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그러니까 지금 저 안쪽에서 나오는 연기가, 창고가 불타서 피어오르고 있는 거란 말이지.”
“예.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 창고 중에 둘을 태웠으니, 당장 뛰쳐나오진 않더라도 몇 번 보급을 끊어주면 알아서 밖으로 기어 나오게 될 겁니다.”
릴리스의 막사로 들어와 하메른 안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한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그녀를 보며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영 어딘가 찜찜한 눈친데.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마냥 믿자니 저들도 어찌 못하던 성벽을 대체 무슨 수로 넘어 불을 질렀는지가 의문이고, 그렇다고 의심을 하기엔 내게 전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동안 쌓아 올린 전공이 얼마고 마룡왕과 투마왕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는데, 무엇 하러 자기들을 속이고 무슨 이득을 취하려 들겠는가.
더구나 그런 석연찮은 느낌 하나 때문에 내 말을 흘려듣기에는, 지금이 너무나도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이쪽을 속이기 위해 벌인 판이라고 하기에는, 연기가 너무 심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괜찮네. 확실히 네 말대로라면 굳이 힘 뺄 필요도 없이, 이대로 시간만 끌어도 안에 있는 녀석들을 전부 말려 죽일 수 있겠어. 다만, 우리 얼굴마담한테 마음대로 성벽을 넘나들면서 적진에 불을 지를 수 있는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흐응… 그래, 운이라….”
나는 끝내 완전히 의심을 져버리진 못하고 흥미로운 눈으로 이쪽을 훑는 릴리스를 보며, 가만히 어깨를 으쓱였다.
비밀통로와 수로에 대한 얘기를 꺼내면 그에 대한 의문이야 간단히 잠재울 수 있겠지만, 그래봐야 다음엔 그 통로에 대해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따라붙을 뿐이었다.
어차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심이 계속될 거라면, 굳이 나서서 풀려고 들 필요 없었다.
결국 바라는 대로 무사히 하메른을 함락시키기만 한다면, 그런 사소한 의문쯤이야 어려울 것 없이 넘길 수 있을 테니까.
“일단은 곧바로 추격대를 꾸리시지요. 지금쯤이면 근처 도시에 보급을 요청하기 위해 병사들을 보냈을 겁니다. 실제로 창고가 불탔는지 아닌지, 직접 녀석들의 입을 통해 들어보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서큐버스들이 자랑하는 매혹은 단순히 그녀들의 의지에 따라 상대를 조종하는 것만이 아닌, 그들의 정신 자체를 지배하는 기술이다.
급이 낮은 이들이라면 단순히 시선을 빼앗거나 잠시 움직임을 멈추는 수준밖에 되지 않겠지만, 마왕인 릴리스라면 충분히 상대에게서 진실을 토해내게 만들 수도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상대가 능숙히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수준만 된다면 힘들겠지만, 두 창고에 불이 붙은 것 정도야 평범한 병사들도 모두 봤을 테니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문제없을 터.
“…좋아. 그 말대로, 직접 확인해보면 되겠지. 잠시 나가있어 주겠니? 금방 준비하고 나갈 테니.”
사락-
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꼬던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를 보고선, 아찔해지는 정신을 다잡고 슬며시 막사를 나왔다.
금방 준비하고 나오겠다니.
아예 본인이 직접 잡으러 갈 생각인가.
고작해야 보급을 요청하러 나선 인원들을 쫓으러 마왕이 손수 움직인다니.
주변에서 난리도 아니겠군.
물론 말린다고 해봐야 그녀를 말릴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자, 그럼 출발할까?”
“리, 릴리스 님! 역시 그런 건 저희에게….”
펄럭-
난 예상대로 저들이 알아서 하겠다고 나서는 부하들을 뒤로하고 날개를 펼치는 릴리스를 보며, 나지막이 고개를 저었다.
저쪽도 참 고생이군.
그래도 덕분에 마왕님 눈치를 보느라 사천왕들 모두가 움직이는 모양이니, 혹여 보급을 구하러 간 병사들을 놓칠 걱정은 없을 거 같았다.
“형님, 얘기는 잘되셨습니까?”
“나쁘진 않았다. 조금 의심하는 눈치긴 했지만, 어차피 놈들을 붙잡고 나면 다 풀어질 테지.”
나는 벌써 저 멀리 날아간 서큐버스들을 바라보다, 이만 몸을 돌려 두 사람이 배정받아놓은 막사로 향했다.
“그런데 이거 괜찮으려나 모르겠구나. 저렇게 요란하게 쫓아서야, 인간 놈들이 서큐버스들을 발견할 수도 있을 텐데.”
“그건 힘들 거다. 아직도 연기가 계속 올라오고 있으니 말이다. 여전히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가뜩이나 어두운 밤에 연기로 가려진 하늘 너머로 저들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으음, 그런가.”
난 조용히 고개를 주억이는 카렌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리고선, 어느새 도착한 막사를 보고선 천막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딱히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불길에 정신이 팔린 와중에도 그들을 발견할 수는 있겠지.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부질없는 걱정이었다.
지금 병사들을 쫓으러 나간 녀석들이 어디 어중이떠중이들도 아니고, 고작해야 하메른에서 추격대 몇 꾸린다고 해서 그들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본인이 직접 나선 걸지도 모르겠군.
“그럼 다들 이만 피곤할 텐데 눈 좀 붙이지.”
“예, 형님. 안녕히 주무십시오.”
“알겠다. 내일 보자꾸나.”
막사로 들어온 나는 곧장 구석에 자리를 잡고 누워 잠을 청했다.
에란델에서 가능한 빨리 도착하기 위해 쉼 없이 마차를 몰아 달려온 탓인지,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반테온.
하필이면 하메른으로 오다니.
제 딴에는 안전하게 공적을 챙기고 제 위상을 드높일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겠지.
그 판단이 제 목을 죄여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 * *
“에릭, 일어나라.”
“으음….”
누군가 나를 깨우는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킨 나는, 이쪽을 보며 반쯤 젖혀져 있는 천막 뒤쪽을 가리키고 있는 카렌을 보고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릴리스 님께서 너를 찾는 모양이다. 그쪽에서 사람을 보냈더군.”
“…알았다. 금방 나가지.”
슬쩍 밖을 살펴보니 아직 해가 다 떠오르기 전 새벽이었다.
벌써 돌아온 건가.
그래도 저쪽이 한 시간은 일찍 출발했을 텐데.
금세 따라잡았나보군.
하긴 아무리 말이 빨라봐야 마왕과 사천왕들이 쫓는 것보다 빠르겠는가.
“흐응… 늦어. 여자를 이렇게 밖에서 기다리게 하는 남자는 별로 인기 없는데.”
적당히 장비를 챙기고 천막을 나서자, 퍽 익숙한 얼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릴리아나.
릴리스가 나를 찾는다고 했던 걸 생각해보면 그녀가 사람을 보낸 걸 텐데.
그래도 어째 마왕의 잔심부름 정도는 맡을 정도로는 올라간 모양이었다.
“시답잖은 소리 말고 빨리 안내나 하도록.”
“…흥. 재미없긴. 따라와.”
나는 픽 고개를 돌리며 어딘가로 향하는 그녀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방향이 어제 만났던 그 막사는 아닌 거 같은데.
하긴 그런 거였다면 굳이 누군가를 안내역으로 보낼 필요 없이, 제 막사로 찾아오라 하면 그만이었겠지.
“릴리스 님. 말씀하신 녀석을 데려왔습니다.”
“어머, 빨리 왔네. 그래, 들어오렴.”
밤새 잡아온 병사들을 심문하는 곳인가.
난 마왕의 막사보다 더 커다란 천막을 보고선, 곧 허락이 떨어짐에 따라 조용히 안쪽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확인은 끝나셨습니까?”
나는 곳곳에 완전히 매혹당한 채로 침을 질질 흘리며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는 병사들을 슥 훑고선, 그 가운데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릴리스를 마주했다.
“그래. 다들 병장고와 군량고에 불이 붙어서 근처 도시에 보급을 요청하러가던 길이라고 하네.”
병장고와 군량고.
그런가.
어째 두 쪽 모두 정답이었군.
“그런데 참 요상하단 말이지. 잡아온 아이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도저히 누가 도시 안팎을 멋대로 오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거 같은데.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걸까?”
그새 그 의문이 더 커졌나.
그래도 전과 달리 표정이 퍽 장난스러운 걸 보아하니, 딱히 추궁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어찌됐든 그게 마왕군에게 해가 되는 내용은 아니었으니, 굳이 물고 늘어질 필요는 없다고 판단이 섰겠지.
“뭐, 그건 됐고.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우리 마법사군의 의견을 좀 들어보고 싶은데.”
…내 의견을?
나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보고선,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얘기하렴. 가벼운 선물이라고 생각해, 선물.”
선물?
…그런가.
난 그제야 릴리스가 왜 굳이 이런 얘기를 꺼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적들의 보급을 태워 승기를 잡은 상태에서, 내게 다음 작전을 물은 이유.
앞으로 어떻게 움직이든 이미 하메른의 함락은 예정된 일이었지만, 그녀는 내게 전공을 올릴 기회를 주고 싶은 것 같았다.
하메른 공략에 앞서, 그 작전을 세운 공신으로 나를 밀어주겠다는 거겠지.
나쁘지 않군.
자기 나름대로 어제 괜히 의심했던 것에 대한 사과라는 걸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그저 녀석들이 알아서 말라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보급로를 끊으면 그만이지요. 그편이 아군의 전력손실 없이, 가장 쉽게 저 성을 함락시킬 수 있는 방법일 겁니다.”
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바라는 대로 술술 작전을 읊었다.
“어머. 그거 참, 훌륭한 작전이네.”
난 마찬가지로 마주 미소 지으며 맞장구치는 릴리스를 보고선, 조용히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저쪽은 내가 알아서 설득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제부턴 알아서 움직이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나는 이만 손을 흔드는 그녀를 보며, 곧바로 천막을 젖히고 밖으로 나왔다.
알아서 움직이라니, 그거 참 좋군.
“카렌, 발라크. 준비해라. 먼저 출발한다.”
“음? 출발이라니, 어디로 말이냐.”
곧 막사로 돌아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을 마주한 나는, 곧장 그들을 데리고 전초기지를 벗어나 하메른으로 향했다.
“일단 어제 거길 좀 다시 둘러볼 생각이다.”
과연 어제 들켰을지 모르겠군.
난 성내로 이어지는 수로와 연결된 비밀통로를 떠올리며, 몰래 몸을 숙여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만일 아직 들키지 않았다면 또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