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에리스를 보내버리고, 이후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잠시 에란델에 머문 지도 어느덧 이틀이 지났다.
“자네, 그 소식 들었나? 그저께 있었던 그 화재 말일세. 엘프 놈들이 몰래 들여온 폭탄이 터진 거라고 하더구만!”
떠나기 전 잠시 주점을 찾은 상황이다. 나는 그때 여관에서의 일로 떠들썩한 주변을 둘러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마왕군을 막기 위해선 어떻게든 엘븐하임의 도움이 필요한 황태자와 마찬가지로 제국이 멸망하고 나면 자신들도 위험해지리라는 걸 아는 여왕이 어떻게든 소문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당연하게도 그만한 폭음과 화재를 동반한 일을 묻어버리는 건 불가능했다.
“폭탄? 그 광산 같은 데서 갱도나 넓힐 때 써먹는 그거 말하는 건가?”
“그래, 그거 말이여! 그 커다란 바위로 꽉꽉 막힌 갱도도 산산조각 내버리는 물건을 가지고,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겐지… 혹시라도 그게 광장 한가운데서 터졌다고 생각해보게!”
결국 폭탄에 관한 것은 물론, 엘프들이 그를 가지고 무언가 음흉한 수작을 부리려고 했다는 사실도 삽시간에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세상에… 그놈들 그거 연합인지 뭔지, 우리랑 잘해보겠다고 왔다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내 말이 바로 그걸세! 육시럴 놈들… 도대체 황태자님께선 무슨 생각으로 결국 연합을 받아들이신 건지. 아무리 그 마왕군인가 뭔가 하는 녀석들 때문에 난리도 아니라지만….”
아쉽게도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 자체를 무산시킬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억지로 연합을 밀어붙인 덕에, 인간과 엘프들의 사이는 틀어질 대로 틀어져 버리고 말았으니까.
딸랑-
기분 좋게 맥주를 들이켜고 이만 가게를 나온 나는, 곳곳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엘프와 인간들을 살폈다.
“저리 꺼져! 너희 엘프들한테 내줄 음식 같은 건 없으니까!”
“뭐, 뭐? 이 빌어먹을 인간 놈이… 연합은 어쩌고 이딴 대우를!”
“흥! 연합이고 나발이고, 네놈이 폭탄이라도 들고 있을지 어떻게 알고 가게로 들여보내?”
가뜩이나 이전에 마을에 들여 살던 엘프에게 경비병들이 죽임을 당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두 종족 간의 신뢰는 수인들과의 그것만큼이나 빠르게 떨어졌다.
더구나 원래부터 속으로는 타종족에 대해 배타적이었던 엘프들이었기에, 거리 곳곳에서 들려오는 멸시와 조롱에 버티지 못하고 무기를 뽑는 경우도 왕왕 보였다.
사실상 말이 연합이지, 붙어있는 원수나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었다.
“이, 이 개자식이 뚫린 입이라고 감히!”
스릉-
“그만! 여왕님께서 참으라 하지 않았나. 어차피 내일이면 출발이다.”
“크으으….”
철컥-
“…방금 봤어? 역시 엘프 놈들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마왕군이고 뭐고, 그전에 저놈들한테 먼저 뒤통수라도 맞는 거 아닐까 몰라.”
아쉽군.
며칠쯤 더 머물렀다면 꽤 재밌는 광경을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분노한 동료를 챙겨 자리를 벗어나는 엘프들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끼익-
“오셨습니까, 형님!”
“음. 떠날 준비는 마쳤나?”
“준비는 무슨, 애초에 짐이랄 것도 딱히 없지 않았나.”
여관방으로 돌아온 나는, 내일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채비를 마친 카렌과 발라크를 보고선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주억였다.
“그보다 에릭. 그 에리스라는 녀석은 어떻게 됐나. 듣자니 그때 엘프들한테 둘러싸여서 끌려간 이후론 어떻게 됐는지 얘기를 못 들은 거 같은데.”
“아, 그거 말인가.”
나는 카렌의 물음에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에리스 그년이 받게 된 처우를 떠올렸다.
그 일이 있던 직후 몇몇 수호자들에게 붙잡혀 엘븐하임으로 돌아갔다는 소식 외에는 따로 밖으로 나도는 게 없어 나 또한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다행히 오늘 하루종일 돌아다닌 주점들 중 어느 한 곳에서 대충 얘기를 주워들을 수 있었다.
“광장에 유일하게 엘프들을 손님으로 받는 술집이 있더군. 복장을 보아하니 수호자는 아니고 일반 병사였던 거 같지만, 그때 에리스에 대한 처우를 내리는 장소에서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고 하니 썩 믿을 만한 정보일 거다.”
대부분 제멋대로 일을 벌인 에리스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던 엘프들 사이에서, 그는 유일하게 안타까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두둔하고 나섰다.
하나뿐인 혈육인 제 동생을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나서고 싶었지만, 엘븐하임의 왕가는 그러다 혹시 에리스가 무슨 일이라도 벌일까 두려워 저들을 믿고 맡겨달라고 했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범인은커녕 그 꼬리조차 찾을 수 없었고, 석 달이 지나도록 진전이 없는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에 에리스는 지금이라도 자신이 찾아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왕가는 그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제국과의 연합을 추진하려고 했다.
그렇기에 무능한 왕가를 대신해 제 손으로라도 복수를 계획했다.
“그런 식으로 제 변호가 잘 먹혀들었던 모양이야. 결과적으로 직접적인 처벌을 받은 건 아무것도 없더군. 엘븐하임에 내려졌던 대저택과 수호자의 직위를 박탈당하긴 했지만, 그랜드 마스터라는 자리는 그대로. 사실상 그마저도 제국의 눈치를 봐서 어쩔 수 없이 내린 거라고 봐야겠지. 뭐 대충 그러리라 예상하고는 있었다. 애초에 마왕군과의 전쟁이 한창인데, 그녀만 한 전력을 그렇게 쉽게 내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럼 아무것도 잃은 게 없는 거 아닌가?”
나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눈살을 확 찌푸리는 카렌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겉으로만 보자면 그렇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에리스가 당장 무슨 처벌을 받았는지가 아니라, 이후에 엘븐하임 내부에서 차차 일어나게 될 일들이었다.
“당장 병사들 사이에 에리스의 얘기를 듣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가 생기지 않았나. 그랜드 마스터의 동생이 죽었는데도, 무능한 왕가는 저들을 믿으라고 해놓고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인간들을 돕기 위해 어떻게든 연합을 추진하고 병사를 보내려고 하고 있지. 그런데 지금 상황이 어떤가? 인간들은 수인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대놓고 적의를 보이고 있지 않나.”
“반발이 심해지겠군요, 형님. 저들 딴에는 목숨을 걸고 도우러 왔는데 취급이 그래서야, 절대 곱게 봐줄 수 없겠지요.”
“그래. 분명 여기저기서 불만이 튀어나올 거다. 북쪽에서 수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물론 그때는 서로 수뇌부들끼리 어떻게든 달래고 강경책을 써가며 사단이 벌어지는 것을 막았지만, 이번엔 쉽사리 잠재울 수 없을 거다.”
난 발라크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수인들은 원체 족장과 대족장들에 대한 경외가 강하고 그만큼 복종했기에 어떻게든 소란을 묻어버릴 수 있었지만, 엘프들은 달랐다.
“아무리 엘프들이 하이엘프들을 경외하고 그들의 말이라면 꿈뻑 죽는다고 해도, 수인들과 달리 하이엘프는 그 수가 한둘이 아니다. 더구나 에리스는 그 엘프와 하이엘프 모두에게 어울러 존경을 받던 녀석이지. 헌데 그런 그녀조차 왕가에게 믿음을 배신당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위에서 아랫놈들을 달랜다고 수인 때처럼 꾹 참고 넘어갈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오히려 더 크게 반발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물론 모두가 그러진 않겠지. 아무리 이번 사건에 그런 뒷사정이 있었더라도, 아직 왕가가 엘프들에게 가지는 상징성은 바래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수가 결국 들고 일어날 터였다.
에리스 또한 그들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겠지.
결국 엘프들은 안에서 분열하게 될 거다.
그리고 그럴수록 서로 파멸을 향해 달려가게 되겠지.
“으음, 그런가. 결국 엘프들 사이가 갈라질지도 모른다는 얘기로군.”
“분명 그렇게 될 거다.”
물론 갈라진다 해도 동족살해자의 오명을 뒤집어쓴 에리스에게 직접적으로 붙지는 않을 터였다.
다만 그 처지를 보고 생겨난 불만들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겠지.
자신들도 언제나 그녀와 같은 전철을 탈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게 될 테니까.
“그보다 카렌. 셀파스트한테 연락은 없었나?”
“음. 그렇지 않아도 얘기하려고 했었다. 네가 도착하기 전에 드디어 알아냈다고, 나중에 꼭 전해달라고 하더구나.”
좋아, 다행히 늦진 않았나.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카렌이 셀파스트에게 들은 정보를 받아쓴 걸로 보이는 종이를 건네받았다.
“하메른. 가고일과 서큐버스들이 노리고 있는 곳이라더군.”
“하메른… 그래, 하메른이란 말이지.”
나는 제국 중부, 서쪽으로 커다란 강을 끼고 있는 거대한 도시를 떠올리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반테온, 그리로 가는 건가.
“지금 출발한다.”
“음? 지금 말이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침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
“방금 마음이 바뀌었다.”
끼익-
“어, 어? 정말로 가는 건가, 에릭? 가, 같이 좀 가라!”
난 미리 두 사람이 싸놓은 짐을 챙기며, 빠르게 여관을 나서 마차에 올라탔다.
지금 출발하면 대충 닷새 뒤 저녁쯤이면 도착할 수 있겠군.
본래는 전쟁 중인 도시에 가봤자 당연하게도 성문을 지날 수 없기에 넉넉히 시간을 두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곳이 하메른이라면 얘기가 좀 달랐다.
서쪽에 끼고 있는 강물을 끌어와 성문 앞을 전부 수로로 둘러싼 그곳은, 용사 시절 내가 가장 오래 시간을 지냈던 도시 중 하나였다.
마왕군에게 사방을 둘러싸이고도 결국 그 괴물 같은 성벽과 수로를 넘지 못해, 기어코 식량이 다 떨어져 말라죽을 때까지 반년을 버텼던 제국 천혜의 방벽.
“반테온, 아마 절대 함락당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겠지.”
실제로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전에 사방을 모두 둘러싸고도 기어코 성벽을 넘지 못했던 도시를, 어떻게 고작 서큐버스와 가고일 두 군세만으로 물릴 수 있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도시의 비밀을 알고 있는 나만 없다면 말이지.
“지금 부수러 가주마.”
빌어먹을 황태자 놈.
저승에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