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케레스를 죽이고 깔끔하게 뒷정리를 마친 뒤, 숲을 떠나 무사히 에란델로 돌아온 지도 어느덧 나흘이 지났다.
“좋아, 다행히 안 썩었군.”
나는 카렌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얼음에 파묻혀있던 머리를 꺼내 들어, 편지가 붙어 있는 상자 안에 쏙 집어넣었다.
이걸로 선물은 준비됐고, 이제 받을 사람만 도착하면 되는군.
드륵-
“에릭, 지금 나가는 건가.”
“음. 녀석이 언제 올지 모르니, 성문 앞에 가서 좀 기다리고 있을 생각이다.”
“조심히 다녀 오십시오, 형님!”
상자를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방을 나섰다.
설마 먼저 도착한 건 아니겠지?
“저, 저기 봐! 저 마차는….”
“다들 빨리 무릎 꿇고 엎드려!”
금방 광장을 지나 성문이 보이는 근처에 도착한 난, 그 앞에 우글우글 모여 웅성거리는 인파를 보고선 슬쩍 바깥을 살폈다.
“저 문양은….”
나는 성문을 막 통과하고 있는 화려한 모양새의 마차를 발견하고선, 그 앞에 크게 새겨져 있는 굉장히 익숙한 문양의 장식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황금으로 음각된 검과 왕관.
제국에서 그 둘이 함께 그려진 문양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황가.
난 혹시나 눈에 띌세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으며, 엎드린 고개를 살짝 들어 마차 안에 타고 있는 녀석이 누군지 살폈다.
“황태자님의 행차시다! 다들 고개를 조아리거라!”
“흐음. 엘프들은 아직인가.”
황태자.
나는 무심한 눈으로 바깥을 훑는 녀석을 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
그 빌어먹을 황제의 이목구비를 쏙 빼닮은 놈의 얼굴은, 그저 잠시 스쳐보는 것만으로도 스멀스멀 눈썹이 꿈틀댈 지경이었다.
반테온 프리디리히.
작은 명군, 인류의 빛.
올곧은 심성과 탁월한 정치적 수완. 그리고 어릴 적부터 가제프에게 사사받은 훌륭한 검술과 뛰어난 계책을 부리는 머리까지.
그를 찬양하는 말과 수식어를 늘어놓자면 종이 한 장을 가득 채워야 될 정도로, 제국민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녀석이었다.
“허억, 헉… 황태자님! 죄, 죄송합니다. 제가 밖에서 모셨어야 했는데….”
“하하. 괜찮네. 귀공도 영지에 머무는 엘프들을 신경 쓰느라 바빴을 테지. 그보다 오늘 하루 묶을 곳을 좀 먼저 보고 싶구나. 한 열흘 전까지만 해도 전장을 돌아다니다 급히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고 오느라, 나뿐만 아니라 호위들도 제대로 쉬질 못해서 말이다.”
반테온… 그 구역질 나는 성격은 여전하군.
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심드렁했던 얼굴은 어디 가고, 급히 저를 맞으러 나온 영주를 향해 괜찮다며 미소를 지어 보이는 녀석을 보고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실상은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추악하고 더러운 쓰레기에 불과한 주제에, 군중 앞에서 가증스럽게 연기하는 모습이 참 역겨웠다.
“빌어먹을 놈….”
나는 용사 시절, 녀석이 전쟁에서 패주한 이방인들을 격려라는 이름으로 제 막사에 불러들이고선 안에서 벌였던 일들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기술자들을 불러다가 다시는 도망칠 수 없게 해주겠다며 발목을 끊는 것은 물론, 마왕군에 맞설 용기를 기르게 해주겠다며 누군가 하나 죽을 때까지 싸움을 붙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나온 시체를 들개의 먹이로 주고선 깔깔거리며 웃던 것까지.
“후우….”
끓어오르는 분노에 잠시 거칠어진 숨을 내뱉으며 마음을 진정시킨 나는, 이내 영주성으로 들어가는 녀석의 마차를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여, 여왕님의 마차다!”
“아아… 세계수 어머니의 가장 위대한 가지시여!”
난 이번엔 엘프들이 무릎을 꿇고 성문을 향해 마치 기도를 드리듯 두 손을 모으는 것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왔구나.
에리스.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
“영주, 영주는 어디 있나!”
“감히 여왕님께서 행차하셨는데 마중조차 나오지 않다니, 이 무슨 무례한 대접이냐!”
나는 무어라 불만을 토해내며 앞장서는 하이엘프들 사이로 무뚝뚝하게 인상을 쓰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눈으로 그녀를 쫓았다.
“모두들 그만하도록 하세요. 이곳 영주님께서도 무언가 사정이 있는 것이겠지요.”
“…예, 여왕님. 인간 놈들, 여왕님의 자비에 감사한 줄 알거라!”
아주 쇼를 하는군.
난 일부러 호위들을 시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뒤, 저 혼자 선한 인상을 독차지해 대중을 휘어잡으려는 여왕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엘프들의 본성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평범한 제국민들을 상대로는, 나름대로 잘 먹히는 전법이었다.
어차피 종족, 국가의 인상은 그 지도자에 대한 평가가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법이었으니까.
타국이 왕이 회담의 참여를 위해 제 영지를 찾았음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는 영주를 보며 분노하는 호위들과, 오히려 그들을 다그치며 그를 이해하는 여왕.
이 얼마나 아름다운 미담인가.
다만 그 사정을 아는 사람이 보기엔,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운 촌극으로 비친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후욱, 훅… 죄,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 황태자님을 모시느라… 제가 이곳 에란델의 영주인 보스크로 자작입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영주성으로 모시겠습니다.”
“후후. 괜찮아요. 그런 사정이 있으셨다면 어쩔 수 없지요.”
나는 그새 황태자를 데려다 놓고 엘프 여왕을 맞으러 나온 영주를 보며, 안쓰러움에 지그시 고개를 저었다.
참 바쁘군, 바빠.
덜컹-
난 그대로 자작의 안내를 따라 영주성으로 향하는 마차를 보며, 천천히 그 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내 다른 하이엘프들과 달리 여왕의 호위로서 같이 안쪽으로 들어서는 에리스를 보고선, 곧바로 그녀가 머물게 될 곳을 찾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바로 짐을 푸실 수 있도록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나는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잠시 저택 앞에 남겨진 이들을 이끌고 어딘가로 향하는 시종을 보며, 조심스레 그들을 살폈다.
“이쪽입니다. 1층에 있는 방들 중에 아무데나 원하시는 곳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군.”
“근처에 제대로 된 초목하나 없는 건 좀 찝찝하지만, 숲 밖에서 그런 걸 기대하는 건 무리겠지.”
담장 위로 고개를 내밀어 그들을 놓치지 않게 따라가던 나는, 저택 뒤쪽에 손님을 맞는 용도로 보이는 적당한 크기의 건물로 들어가는 엘프들을 보고선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곤란하군.
이래서야 에리스가 개중 어느 방으로 들어갈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저 건물에서 지낼지조차 의문이었다.
그녀는 다른 하이엘프들과는 달리 평범한 호위가 아니라, 엘븐하임의 그랜드마스터였으니까.
“…아무래도 안으로 들어가서 직접 알아봐야겠군.”
이내 짧은 고민을 마친 나는, 영주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근처를 서성였다.
다행히 내일 있을 중요한 회담을 위해 다들 정신없이 영주성 안팎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약간의 준비만 마친다면 큰 문제없이 경비를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도 사야 되고 저것도 사야 되고, 으… 뭐 이렇게 필요한 게 많아.”
“어이쿠, 또 영주님 심부름인가?”
“네, 엘프 분들께서선 대부분 고기를 안 드시는 모양이더라고요. 대신 싱싱한 과일이나 채소를 좀 많이 준비해달라고 하셔서….”
마침 적당히 나와 체격이 비슷한 시종을 발견한 난, 엘프들을 위한 식재를 구하기 위해 바쁘게 광장을 돌아다니는 녀석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허억, 헉… 이제 마지막 과일 하나만 더 구하면… 흐악!”
툭-
데구르르-
“과, 과일이… 아! 죄, 죄송합니… 읍!”
가게 앞 골목에 숨어있다 그가 앞을 지나가는 순간 일부러 몸을 부딪친 나는, 바닥에 떨어져 흙이 잔뜩 묻은 물건을 보고선 울상을 짓는 녀석을 붙잡아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읍, 으읍….”
뚜둑-
입이 꽉 틀어 막힌 채 발버둥을 치는 놈의 목을 분지른 난, 녀석의 옷으로 갈아입고선 시체를 치우기 위해 송곳니를 드러냈다.
콱-
“윽….”
빌어먹을, 오늘 입맛은 다 버렸군.
나는 혀에 닿기가 무섭게 구역질이 올라올 만큼 역겨운 핏물을 억지로 다 넘기고선, 삐쩍 마른 시체를 밟아 부스러트렸다.
“그러니까 어제 그놈이… 음? 잠깐, 거기 정지.”
“예?”
로브를 벗어 품이 넉넉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상자를 꺼내 영주성으로 향한 나는, 척 보기에도 수상한 상자를 들고 있는 나를 불러 세우는 경비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상자는 뭐냐.”
가능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랐건만.
나는 어김없이 상자에 대해 물어오는 그를 보고선, 속으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 이거 말씀이십니까? 엘프분들 중에 누가 선물을 좀 부탁하셔서 말입니다.”
“선물?”
“예. 엘븐하임으로 돌아가실 때 꼭 가져가고 싶은 물건이 있으시다 하셔서요.”
“음. 혹시 한 번 열어봐도 되나?”
제기랄, 거 참 귀찮게 하는군.
적당히 말을 지어내 넘어가려고 했던 난, 어떻게든 끝까지 내용물을 확인해보려고 하는 그를 보며 눈살을 팍 찌푸렸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괜히 여기서 더 의심을 살 바에야, 차라리 밤중에 몰래 들어와서 저택을 한바탕 뒤지는 게 더 나을 거 같은데.
“왜 대답이 없나. 안에 뭐 들키면 안 되는 물건이라도 들어있는 건 아니겠지?”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나.
마지막으로 한 번 강하게 나가보고, 안 되면 일단 도망치는 수밖에.
그렇게 되면 밤중에 경계가 더 삼엄해지긴 하겠지만, 적당히 창을 통해 안쪽을 살피는 정도라면 딱히 상관없을 터였다.
“괜히 귀한 손님께서 부탁하신 물건에 손을 댔다가, 뭔가 문제라도 생기는 건 아닐까 싶어서요. 만일 그랬다간 저는 물론이고 경비병님도 책임을….”
“으, 으음….”
좋아, 통하는군.
나는 책임이라는 말에 흠칫 몸을 떨며 슬쩍 시선을 피하는 그를 보고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긴 이제 막 중요한 회담을 앞두고 모두들 민감해져 있는 상황에서, 괜한 사건에 휘말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지나가라.”
“예, 고생하십시오.”
난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길을 터주는 녀석의 옆을 지나, 그대로 아까 엘프 호위들이 들어갔던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디 보자….”
에리스가 머물게 될 방은 어딜까.
가능하면 이 안에 있었으면 좋겠는데.
“…찾았다.”
시종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건물 외벽에 붙어서 창을 통해 슬그머니 안쪽을 살피던 나는, 머무는 사람 없이 아직 뭣하나 풀지도 않은 짐만 덩그러니 놓인 방을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곳엔, 어딘가 굉장히 익숙한 모양새의 무기 하나가 떡하니 벽에 세워져 있었다.
그 모습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릴리스와의 결전 이후, 내 목을 꿰뚫은 화살을 쏘아냈던 바로 그 활을 말이다.
달칵-
나는 그대로 잠겨있던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준비해온 상자를 책상 위에 살포시 올리고선 영주성을 빠져나왔다.
이제 남은 건 에리스를 불러들일 장소에 먼저 가서, 그녀가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