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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108화 (108/200)

제108화

“음.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간신히 주먹 하나 들어갈 크기로 2층 천장에 뚫어놓은 구멍과, 사다리 아래에서부터 여기저기 흩트려놓은 폭탄.

마지막으로 지난번 선물을 준비했을 때처럼 엘프들의 머리로 둥글게 원을 만들어놓은 나는, 적당히 근처에 숨어 에리스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터벅- 터벅-

“…왔나.”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누군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에 씨익 미소를 지으며, 시체에서 건진 단검 하나를 꺼내들었다.

끼이익-

잠시 동안의 침묵.

아래로 내려오는 문을 찾아 조심스레 연 그녀는, 섣불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툭-

난 갑작스레 위에서 훅 떨어진 무언가를 보며 흠칫 몸을 떨었다.

로브?

아무래도 배정받은 숙소에서 몰래 빠져나올 때 걸치고 온 물건인 것 같았다.

이쪽을 떠보려는 속셈인가.

뭣 모르고 움직였었다간 그대로 위치를 들키고 말았을 터.

기껏 먼저 자리를 잡고 판을 다 짜놨는데, 그리 쉽게 주도권을 내어줄 수는 없지.

스륵-

그렇게 또 말없는 대치가 이어지기를 몇 분.

결국 먼저 포기하고 움직인 건 저쪽이었다.

나는 언제든 기척이 들리면 곧장 쏠 수 있도록 팽팽하게 당기던 시위를 푸는 소리에, 슬며시 검기를 일으키며 자세를 다잡았다.

조금만 더 이렇게 시간을 끌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곧 소란을 듣고서 여왕이 도착할 때까지만 그녀를 붙들고 있으면 되는 내 입장에선, 참 아쉬운 일이었다.

쿵-

지금.

후웅-

난 활을 놓기가 무섭게 망설임 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에리스를 보며, 곧바로 손에 쥔 단검을 던졌다.

사악-

나는 당황하지 않고 허리를 비틀어 단검을 피하는 그녀를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아무리 기습을 한다고 해도, 녀석이 그리 쉽게 당해주진 않으리란 건 알고 있었다.

상대는 그랜드마스터, 한 종족의 정점에 다다른 실력자였으니까.

용사 시절에도 정면으로 부딪쳐선 쉽사리 승기를 잡을 수 없었던 그녀를, 지금 이 몸으로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좋은 기회를 그냥 걷어찰 수는 없는 노릇.

난 그대로 에리스의 옆을 지나쳐 바닥, 정확히는 미리 그 자리에 준비해놓은 폭탄에 꽂히는 단검을 보고선 조용히 다음 수를 준비했다.

콰앙-!

“큿….”

폭음과 함께 무너진 바닥 아래로 훅 떨어지다 말고 파편을 밟고서 다시 올라온 그녀는, 곧바로 내 쪽을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어지간하면 화살은 집어넣는 게 좋을 거다. 혹시라도 잘못 맞췄다간 다 펑하고 터져버릴 테니 말이야.”

나는 바닥과 벽 여기저기 흩뿌려놓은 폭탄들을 가리키며, 슬그머니 손을 들어올렸다.

“얄팍한 수를… 네놈이냐?”

“뭐가 말이지?”

난 까득 이를 물며 활을 내리는 에리스의 뒤로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피를 보고선, 가만히 어깨를 으쓱였다.

“네 부하들을 시켜다 기껏 힘들게 가져다 놓은 이 폭탄들을 어지럽혀놓은 녀석 말인가? 아니면 케레스라고 했던가. 그 별 볼 일 없는 멍청이의 목을 선물로 보낸 녀석 말인가. 그것도 아니면….”

스윽-

“제 언니를 애타게 찾던 동생을, 소원대로 네 곁에 보내준 녀석?”

“네노오오옴!”

후욱-

나는 제 동생의 얘기에 분노를 터트리며 검을 빼드는 에리스를 보고선, 환희에 찬 미소와 함께 손을 까딱였다.

카앙-!

“하하하하! 왜 그러지? 난 에리안의 바람을 들어준 것뿐인데 말이야. 제 하나뿐인 혈육의 은인을 이렇게 막 대해서야 쓰나.”

“그 더러운 입에, 함부로 에리안의 이름을 담지 마라!”

난 순식간에 내 목을 노리고 들어온 검을 아슬아슬하게 튕겨낸 시뻘건 장막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만 늦었어도 베일 뻔했군.

쩌저적-

나는 금방 금이 가기 시작한 장막을 보며, 곧바로 녀석을 향해 시퍼런 검기를 휘둘렀다.

후웅-

“그러고 보니 네 동생도 그랬었지. 그쪽은 한심하게도 나한테 화살을 다 뺏겨서 말이야. 결국 잘 쓰지도 못하는 날붙이라도 들고서, 어떻게든 날 막아보려고 하더군. 물론 볼 것도 없이 금방 붙잡혔지만. 흐흐.”

“닥쳐, 닥치란 말이다!”

난 가볍게 뒤로 뛰어올라 단검을 피한 그녀가 착지하기 전, 바닥을 박차고 따라붙어 떨어지는 몸뚱이를 향해 검기를 내질렀다.

카가각-

빌어먹을, 뭐 하나 제대로 통하는 게 없군.

그대로 썩 괜찮은 상처 하나쯤은 새겨두고 싶었는데.

나는 허공에 뜬 상태에서도 빙그르르 몸을 돌려 단검을 튕겨내는 에리스를 보고선, 입술을 꾹 깨물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군. 내가 알기로 엘프들은 동족을 배신하는 걸 가장 큰 죄악으로 여길 텐데 말이야. 아무리 내가 네 동생을 죽였다고는 해도, 어떻게 보면 또 동족을 팔아먹은 배신자를 대신 처리해준 것 아닌가. 오히려 감사를 받아도 모자랄 판에… 너희 엘프들은 다들 그렇게 은혜를 원수로 갚는 건가?”

“이, 이 빌어먹을 놈… 에리안의 죽음을 가지고 되도 않는 말장난을!”

덥군.

난 슬슬 카렌이 붙인 불이 번지기 시작한 듯 후끈해진 공기를 보며,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 녀석을 피해 바닥에 떨어진 머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보이나? 여기 있던 놈들 중에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있던 녀석인데 말이야. 도대체 내가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굉장히 궁금해 하더군. 그래서 대충 대답해줬지. 에리스, 네가 보냈다고.”

“개자식, 아까부터 촐랑촐랑 도망이나 다니면서 계속 쓸데없는 얘기를….”

“흐흐. 쓸데없는 얘기였는지 아닌지는 끝까지 들어보고 판단해야지. 어쨌든 말이야. 아쉽게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더군. 하지만 질문이 바뀌었어. 이번엔 누가 보냈냐고 묻더군. 그 뒤로 아무런 대답도 없이 가만히 놈을 내려다보고 있었더니, 점점 표정이 이렇게 바뀌더군.”

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새하얗게 질린 엘프의 머리를 에리스의 앞에 보란 듯이 흔들어대며, 천천히 입가를 히죽였다.

“이게 배신당한 사람의 얼굴이다. 네 동생도 그러지 않았나? 제가 살기 위해 동족들을 마구 팔아넘길 땐 몰랐겠지. 자기도 같은 표정을 짓게 될 거 라는 건 말이야.”

“닥쳐라! 에리안은, 에리안은….”

“설마 지금 동생이라고 감싸들려는 건가? 에리안이 아니지. 배신자잖나. 그것도 동족을 몇이나 팔아먹은 배신자.”

난 다시금 열기가 가라앉기 시작하는 건물을 보며, 슬슬 물러날 때가 됐음을 느꼈다.

“아, 그렇군. 그러고 보니 너도 지금 반기를 든 입장인가. 네 여왕은 인간들과 연합을 맺으려고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정작 그랜드 마스터라는 녀석이 부하들을 시켜서 어떻게든 그를 막으려들고 있으니. 이제 보니 같은 배신자였군. 자매끼리 아주 똑 닮았어.”

“크으… 닥쳐라! 그 빌어먹을 주둥이를….”

후웅-!

“흣….”

나는 아래층에서 우르르 들려오는 발소리에 씨익 미소를 지으며, 검기를 크게 휘둘러 그녀를 떼어냈다.

“아쉽지만 내 주둥이를 어떻게 하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 할 거 같군.”

“뭣… 설마 네놈, 도망을….”

난 슬그머니 발을 빼는 나를 보고선 악귀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기어코 활을 드는 에리스의 모습에, 곧바로 옹기종기 폭탄들이 모여 있는 바닥에 단검을 집어던졌다.

콰아아앙-!

“큿, 그런다고 내가 놓칠 것 같으냐!”

피잉-!

무너지는 바닥을 보고선 얼른 박쥐로 흩어져 미리 천장에 뚫어놓은 구멍으로 도망친 나는, 아래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화살을 쏘아낸 그녀를 보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군.

“크윽….”

2층과 마찬가지로 3층 바닥 아래 숨겨진 공간으로 들어와 흩어진 몸을 되돌린 나는, 피가 줄줄 흐르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한두 마리 정도 당했나.

어쩐지 중간에 통증이 훅 일더라니.

“에리스?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게 구멍 난 상처를 붙잡고 녀석이 쫓아오기 전에 자리를 뜨려던 나는, 아래쪽에서 들린 고함과 갑자기 기척이 잦아든 에리스를 보고선, 슬며시 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귀를 붙였다.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운 걸로도 모자라, 이건 동족들의… 설마 당신이 죽인 건 아니겠죠?”

“…비키십시오.”

“비, 비키라뇨? 에리스? 에리스!”

“에리스! 여왕님께 그게 무슨 무례입니까! 아무리 그랜드 마스터라고는 해도….”

“다들 비키라고!”

“뭐, 뭐야! 에리스 님… 이, 일단 잡아!”

타악-

난리도 아니군.

방금 전에 도망쳐온 구멍을 통해 슬그머니 아래를 내려다본 나는, 수호자들에게 붙잡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천장을 훑는 그녀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여왕님! 아까 그 폭발, 역시 난쟁이 놈들이 광산을 뚫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으로 일어난 것 같습니다.”

“이, 이건….”

난 뻥 뚫린 바닥 아래로 드러난 1층에서 주변에 떨어진 파편을 뒤져 무언가를 여왕에게 건네는 엘프를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에리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멋대로 자리를 비우고 여기로 왔는지. 그리고 동족들의 시체와 이 드워프들의 물건은 대체 뭔지. 빠짐없이 설명해주셔야 할 거예요.”

나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며 에리스를 내려다보는 여왕을 보고선, 흐뭇한 미소로 그들을 훑었다.

이 정도면 꼬리를 자르고 도망쳐볼 생각은 꿈도 못 꾸겠지.

“…당신들, 당신들 때문에! 그때 바로 쫓았더라면,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는데!”

“쫓다니, 그게 무슨….”

이런, 조금 더 즐기고 싶었는데.

난 이를 악문 채 위를 쳐다보는 녀석을 따라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수호자들을 보며, 황급히 몸을 떼고서 내가 잡은 방으로 올라왔다.

“음….”

폭발의 여파로 반쯤 무너져 내린 천장과 깨진 창문을 통해 웅성거리는 밖을 내다본 나는, 박쥐로 흩어져 뛰어내리기 전에 상처 입은 옆구리를 슬쩍 살폈다.

“훌륭하군.”

나는 벌써 반쯤 아문 구멍을 보고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만 여관을 나섰다.

여관 한 층을 완전히 날려버린 거대한 폭발과 동족의 시체. 그리고 앙숙인 드워프들의 지원을 받은 폭탄까지.

홀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잡힌 에리스의 처우가 어떻게 될지 그 자리에서 지켜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무리겠지.

배신자 그리고 동족살해자.

끝내주는 이명을 둘이나 얻었군.

마음껏 만끽하고 있어라, 에리스.

머잖아 다음에 볼 땐, 그때야말로 네 목을 베어줄 테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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