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이놈!”
끄극-
나는 이를 으득 갈며 팽팽하게 시위를 당기는 케레스를 보고선, 조용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같잖은 수를 쓰는군.
피잉-
난 이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쏘아진 화살을 보며, 내가 아닌 보다 옆쪽으로 날아드는 그것을 빠르게 쳐냈다.
“뭣… 어, 어떻게….”
나는 설마 자신의 노림수가 막힐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놈의 얼굴을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멍청하긴. 그럼 그런 뻔히 보이는 수법에 당해줄 줄 알았나? 에리스, 그 멍청한 년이 연기하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았나보군.”
시선.
누구든 일부러 의식하지 않는 이상, 눈은 자연스레 제가 노리는 대상을 쫓기 마련이었다.
난 방금 전까지 중간중간 내가 아닌 카렌의 위치를 살피던 녀석의 시선을 떠올리며, 보란 듯이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네놈… 감히 그 더러운 주둥이로, 함부로 에리스 님을 욕보이지 마라!”
파앙-!
이제야 제대로 나를 보는군.
나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빠르게 화살을 쏘아대는 그를 보고선,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앙-! 캉!
“크윽….”
침착하게 화살을 쳐내며 금세 녀석을 코앞에 둔 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는 녀석을 향해 깊숙이 단검을 내질렀다.
쐐액-
제법 날래군.
난 유려한 몸놀림으로 날을 피해 옆으로 벗어나는 케레스를 보며, 곧장 연이어 무기를 휘둘렀다.
카앙-!
녀석은 제 목이 달아나기 직전,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아슬아슬하게 단검을 쳐냈다.
“음.”
나는 찌르르 울리는 손목에 눈살을 팍 찌푸리며,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과연, 수호자 자리는 거저로 딴 게 아니라는 건가.
그 짧은 시간에 검기를 일으켜 공격을 맞받아친 것도 대단했지만, 단순히 신체능력부터가 수준이 달랐다.
하긴 그러니까 그랜드 마스터인 에리스의 옆을 지킬 수 있었던 거겠지.
물론 그래봐야 여기서 죽을 목숨이겠지만 말이다.
“허억, 헉… 젠장, 숨이….”
역시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그 불덩이 속에서 아무런 상처도 없이 살아나왔을 리가 없지.
난 몇 번 합을 나누지 않았는데도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까부터 연신 거칠게 숨을 토해내는 모습이, 아무래도 불길 속에서 버티는 동안 폐가 많이 타버린 모양이었다.
“크으… 케레스 님!”
“오지 마! 너희들은 도망쳐라.”
“하, 하지만….”
“잔말 말고 어서! 한 명이라도 꼭 살아서, 이 사실을 에리스 님께 알려야한다!”
몇 명 아직 숨이 붙어있었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저를 돕기 위해 나서는 엘프들을 향해 고개를 내젓는 케레스를 보고선, 슬그머니 놈들을 향해 팔을 들어올렸다.
“흐읍!”
후웅-
난 그 모습에 여태껏 가능한 거리를 벌리려고 했던 것과 달리 제 쪽에서 먼저 들어오는 녀석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하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볼 생각인가. 그거 참 눈물겹군 그래.”
“후욱… 닥쳐라!”
카앙-!
나는 목숨을 던질 각오를 마친 듯 갈수록 거칠게 검을 휘둘러오는 그를 보며, 급할 거 없이 천천히 공격을 받아냈다.
어차피 굳이 내가 도망치는 놈들을 쫓지 않더라도, 카렌과 발라크가 알아서 놓치지 않고 모두 처리할 터였으니까.
이럴 때를 대비해 함정도 그렇게 많이 준비해놨고 말이지.
“다들 흩어져! 뭉치지 마! 적은 두 명뿐이니까, 전부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면 한 명 정도는….”
쩌억-!
“이쪽은 걱정 마십시오, 형님.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겠습니다.”
난 가장 먼저 한 놈의 머리를 으깨며 믿음직한 목소리로 한쪽을 지키는 발라크를 보고선,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흐흐, 멍청하긴!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우리를 잡겠….”
으직-
“흐, 흐어억!”
걸렸군.
나는 함정이 없는 길목 앞을 가만히 지키고 서있는 발라크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다 사라진 녀석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뭐, 뭐냐! 갑자기…”
촤악-!
“크학!”
난 꽤 멀찍이 달아났다 싶으면 하나둘씩 아래로 사라지는 제 부하들의 모습에 잠깐 멈칫한 케레스를 보고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그의 팔을 깊게 베었다.
“아윽….”
“이런, 싸우는 도중에 한눈을 팔아서야 쓰나. 지금 그렇게 남들 걱정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툭-
난 쥐고 있던 검을 떨구며 덜렁이는 팔을 부여잡는 녀석을 보고선, 비릿한 미소와 함께 천천히 피 묻은 단검을 들어올렸다.
“이런 젠….”
푸욱-
“아, 아아아악!”
그대로 남은 멀쩡한 팔에 날을 쑤셔 박은 나는, 비명을 지르며 언제 집었는지 모를 화살촉을 떨구는 놈의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들어라. 난 이대로 널 죽인 다음, 네 머리를 잘라서 에리스에게 보낼 거다.”
“허윽, 큭… 머, 머리? 설마… 네, 네노오오옴!”
나는 내 말에 휘둥그레 눈을 뜨며 이내 악귀처럼 얼굴을 구기는 녀석을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궁금하지 않나? 그년이 네 복수를 위해 움직일지 말지.”
“무슨 짓을…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거냐! 네놈, 그분께 감히 손끝하나라도 건드렸다간….”
꾸욱-
“컥….”
“쉿.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그러다 근처에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난 분노로 가득 차 고함을 지르는 케레스를 보며, 조용히 그의 목을 꾹 죄었다.
“걱정하지 마. 직접 어떻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다만 어디, 누가 애지중지 모아놓은 폭탄이라도 잘못 건드려서 스스로 터져버릴지는 또 모를 일이지.”
“케헥, 켁….”
지금.
나는 이어진 얘기에 점차 경악으로 물들어가는 녀석의 표정을 보며, 그때를 놓치지 않고 검기를 일으켰다.
서걱-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상대를 쓰러트렸습니다.]
[힘이 ‘2’ 증가합니다.]
[민첩이 ‘2’ 증가합니다.]
[체력이 ‘1’ 증가합니다.]
[마력이 ‘1’ 증가합니다.]
[레벨이 증가합니다.]
난 목이 졸려 새하얗게 질린 얼굴까지 완벽한 놈의 머리를 보고선, 만족스러운 미소로 그를 챙겨들었다.
그리고 목 위를 잃은 시체를 보며, 천천히 송곳니를 드러냈다.
콰악-
달콤해.
꿀럭꿀럭 입 안을 가득 채우는 핏물에,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고귀한 하이엘프 수호자, ‘케레스’를 흡혈했습니다.]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힘이 ‘2’ 증가합니다.]
[민첩이 ‘3’ 증가합니다.]
[체력이 ‘2’ 증가합니다.]
[마력이 ‘1’ 증가합니다.]
“프흐….”
나는 금세 삐쩍 말라붙은 시체를 아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다, 이내 입가에 묻은 피를 핥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발라크, 카렌. 도망치던 놈들은 어떻게 됐지?”
“전부 다 놓치지 않고 잡았습니다, 형님!”
“음. 아직 몇 명 살아있는 놈이 있긴 하다만, 어차피 출혈 때문에 구덩이 안에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을 거다.”
음, 그런가.
어쨌든 놓친 녀석은 없다는 얘기군.
“그럼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 놈들은 내가 가서 마무리할 테니, 잠시 시체를 한곳으로 몰아넣고 있도록.”
“예, 형님.”
“과연,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으니 그래야겠지. 알겠다.”
자, 그럼 뒷정리를 시작해볼까.
“흐어….”
“거기 있었군.”
아래에서 신음이 흘러나오는 구덩이들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닌 나는, 하필이면 창날이 급소를 피해 고통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엘프들을 보며 조용히 그들을 위로 끌어올렸다.
“아, 으… 제브알, 주겨….”
푹-
[레벨이 증가합니다.]
“음, 이걸로 끝인가.”
그렇게 직접 숨통을 끊어준 녀석이 네 명.
나는 더 이상 주변에서 들려오지 않는 신음을 보며, 마지막 시체를 들고 카렌과 발라크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툭-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그래, 너희도 수고했다. 그럼 카렌, 부탁하마.”
“음, 알겠다.”
화륵-
난 시체가 가득 쌓인 구덩이 아래로 툭 떨어지는 불씨를 바라보며, 이내 활활 치솟는 불길을 쬐면서 그동안 얻은 보상을 정리했다.
[에릭 가이오스]
[뱀파이어]
[레벨 : 67]
[힘 : 190][민첩 : 197]
[체력 : 187][마력 : 154]
훌륭하군.
이 정도면 머잖아 용사였을 적을 따라잡을 수 있겠어.
나는 다해서 700을 훌쩍 넘은 능력치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만 천천히 동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에릭, 어디로 가는 거냐. 도시는 저쪽이다.”
“도시? 무슨 소리냐. 발라크, 카렌. 너희도 어서 와서 이걸 들어라.”
나는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카렌을 향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입구 옆 바닥에 푹 꽂혀있는 삽들을 챙겨들었다.
“그, 그건… 에릭, 설마….”
“이제 구덩이를 전부 메워야 돌아갈 수 있다. 자, 빨리 가서 쉬고 싶으면 분주하게 움직이도록.”
“아, 아아….”
난 기어코 삽을 건네받고선 울상을 짓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내 해가 다 질 때까지도 삽을 놓지 못한 우리는, 꼬박 새벽이 되어서야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