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성벽을 앞두고 제국과 마왕군의 대립이 시작된 지도 어느덧 열흘째.
아직도 마땅히 공략할 방법을 찾지 못한 마왕군은, 벌써 사흘이 지나도록 저 멀리 진을 치고서 기다리고만 있었다.
“영주님, 영주님! 큰일 났습니다!”
“으음, 한밤중에 갑자기 무슨 소란이냐. 마족 놈들이 저번처럼 야습이라도 시도한 거냐? 쯧쯧, 그래봐야 이 하메른의 성벽을 넘을 수는 없거늘.”
오베른 후작은 자신의 침소를 찾아와 호들갑을 떠는 병사를 보며,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큰일이라니.
아무리 놈들이 대단한 계책을 가지고 몰려와 봐야, 하메른의 성문을 열어젖히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공성병기부터가 해자를 넘지 못하고 떨어질 텐데, 도대체 무슨 수로 도시를 함락시키겠는가.
지금 자신들에게 중요한 건 바삐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수도에서 원군이 올 때까지 가능한 체력과 전력을 온존하고 있는 것이었다.
헌데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 황태자를 모시느라 고생한 제 수면을 방해하다니.
“그, 그게 아닙니다. 창고에 불이… 어, 어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만일 별것 아닌 일이라면 눈앞의 병사에게 호된 벌을 내리리라 다짐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던 후작은, 이어지는 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흠칫 몸을 떨었다.
창고에 불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적이 화공이라도 펼쳤다면 진즉에 더 큰 소란이 일었을 터.
아니, 애초에 성벽 너머로 불화살이라도 쏘았다 한들 그게 멀쩡히 성내로 떨어질 리가 없었다.
지금 도시는 혹시 모를 적들의 마법에 대비해, 항시 마법사들의 방어 마법과 사제들의 결계를 둘러친 상태였으니까.
“경계를 서던 병사들은? 그놈들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기에 창고에 불이 난단 말이냐!”
“그, 그것이….”
설마 내부에 첩자가?
하지만 그마저도 이미 사제들이 한 명씩 전부 확인해보지 않았던가.
마족들이 신성력에 쥐약이라는 것은 이미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 카르네몬에서 증명된 바가 있었다.
제아무리 참으려고 해본들, 신성력에 맞닿은 신체가 지글지글 끓으며 타들어가는 반응 자체를 숨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마족이 첩자로 들어온 건 아니라는 얘기였다.
드르륵-
“이, 이게 무슨….”
생각했던 것보다 활활 타오르는 화마를 마주한 후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쩍 벌렸다.
단순히 누군가 불을 붙였다고 해서 날 수 있는 수준의 화재가 아니었다.
도시 한쪽을 환히 비추며 시커먼 연기를 마구 뿜어대고 있는 불길은, 벌써 창고에 붙은 막사 여럿까지 집어삼키며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얼마나 되었느냐.”
“예, 예?”
“창고가 불탄 지 얼마나 되었느냔 말이다!”
“그, 한 5분 정도….”
5분.
후작은 병사의 대답에 사색이 되어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절대 일개 병사가 벌일 수 있는 수준의 화재가 아니었다.
단순히 목재에 불을 붙인다고 해서, 그 짧은 시간 만에 저렇게 큰 불길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작은 불씨로 시작했더라면 주변을 지키던 병사들이 늦지 않게 처리했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이는 여럿이 조직적으로 불을 키웠거나…
“…마법사.”
누군가 마법을 부려 화재를 불렀다는 얘기였다.
“여, 영주님! 이런 혼란스러운 때에 혼자 다니시면 안 됩니다! 적어도 저희와 같이….”
“마법사들은 어디 있느냐!”
“예? 마법사분들이라면 지금 불길을 잠재우러 창고 쪽에….”
후작은 뒤따라 붙는 호위병들을 데리고서, 곧장 저택을 벗어나 창고 앞으로 향했다.
“제길… 빨리 꺼트려! 마력을 죄다 쏟아 부어서라도, 어떻게든 불길을 잡으란 말이야!”
“다들 구경만 하고 있지 말고, 물이라도 길어서 날라! 거기, 멍청하게 있지 말고 서둘러 움직여!”
현장에 도착한 그는, 이미 완전히 불타 없어진 창고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와서 불길을 꺼트린다고 한들, 주변으로 더 번지는 걸 막을 뿐이었다.
“여, 영주님! 그, 그러니까 이것이….”
후작은 병사들을 지휘해 물을 옮기다 저를 발견하고선 황급히 달려온 기사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창고였느냐.”
“그, 무기들을 보관하던….”
후작은 기사의 입에서 나온 대답에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그, 그래도 너무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이미 병사들에게 보급이 되어 나눠진 장비들도 있고, 영주님께서 일전에 싸움이 길어지리라 생각하시고 미리 수도에 사람을 보내놓았지 않습니까? 늦어도 열흘 뒤면 또 보급이 들어올 테니, 저 마족 놈들이 매일 같이 쳐들어오지 않는 이상 그때까진 어떻게든 남은 걸로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래. 확실히 근래에는 녀석들도 전처럼 마구잡이로 부딪치려들지 않으니, 자네 말대로 잘 나눠서 쓴다면 다음 보급까진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문제는 그놈들 또한 이 화재로 인해 뿜어진 연기를 분명 봤으리란 것이었다.
“일단 빠르게 화재를 진압하고, 이후 병사들을 불러 모아 절대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잘 시키도록. 최대한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여야 해. 오히려 당당하게 나가야한다. 혹시라도 군이 불안에 차있는 모습을 비추기라도 한다면, 녀석들 또한 지금이 확실한 기회라는 걸 깨닫고 전력으로 부딪쳐올 테니 말이다.”
대담하게.
오늘의 화재는 절대 큰일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움직여야 했다.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그대로 승냥이처럼 달려드는 녀석들에게 물어뜯길지도 모를 노릇이었으니까.
조금, 아주 조금의 시간만 벌 수 있으면 충분했다.
어차피 다음 보급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으니…
콰아앙-!
“뭐, 뭐냐?”
“서, 서쪽에서 폭음이….”
한창 계획을 세우던 중 귀를 때리는 소리에 황급히 그쪽을 돌아본 후작은, 반대쪽에서 매캐하게 올라오기 시작하는 연기를 보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서, 설마….”
“영주님! 큰일 났습니다! 서쪽 창고에서도 화재가… 여,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그는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들기 무섭게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오는 병사를 보고선, 그만 어지러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몸을 휘청거렸다.
“…서쪽 창고에는 무엇을 보관하고 있었지?”
“그, 그것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을 거라며 이야기를 나누던 기사의 안색도, 서쪽 창고에 화재가 일었다는 소식에 시커멓게 썩어 들어갔다.
“구, 군량들을… 모두….”
툭-
“여, 영주님! 영주님! 사제, 어서 사제를 불러오너라!”
군량을 보관하던 창고가 모두 타올랐다.
그 사실에 후작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 * *
생각보다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에 그쪽으로 확 쏠리는 이목들을 지켜본 나는, 이 정도면 도망치기 전에 한 곳 정도 더 태울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에릭, 전부 다 태웠다!”
“음, 잘했다. 이만 돌아가지.”
그렇게 수로를 타고 자리를 옮겨 서쪽에 있던 창고마저 완전히 불태운 우리는, 곧바로 다시 자리를 피해 황급히 도시를 벗어났다.
세 창고 중에 둘을 태웠으니, 놈들이 설상 모든 군수품들을 셋 모두에 나누어 보관하고 있었다 한들 오래 버티진 못할 터였다.
“형님, 그럼 이제 본대와 합류하시는 겁니까?”
“그렇겠지. 우선 이 사실을 모두 알려야 할 테니 말이야.”
나는 발라크의 물음에 고개를 주억이며, 빠르게 아까 부쉈던 통로의 벽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장 혼란스러운 도시의 성벽을 뒤로하고, 서큐버스와 가고일들이 모여 있는 전초기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까부터 계속 저쪽에 연기가 올라오는데. 안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니야?”
“그, 그러게. 게다가 올라오는 연기의 양이 심상치 않은 거 같은데. 큰 화재라도 있는 모양인데?”
“어쩌면 함정일지도 몰라. 우리가 하도 여기서 안 움직이니까, 어떻게든 공격하게 만들려고 연기만 피워 올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하, 함정? 확실히 그럴지도… 어? 저기 누가… 머, 멈춰라!”
금방 전초기지 앞에 도착한 나는, 하메른에서 나는 연기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병사들을 보고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거기. 릴리스 님께서 계신 천막은 어디지?”
“배, 뱀파이어? 마왕님은 어째서… 시, 실례지만 누구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투마왕님 휘하의 독립대다. 급한 일이니 어서, 지금 당장 안내해줬으면 좋겠군.”
“하, 하지만 절차가….”
“바보야! 가슴에 달고 계신 훈장들을 봐! 1급 훈장을 두 개나 가지고 계시잖아! 그것만으로도 이미 마왕님과 독대하실 수 있는 권한이 있으시다고! 제,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음?
이런 훈장에 그런 권한이 있었다니.
나는 내 가슴팍에 달린 훈장을 보고선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곧바로 길을 안내하는 오크를 보고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뭐, 어쨌든 나야 좋은 일이었다.
괜히 여기서 시간을 버리지 않아도 됐으니 말이다.
“그런데 에릭, 급한 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혹시 녀석들이 화재를 모두 잡기 전에 쳐들어갈 생각인 건가?”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공격 명령은 내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리러 가는 중이다. 급하다는 건, 녀석들이 다른 도시에 급히 보급을 요청하러 보냈을 놈들을 잡아들이는 일을 말한 거다.”
본래 창고를 넉넉하게 채우고 있었으니, 다음 보급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을 터.
그전에 다른 곳에 추가로 보급을 요청하지 못하도록만 막는다면, 손쉽게 놈들을 말려 죽일 수 있을 터였다.
“이, 이쪽입니다!”
“음, 고생했다.”
나는 어느새 도착한 막사를 보고선, 나지막이 고개를 주억이고 병사를 돌려보냈다.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얘기를 들어줬으면 좋겠군.
난 이윽고 천막을 두드리며, 안에 있는 릴리스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