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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107화 (107/200)

제107화

“정말 다행이군요. 혹시라도 거절하시면 어떡하나 했습니다.”

“후후. 제국이 무너지면 저희 엘븐하임도 안전하지 않을 테니까요. 수인들도 그래서 손을 잡은 거잖아요?”

영주성의 저택 꼭대기에 있는 보스크로 자작의 집무실 안.

묵묵히 여왕의 뒤를 지키던 에리스는, 이미 인간들과 연합을 맺기로 마음먹은 듯 보이는 그녀를 보고선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이대로라면 마왕군이 제국을 점령하고 엘븐하임에까지 마수를 뻗치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 동생을 죽인 인간 놈들과 연합을 맺는 것은, 생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여왕은 적어도 이 대륙에서 마왕군을 몰아낼 때까진 어떻게든 분노를 참아달라고 했지만, 제 하나뿐인 혈육을 잃은 고통은 그리 쉽사리 억누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빌어먹을, 연합은 무슨….”

누구한테도 들리지 않게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에리스는, 입술을 꾹 씹으며 슬쩍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을까.

비록 눈앞의 황태자가 에리안을 죽인 범인은 아닐 테지만, 여기서 그를 처리한다면 단번에 회담을 결렬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머잖아 제국이 망하는 꼴을 볼 수 있을 터.

동생을 죽인 범인을 찾을 수 없다면, 그 용의자가 될 수 있는 인간들을 전부 없애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리스? 에리스?”

“아. 예, 여왕폐하. 말씀하십시오.”

잠시 가만히 바깥을 바라보던 그녀는, 연신 저를 부르는 여왕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혹시 어디 아픈가요?”

“아닙니다. 그저….”

“힘들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에리스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여왕과 눈을 마주쳤다.

“제 호위는 걱정하지 말고,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아무 일 없을 테니.”

그녀는 살짝 올라간 입 꼬리와 달리 전혀 웃고 있지 않은 눈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말이 배려지 사실상 축객령이나 다름없었다.

조건이야 어쨌든 서로 연합을 생각하고 앉은 자리에, 괜히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을 남겨두어선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거겠지.

동시에 상대를 믿고 호위를 물려도 괜찮다는, 굉장한 신뢰의 표현도 될 테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밖으로 나온 에리스는 곧장 근처를 지나던 시종을 불러, 아렌델에서 내어준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날, 예쁘장한 상자에 담겨 돌아온 제 동생의 머리를 끌어안고 복수를 다짐한 그때부터였다.

에리안의 넋을 달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던 왕가는, 그녀를 죽인 범인을 찾기보단 도리어 이쪽을 감시하는데 더욱 힘을 쏟을 뿐이었다.

물론 무슨 마음으로 그러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엘프들을 이끌고 무슨 문제라도 일으킬까 두려웠던 걸 테지.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렇게 나와선 안 될 일이었다.

저들을 믿고 기다려 달라던 왕가는, 제 믿음을 완전히 져버리고 말았다.

남은 건 그들의 염려대로,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끼익-

“그러니까 그때 숲에서… 아! 에리스님, 고생하셨습니다. 여왕님께서는….”

“아직 이야기중이세요. 혹시 모르니 누구 한 명 올라가서 문 앞에 호위를 서도록 하세요. 그보다 제 방은 어디 있죠?”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일은 잘 되어가고 있을까.

내일 회담이 열리기 전, 모든 준비를 끝마쳐야만 했다.

“여기, 이쪽입니다.”

“고마워요.”

“아, 아닙니다! 헤헤….”

안내역을 자처한 수호자를 따라 자신의 방으로 남겨놓은 문 앞에 도착한 에리스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내고선 천천히 문고리를 잡았다.

끼익-

“어서 연락을… 음?”

곧장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짐을 찾던 그녀는, 제 것이 아닌 물건이 하나 올라가 있는 책상을 보고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 이건….”

상자.

겉에 귀여운 토끼가 그려져 있는 빨간색 상자를 마주한 에리스는, 문득 제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한 기억에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비록 그때와는 색깔이 좀 다르긴 했지만, 분명 그놈이었다.

에리안을 죽이고 그 머리를 잘라 보낸 빌어먹을 녀석이, 이곳에 들어왔었던 게 틀림없었다.

“죽여… 기필코 죽여주마.”

도대체 어떻게 알고 제 방을 찾아 상자를 놓을 수 있었던 건지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복수.

그동안 애타게 바라왔던 제 동생의 원수를 갚을 때였다.

툭-

떨리는 손으로 상자 위에 놓여 있던 편지를 집어든 그녀는, 조심스레 밀랍을 뜯었다.

[어떻게, 지난 선물은 잘 받았을지 모르겠구나. 반년이 넘도록 답이 없는 걸 보아하니,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가. 이번에는 부디 만족할만한 선물이 되길 바라며 이를 부친다. 답장은 네 부하들이 작당모의 하던 그 여관에서 받도록 하마.]

“어, 어떻게….”

악귀처럼 인상을 찌푸린 채 편지를 쭉 읽어 내려가던 에리스는, 마지막에 적힌 내용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왕의 명을 따라 저를 감시해온 호위들조차 의심만 늘어놓을 뿐 꼬리를 잡지 못한 제 계획을, 이 씹어 죽일 놈이 대체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서, 설마 안쪽에 배신자가… 아니, 그럴 리가….”

혼란스러운 머리를 붙잡고 고개를 도리질 치던 그녀는, 이내 손에 든 편지를 구기며 정신을 다잡았다.

배신자가 있든 없었든,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누군가 자신의 계획을 알고 그를 이용해 저를 부르고 있다는 건, 자칫하면 일이 엎어질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그렇게 되면 에리안의 복수는커녕, 제가 엘븐하임에서의 일구어놓은 모든 것이 무너져버릴 터였다.

“…그래, 원하는 대로 해주마.”

결국 에리스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편지에 적힌 내용을 따라, 제 계획을 따르는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는 것.

이 빌어먹을 자식의 뜻대로 움직이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지만, 어차피 녀석을 잡아 죽이기 위해선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스륵-

조용히 로브를 둘러쓰고 무기를 챙긴 그녀는, 호위들 몰래 방을 나서려다 창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다시 책상을 돌아봤다.

달칵-

“케, 케레스….”

조심스레 상자를 연 에리스는, 그 안에 들어있던 머리를 꼭 끌어안으며 방울진 눈물을 뚝뚝 흘렸다.

도대체 무얼 봤는지 새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은, 경악한 표정으로 눈조차 감지 못한 채 조금씩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절대, 절대 편히 죽진 못할 거다. 살려달라고… 아니, 제발 죽여 달라고 빌게 될 거다.”

제 동생에 이어 백년이 넘는 세월을 동고동락해온 제 충직한 부하마저 잃어버린 그녀는, 너무 세게 깨물어 찢어진 입술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천천히 방을 나섰다.

* * *

카렌과 발라크를 데리고 지난번 그 엘프들이 묶고 있던 허름한 여관 앞에 도착한 나는, 그 건너편에 있는 후미진 골목에 두 사람을 세워두고선 작전을 설명했다.

“이해했나, 카렌?”

“음. 여기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엘프계집이 와서 안으로 들어가면, 몰래 저 여관에 불을 지르라는 거 아니냐.”

“그래, 바로 그거다. 그리고 발라크, 너도 경비들이 오면 안쪽에 엘프들이 있다고 외치는 걸 잊지 말도록.”

“예, 형님.”

선물을 발견한 에리스가 편지에 적힌 대로 이곳을 찾아오면, 엘프들이 화재에 휘말렸다는 소식을 퍼트려 여왕과 그 호위들을 불러 모은다.

그리고 그들이 올라올 때까지, 어떻게든 에리스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안쪽에 붙잡아놓으면 끝이었다.

딸랑-

“어서 옵쇼. 응? 손님은 저번에….”

“3층으로 주십시오.”

곧장 여관 안으로 들어선 나는, 저번처럼 3층 열쇠를 받고선 2층으로 올라갔다.

“…영주성에 황태자가? 젠장, 폭탄을 들고 거기까지 들어갈 순 없을 거 같은데. 설령 어떻게든 숨기더라도 건물을 터트릴 수 있을 만큼 챙기는 건 무리야.”

“어쩔 수 없지. 그 호위들이라도 노리는 수밖에. 다행히 그쪽은 광장에 있는 여관에서 머물 생각인 모양이더라고. 물론 진짜배기는 다 황태자 옆에 붙어있겠지만, 어차피 중요한 건 누굴 죽이느냐가 아니라 회담을 무산시키는 거니….”

스억-

“뭐, 뭐야? 침입….”

푸욱-

방을 나와 복도를 돌아다니던 두 놈을 빠르게 해치운 나는, 품에서 천을 꺼내 바닥에 튄 피를 닦고서 시체를 끌고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끼기기긱-

이윽고 이 아래에 있는 공간의 구조를 떠올리며 적당한 곳을 찾아 바닥을 뜯어낸 나는, 구석에서 열심히 위쪽으로 폭탄을 올리고 있는 녀석을 보고선 슬그머니 시체를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툭-

“음? 방금 무슨 소리….”

뚜둑-

“어이, 뭐해! 쉬지 말고 빨리 올리라고!”

그대로 몰래 뒤를 잡아 놈의 목을 부러트린 나는, 위에서 들려오는 짜증 섞인 목소리에 씨익 미소를 지으며 사다리 옆에서 기다렸다.

“젠장, 이젠 대답도 없… 어, 어어?”

후욱-

뻐억!

“컥….”

나는 신경질을 팍팍 부리며 직접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아래로 내려오는 녀석을 잡아 던지고선, 적당히 목을 찔러 마무리한 뒤 천장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 둘, 셋… 다섯? 아니, 여섯 명.

좋아, 이제 번거롭게 돌아다닐 필요 없겠어.

“뭐야? 발이라도 헛디뎠어? 방금 무슨 소리….”

아래에서 발소리를 통해 먼저 처리한 넷을 제외한 나머지가 전부 한 방에 모인 것을 확인한 나는, 지체 없이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흐억! 누, 누구….”

“치, 침입자다! 어서 케레스 님… 아니, 에리스 님에게….”

촤악-

금방 눈 깜짝할 사이에 여섯을 모두 정리한 나는, 시체들을 질질 끌고서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이걸로 잔챙이들은 모두 정리했고, 남은 건 에리스가 올 때까지 그녀를 상대할 준비를 마치면 끝이었다.

언제 도착할지 모르니 조금은 분주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을 거 같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에리스.

곧 지옥에 떨어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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