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하메른.
용사 시절, 드워프들의 성채였던 아렌델과 제국 중앙으로 가는 관문인 벨라노르와 함께 마왕군을 가장 애먹였던 난공불락의 도시.
“도착이다.”
그 서쪽을 지키고 있는 커다란 강을 앞에 두고 마차를 멈춰 세운 나는, 폭 넓은 수로로 해자를 만들어 버티고 있는 성채를 올려다보며 이만 마부석에서 내렸다.
“으음… 척 보기에도 함락시키기가 쉽지 않겠구나. 저렇게 넓은 해자를 끼고 성벽마저 높으니, 안에 틀어박혀 버티기만 한다면 따로 방법이 없겠어.”
나는 마차에서 내려 하메른의 모습을 눈에 담고선 나지막이 침음을 흘리는 카렌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지 않아도 서큐버스와 가고일, 두 마왕의 군세가 해자를 넘지 못하고 적잖이 애를 먹고 있는 상태였다.
아무리 둘 모두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개 군의 간부를 이루고 있는 7대 마족의 이야기일 뿐.
기본적으로 군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병사들은 모두 임프나 고블린 오크와 같은, 날아다닐 수 없는 평범한 마족들에 불과했다.
물론 서큐버스나 가고일로만 이루어진 부대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걸로 성벽을 넘기엔 터무니없이 모자란 수였다.
하다못해 저 성채 위에 그럴싸한 전력이 없었다면 모를까.
셀파스트에게서 받은 정보에 따르면, 저쪽도 하메른을 넘겨주지 않기 위해 꽤 병력을 몰아넣은 모양이었으니까.
“그런데 형님. 두 마왕님께서도 어찌 못한 저 성벽을, 대체 어떻게 함락시키겠다는 겁니까?”
난 성벽 너머 저 멀리 진을 치고 있는 서큐버스와 가고일들의 군세를 가리키며 내 쪽을 바라보는 발라크를 향해, 씨익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수만이 넘는 마왕의 대군조차 어찌하지 못한 일을 고작 셋이서 이루어내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밤사이 달빛이 잘 닿지 않는 사각으로 돌아 성문을 오르려 한다고 해도, 성벽 위에서 돌아가며 진을 치고 있는 경비들의 눈을 모두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지금쯤이면 카르네몬의 일로 마족들이 신성력에 쥐약이라는 사실도 퍼졌을 테니, 사제들을 이용해 파마의 결계라도 펼쳤을 터.
섣불리 맨몸으로 그것을 통과하려고 했다간 온몸이 불에 지져진 것처럼 화상을 입는 건 물론이요, 순간 번쩍이는 빛에 위치까지 들통 날 게 분명했다.
“간단하다. 들어갈 수 없다면 돌아가면 그만이지.”
“돌아간다니, 그게 무슨….”
“따라와라.”
나는 어리둥절해하는 두 사람을 데리고, 성벽 위에서 비추고 있는 불빛들을 피해 조심스레 강을 건넜다.
사락-
무사히 해자 앞에 도착한 나는, 천천히 바닥을 훑으며 무언가를 찾았다.
“에릭, 뭘 그렇게 찾는 거냐?”
“보면 안다.”
달칵-
찾았다.
손에 쓸리는 모래들 사이로 유독 아래가 단단한 바닥을 짚은 나는, 곧바로 그 주변을 파내기 시작했다.
“아래에 뭔가 있습니까, 형님?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됐다. 그보다 어서 들어갈 준비하도록. 가지고 온 식량주머니부터 전부 들어라.”
난 금방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낸 손잡이를 보며, 곧장 철문을 열어젖혔다.
크그그긍-
“뭐, 뭐냐? 왜 이런 곳에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자세한 건 가면서 설명해줄 테니, 일단 들어오도록. 계속 밖에 있으면 들킬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망설임 없이 사다리를 타고 안쪽으로 들어간 나는, 사람 두셋 정도는 너끈히 지날 수 있는 먼지 쌓인 통로를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와보는군.
난 용사 시절 식량고에 하메른이 무너지기 직전, 저 혼자 살기 위해 기사와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연합의 수뇌부들을 호위하느라 이 길을 몇 번 오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혹여 도시를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병사들이 모두 싸우기를 포기하고 도망칠까, 영주가 최후의 최후까지 꽁꽁 숨기고 있던 비밀통로.
한 마디로 지금 이렇게 성벽 안팎을 오갈 수 있는 길이 또 하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 하메른의 영주인 오메른 후작과 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혀, 형님. 이건….”
“하메른의 지하수로와 연결된 통로다. 길만 잘 찾는다면 영주성 안쪽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더군.”
“…왜 도시에서 성문 밖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에릭. 넌 도대체 이 길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본녀가 셀파스트에게 들어 받아 적었던 정보들 중에 이런 건 없었을 텐데.”
그야 당연히 없었겠지.
아무리 셀파스트의 정보 수집력이 대단하다고는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곳곳에 심어놓은 첩자들을 움직여 알아내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오메른 후작이 어디 가서 이 비밀통로에 대한 얘기를 꺼내진 않았을 테니, 그가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어제 너희가 마차에서 자고 있을 때 들은 정보다. 따로 더 도움이 될 만 한 건 없나 싶어서 연락했더니 뒤늦게 알아낸 거라며 알려주더군.”
하지만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알려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적당히 얘기를 얼버무리며, 계속해서 통로를 나아갔다.
“으음, 그렇구나.”
“헌데 형님. 여기 정말 안전한 거 맞습니까? 전쟁 통에 숨어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첩자가 알아낼 수 있을 정도의 정보라면, 저쪽도 충분히 대비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라. 놈들이 정말 이곳을 신경 쓰고 있었다면, 지금 이렇게 통로에 먼지가 가득 쌓여있지는 않았겠지. 만일 녀석들이 이 앞을 지키고 서있다 하더라도, 뒤를 잡힐 일은 없다는 얘기다.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돌아가면 그만이다.”
난 황당하게도 술술 잘 풀리는 일에 의구심을 품으며 걱정을 늘어놓는 발라크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 또한 정말로 셀파스트에게 이 정보를 받은 입장이었다면, 혹여 인간들이 파놓은 함정은 아닐까 의심했을 테지.
“음? 에릭, 앞이 막혀있는 것 같은데. 혹시 길을 잘못든 거 아닌가?”
“아니, 이쪽이 확실하다. 그리고 애초에 중간에 갈림길도 없었지 않나.”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드디어 벽으로 가로막힌 통로를 보고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거의 다 왔군.
“그럼 어떻게… 혹시 이 위를 부수고 올라가기라도 해야 되는 건가?”
“정확히는 위가 아니라 앞이다. 혹시라도 장치를 놓았다간 수로를 관리하는 인부들이 우연이라도 건드릴까, 아예 막아버렸다더군.”
스릉-
곧바로 단검을 뽑아 든 나는, 시퍼런 검기를 피워 올리며 가능한 소음이 나지 않도록 깔끔하게 벽을 베어냈다.
첨벙-
“윽… 지독하구나.”
“말이 지하수도지, 도시의 폐수가 모이는 하수구나 다를 바 없으니 말이다. 본래대로라면 정화조도 있고 인부들이 주기적으로 청소를 할 테니 이렇게까지 악취가 심하진 않겠지만, 한창 전쟁 중에 그럴 겨를이 있을 리 없지. 조금만 참아라, 금방 올라갈 수 있을 테니.”
“으음, 알았다.”
난 벽을 무너트리기가 무섭게 훅 올라오는 하수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며, 얼른 코를 막고서 걸음을 옮겼다.
“젠장, 끈질긴 놈들. 도대체 밖에서 얼마나 진을 치고 있을 생각인지. 하루라도 빨리 지원군이 도착해서 확 몰아내버리면 좋겠는데.”
“조금만 참아. 아침에 황태자님께서도 오셨으니, 곧 수도에서도 군을 보내겠지. 그나마 하메른은 다행이야. 다른 도시들은 벌써 못 버티고 함락당하는 곳도 많은데, 여긴 적어도 그럴 걱정은 없잖아.”
“하긴. 제아무리 저 마왕군이 벨라노르를 넘었다하더라도, 저 해자를 건너서 이 성벽을 넘는 건 불가능할 테니 말이야.”
금방 수로를 통해 목표로 한 구역에 도착한 나는, 꼼꼼히 경비를 세워놨는지 위쪽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근처를 지나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는 걸 보아하니, 일단은 방금 저 두 명이 전부인가.
“카렌, 발라크. 준비해라. 빠르게 끝내고 다시 아까 그 통로로 돌아갈 테니.”
“끝낸다니, 뭘 끝낸다는 거냐?”
“이 위에 창고가 있다. 안에 군량이 들어있을지 무기가 들어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잘만 움직이면 수로를 통해 하나쯤은 더 태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메른에는 창고가 총 세 군데에 모여 있으니, 그중 둘을 처리할 수 있다면 굳이 피를 흘리지 않고도 쉽게 도시를 함락시킬 수 있을 거다.”
“그렇구나. 창고가… 녀석들을 말려죽일 속셈인 거로군.”
나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는 카렌을 보며, 조용히 검기를 끌어올렸다.
만일 이 위에 군량을 쌓아놨다면 머잖아 놈들을 굶주림에 허덕이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고, 무기를 쌓아놨다면 빗발치는 화살세례를 막아 병사들이 성벽을 넘을 수 있을 터였다.
어느 쪽이든 이후에 추가로 들어올 보급만 잘 끊을 수 있다면, 굳이 성문을 열려고 고생하지 않아도 낙승을 거둘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니까, 우린 이대로 잘 버티고만 있으면 된다는 거지. 나머지는 수도에서 지원군이 오면, 그때 같이 나가서 앞뒤로 놈들을 둘러싸서….”
서걱-
“응? 방금 어디서 뭔가 잘리는 소리 같은 게….”
푹-
“컥….”
“어, 어디서… 적습….”
촤악-
“카렌. 시작해라.”
“음. 걱정하지 마라. 태우는 건 본녀의 전문이니까.”
금방 경계를 서던 병사 둘을 처리하고 시체를 끌어 창고에 붙인 나는, 허공에 떠오른 시뻘건 불길을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타올라라.”
화륵-
이윽고 불덩이 여럿이 눈앞의 창고에 떨어지며, 순식간에 화마가 건물을 뒤덮었다.
“뭐, 뭐야? 갑자기 웬 불이….”
“차, 창고에 불이 붙었다! 다들 빨리 가서 꺼트려!”
난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금방 주변을 밝게 비치는 불길 사이로, 아까 뚫어놓은 수로를 가릴 수 있을만한 적당한 철판 같은 걸 찾았다.
“형님! 곧 인간 놈들이 도착할 거 같습니다, 서두르십시오!”
“그래, 지금 가겠다. 카렌! 이만하고 돌아오도록.”
“음!”
다행히 늦지 않게 창고를 덧대고 있던 철판 하나를 잘라 가져 온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불길을 쳐다보고 있는 카렌을 데리고 다시금 수로 안으로 들어갔다.
꾸국-
이윽고 가져온 철판을 구부려 대충 전에 막고 있던 것과 비슷하게 모양을 잡은 나는, 그걸로 살포시 위를 막고선 곧장 다음 창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조금 어설프긴 하지만,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단 약간은 시간을 벌어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