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완벽하군.”
대장간에서 물건을 받아 구덩이 함정을 마무리한 나는, 자칫 이쪽이 빠져버릴지도 모를 만큼 자연스러운 마감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하암… 음? 에릭, 설마 안 자고 계속 그러고 있었던 건가?”
혹시나 싶어 종이에 지형을 그리며 함정을 설치한 곳을 표시하던 난,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동굴에서 나오는 카렌을 보고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어쩐지 주변이 밝더라니.
나는 어느덧 붉게 떠오른 노을을 보고선, 조용히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본디 숲에 사는 엘프들의 날카로운 눈썰미로도 쉽사리 발견할 수 없게 함정의 완성도를 높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밤을 새고 만 모양이었다.
“으음, 어제 분명 조금만 더 하고 들어오겠다더니. 이러면 본녀가 너무 미안해지지 않느냐. 안 되겠구나. 엘프 놈들이 오면 그때 깨워줄 테니, 가서 조금이라도 눈 좀 붙이고 있거라.”
“굳이 그럴 필요는….”
“씁! 괜한 고집부리지 말고, 어서 들어가거라.”
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동굴 안쪽으로 떠미는 그녀를 보고선, 하는 수 없이 어색한 미소로 걸음을 옮겼다.
“아, 카렌.”
“무슨 일인가. 뭐 필요한 거라도 있나?”
“음. 너에게 필요한 거다.”
“…본녀한테 말이냐?”
동굴 안에 들어가기 전.
잠시 입구 앞에서 멈춰 카렌을 부른 나는, 아까 열심히 그리고 있던 공터 주변의 지형도를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건….”
“거기 가위표가 쳐진 곳이 함정이 있는 곳이다. 알고 봐도 그 자리에 구덩이가 있는지 긴가민가할 정도로 기가 막히게 만들어놨으니, 어지간하면 거기 표시된 근처로는 가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으, 으음. 명심하겠다.”
나는 생각보다 많이 그려진 표식을 보고 놀란 듯 흠칫 몸을 떠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간단한 지형도 같은 것쯤이야 용사 시절에 질릴 만큼 그려봤으니, 딱히 못 알아보고서 함정을 밟을 일은 없을 터였다.
“…형님?”
“아, 발라크. 미안하구나. 아무래도 내가 깨웠나 보군.”
난 내 발소리에 잠이 깬 듯 부스럭거리며 일어난 발라크를 보고선, 멋쩍은 얼굴로 그를 살폈다.
“괜찮습니다. 원래 일어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형님, 설마 지금까지 안 주무고 계셨던 겁니까?”
“으음, 뭐… 걱정하지 마라. 그래서 지금이라도 눈 좀 붙이러 온 거니까.”
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카렌이랑 똑같은 소리를 내뱉는 녀석을 보고선, 나지막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잡고 누웠다.
“아, 그리고 나가면 바로 카렌한테 지형도 좀 보여 달라고 하도록. 안 그러면 엘프 녀석들을 맞이하기도 전에 네가 먼저 함정에 걸려버릴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지형도 말씀이십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음.”
난 이만 고개를 숙이고선 동굴을 나서는 발라크를 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졸리군.
방금 전까진 함정을 다듬는 데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확실히 몸이 피곤하긴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 * *
“…릭, 에릭.”
“으음….”
차가운 동굴 바닥에 누워 잠에든지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느낌에 정신을 차린 나는, 아직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떼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프들이 오고 있다. 지금 빨리 가지 않으면,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기다릴 수 없을 거다.”
“알겠다, 바로 출발하지.”
나는 손에 든 지형도를 힐끔거리며 나를 다그치는 카렌을 보고선, 곧바로 공터를 향해 동굴을 나섰다.
“아, 형님. 일어나셨습니까?”
“음. 지금 엘프들은 어디쯤 있지?”
“그러니까… 여기랑, 이쯤입니다.”
그대로 동굴 근처의 나무 위에서 숲을 내려다보고 있던 발라크와 합류한 나는, 지형도를 보고 그 위에 두 지점을 골라 찍는 녀석을 보고선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다행히 늦지는 않겠군.
“카렌, 조심해라.”
“음?”
“그 앞에 함정이다.”
“흐익! 그, 그런 건 좀 한 번에 쭉 말하거라!”
유심히 종이를 살피며 함정을 피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나는, 꽤 여유롭게 두 엘프 무리보다 먼저 도착해 적당한 수풀을 찾아 몸을 숨겼다.
드르륵-
왔나.
난 이번에도 케레스보다 한 발 먼저 도착해 마차를 세우고 기다리는 엘프들을 보며, 조용히 그들의 머릿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짐칸에서 빈 상자를 꺼내고 있는 녀석까지 정확히 열 명.
다행히 누구 하나 빠지거나 더 추가된 인원은 없는 거 같았다.
부스럭-
“다들 오늘도 먼저 와있었구나.”
“케레스 님을 뵙습니다!”
나는 곧이어 엘프 몇을 더 데리고 모습을 드러낸 케레스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놈.
머잖아 이곳이 제 무덤이 될 줄도 모르고, 바보같이 서있는 꼴이라니.
“전에 말했던 대로 이게 마지막이다. 이번까지만 들키지 않고 잘 들여보낸다면, 사실상 이번 작전은 성공이라고 볼 수 있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젠 경비병들 모두 저희한테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으니 말입니다. 개중엔 아예 적당히 얼굴만 확인하고 들여보내는 놈도 있지 뭡니까.”
“흠. 그거 참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로군. 아무리 그래도 회담이 코앞인데, 그렇게 대충 검문을 건너뛰고 사람을 들여보내서야 쓰나.”
난 금세 빈 상자와 폭탄이 가득 든 상자를 맞바꾼 두 무리를 보며, 슬그머니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 금방이군.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케레스 님!”
“그래. 혹시 모르니 다들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도록. 이번 거사는 절대로 실패해선 안 된다. 고귀하신 에리스 님을 위하여.”
“에리스 님을 위하여!”
드르륵-
나는 둘 중에 먼저 도시로 향하는 마차를 보고선, 놈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짐은 다 실었나?”
“예, 케레스 님!”
“좋아. 우리도 이만 돌아간다.”
지금.
난 막 마차에 올라탄 케레스를 보며, 바로 옆 수풀에 숨어있던 카렌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휙-
“그럼 출발하겠….”
푹-
나는 마부석에 앉은 엘프가 마차를 몰길 시작하기 전에, 들고 있던 단검을 던져 그의 머리를 꿰뚫었다.
“뭐냐. 밖에 무슨 일 있나?”
그대로 녀석에게 달려가 깊숙이 박힌 단검을 빼낸 나는, 움직이지 않는 마차에 슬쩍 천막을 여는 케레스를 보고선 시체의 목을 꼿꼿이 세웠다.
“엘리노? 엘리노!”
난 이미 죽은 줄도 모르고 제 부하의 시체를 향해 언성을 높이는 그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젠장, 도대체 뭐하는 거야! 거기, 아무나 나가서 무슨 일인가 확인해보도록.”
“예, 알겠습니다!”
나는 결국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다른 부하를 시켜 바깥을 살피려는 녀석을 보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엘리노! 지금 도대체 뭐하는 거야? 케레스 님이 몇 번이고 부르셨는데….”
“에릭, 조금만 더 나오거라.”
“음, 알았다.”
난 고개를 푹 숙이고 미동조차 않는 제 동료를 향해 다가서는 엘프를 뒤로하고, 카렌의 말을 따라 마차에서 더욱 멀찍이 떨어졌다.
“엘리… 응? 뭐, 뭐야! 인간….”
나는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서 흠칫 물러서는 녀석을 보며, 슬그머니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미 너무 늦었어.
“파이어 볼.”
번쩍-
난 카렌이 시동어를 내뱉기 무섭게 눈부신 광채를 뿜어내는 스태프를 보고선, 혹시 그 사이 누군가 도망칠 것을 대비해 검기를 훅 끌어올렸다.
“인간? 지금 밖에 인간이라고….”
촤륵-
나는 인간이라는 소리에 황급히 천막을 젖히며 밖으로 나오는 케레스를 보고선, 조용히 입가를 이죽였다.
화르륵-
“저, 저건 무슨….”
난 곧 녀석이 모습이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화염구가 눈앞에서 떨어지고 있는 걸 보며, 그 무시무시한 열기에 몇 발짝 더 뒤로 물러섰다.
“도, 도망….”
콰아아앙-!
“크읏….”
나는 이내 거대한 폭음과 함께 휘몰아치는 거센 열풍에, 팔을 들어 올려 앞을 가로막고선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타닥- 탁-
“카렌, 이만하면 됐다. 슬슬 불을 끄도록.”
“지금 말인가? 하지만 아직….”
“저 안에 살아남은 놈들이 있다 한들, 나와 발라크가 처리하면 그만이다. 어서!”
“으, 으음. 알겠다.”
난 내 호통에 천천히 고개를 주억이며 불을 흩트리는 카렌을 보며,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수 있도록 슬쩍 몸을 숙였다.
여기서 케레스와 그 부하들을 모두 죽이는 것도 분명 중요한 일이었지만, 그만큼 먼저 도시로 떠난 놈들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을 방지하는 것 또한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아마 그대로 계속 불길을 내버려 뒀다간, 끝도 없이 치솟는 연기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녀석들이 바퀴를 돌렸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치이익-
“크으으… 젠장, 웬 놈이냐!”
“…대단하군. 설마 거기서 그렇게 쉽게 살아나올 줄이야.”
나는 적어도 온몸에 화상은 입었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너무나도 멀쩡한 녀석을 보며, 나지막이 감탄을 내뱉었다.
“네놈, 인간이 아니구나. 설마 마족? 도대체 무슨 꿍꿍이냐!”
난 잠시 지그시 나를 살피더니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활을 꺼내 드는 케레스를 보고선, 조용히 단검을 하나 더 뽑아 들었다.
“으윽, 케레스 님….”
“아, 아파. 온몸이, 뜨거….”
그래도 다행히 멀쩡한 건 녀석 혼자뿐인가.
나는 누구 하나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닌 나머지 엘프들의 모습에,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직접 저 하늘 위에서 확인해보도록.”
스륵-
난 뒤늦게 뽑은 단검에도 검기를 확 피워 올리며, 천천히 자세를 다잡았다.
생각보다 놈이 너무 팔팔해 보이긴 했지만, 오히려 더 좋았다.
본래 짓무른 상처가 있었을 선물을, 더 깔끔하게 준비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