인 물 때문에 첨벙거려서 제대로 가늠이 안 되는 군.
“젠장… 정말로 이쪽으로 들어온 게 확실하답니까? 아직 이렇게 철창이 멀쩡하게 쳐져 있는데. 놈들이 무슨 액체도 아니고, 무슨 수로 여길 드나들었다는 겁니까?”
“뭐가 어찌됐든 결국 녀석들이 수로를 통해 움직였다는 건 확실하지 않은가. 군말 말고 경계나 똑바로 서도록.”
나는 함부로 누군가 드나들 수 없도록 강과 이어진 통로 끝에 세워져 있는 두꺼운 철창을 보며, 그 앞을 지키고 있는 경비들을 향해 천천히 단검을 들어올렸다.
“괜히 그런 안일한 정신머리로 느슨하게 경계를 풀었다가, 또 그놈들이 수로를 통해 도시로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푹-
“한다면, 뭐 어떡할 거지?”
“치, 침입….”
후욱-
“컥….”
철창 앞을 지키고 있는 여섯 중에 가장 고참으로 보이는 녀석의 목을 꿰뚫은 나는, 그대로 나머지 다섯도 빠르게 처리하고선 자리로 돌아왔다.
“빨리 왔구나, 에릭.”
“음. 잔챙이들 몇 처리하는데 굳이 시간을 잡아먹을 필요는 없지. 그보다 그동안 별 일 없었나?”
“예, 형님. 아무도 안 왔습니다. 딱히 안쪽에서 발소리 같은 것도 들리지 않는 걸 보아하니, 경계를 서던 놈들은 형님께서 잡으러간 녀석들이 전부인 거 같습니다.”
그렇군.
나는 발라크의 대답에 고개를 주억이며, 곧바로 도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 뭘 하면 좋을까.
혹시 몰라 경계를 서던 병사들까지 죽였으니, 지하수로를 통해 무언가 일을 벌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 될 터.
이번 기회에 가능하면 놈들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피해를 입혀놓을 필요가 있었다.
남은 창고도 마저 태워버리는 게 가장 좋을 거 같긴 한데, 그럴 수 있으려나 모르겠군.
“…막혔나.”
“형님, 이제 어떡합니까?”
난 아쉽게도 중간에 꽉 막혀있는 수로를 보고선,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어제 활활 태워버린 동쪽과 서쪽을 제외한 마지막 북쪽의 창고로 이어지는 길은 여기 하나뿐.
물론 앞을 막고 있는 두꺼운 철판을 베어내는 것쯤이야 크게 어려울 것 없었지만, 그러기 위해선 당연하게도 마력을 끌어올려야만 했다.
하지만 자칫 그랬다간 위에 있는 마법사들에게 들킬 위험이 있었다.
평소라면 몰라도 지금은 당장 어제 수로를 타고 들어온 침입자들에게 호되게 당한 상태이니만큼, 아래쪽에 굉장한 신경을 쏟아 붓고 있을 테니까.
게다가 이 뒤쪽에 얼핏 신성력이 느껴지는 걸로 봐선, 결계까지 작정하고 쳐놓은 모양이었다.
괜히 여기서 위험부담을 더 짊어질 필요는 없겠지.
“다른 길을 좀 찾아보도록 하지.”
“다른 길? 이번엔 창고 말고 다른 걸 태울 생각인가?”
“그래. 일단 따라와라.”
나는 고개를 갸웃하는 카렌과 발라크를 데리고, 곧장 발을 돌려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고가 안 된다면 다른 곳을 찾는 수밖에.
물론 어딜 가든 마찬가지로 길이 막혀있을 가능성이 컸지만, 지금 가고 있는 곳은 아마 뚫려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직 우리가 비밀통로를 통해 수로로 숨어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훗날 그를 이용해 고립된 하메른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라도 길을 터놓아야할 녀석이 있었으니까.
“좋아. 뚫려있군.”
난 예상대로 철판으로 막혀있지 않은 길을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래, 누구보다 제 목숨이 아까운 녀석이 그리 쉽게 보험을 져버릴 리가 없지.
그게 또 다시 제 목을 죄어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겠지만 말이다.
“형님, 이번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영주성이다.”
“영주성… 예? 영주성 말씀이십니까?”
“…도시의 지하수로가 영주성까지 연결되어있단 말이냐?”
나는 목적지를 듣고선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두 사람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애초에 비밀통로는 하메른의 영주인 오메른 후작이, 혹시 모를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준비해둔 장치였다.
제 영지민들과 병사들을 미끼로 남겨놓은 채, 오로지 제 알량한 목숨만을 부지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동아줄 말이다.
그런데 그 비밀통로로 향하는 길이 어디 도시 한복판에 나 있어서야 쓰겠는가.
당연히 이 지하수로는 영주성, 그것도 오메른 후작의 집무실의 벽 뒤에 숨겨진 공간과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도착이다.”
“여긴….”
난 곧 막다른 길에서 위쪽으로 길게 나있는 사다리를 보고선, 망설임 없이 그걸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덜컹-
이내 사다리를 모두 오르자, 앞에 사람 두셋 정도가 지날 수 있는 길이 보였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그땐 그 겁에 질린 그 돼지자식을 데리고 여길 지났었지.
밖에서 마왕군에게 유린당하는 동료들의 비명에,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며 말이다.
“저 벽 끝에 그 후작이라는 놈의 집무실이 있다는 건가.”
“쉿. 잠깐. 아무래도 밖에 누가 있는 모양이군.”
그렇게 통로를 지나 끝에 닿은 나는, 벽 너머로 들려오는 이야기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오메른 후작!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화, 황태자님.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도시 밖으로 수로가 연결되어 있다니, 그게 무슨… 후작, 설마 내게 더 숨기고 있는 게 있는 건 아니겠지요?”
“다, 당치도 않습니다! 그리고 수로는 영지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후작과 황태자라.
아무래도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황태자께서 화가 잔뜩 나신 모양이었다.
그래, 그렇게 저들끼리 열심히 싸우고 있어라.
이제 곧 다들 목에서 머리가 떨어질 날이 머지않았으니…
“황태자님. 이만 고정하시지요.”
응? 이 목소리는…
“후작님께서도 설마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짐작이나 하셨겠습니까. 지금 그의 탓을 하시는 것보단,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그에 대해 얘기를 나누심이 어떻겠습니까.”
“…예.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것이 낫겠군요. 오메른 후작. 수로 건에 대해선 훗날 다시 물을 테니,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하도록 하지요.”
“예, 예….”
교황.
빌어먹을, 그 늙은 살쾡이가 여기 와있었나.
나는 익숙한 목소리와 황태자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냥 다 잡은 물고기라고 생각했는데, 이래서야 방심할 수 없겠군.
일단 놈들이 무슨 꿍꿍이를 꾸밀지, 조금 들어볼 필요가 있을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