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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103화 (103/200)

제103화

아무리 에리스를 추종하는 엘프들이 회담에 참여할 인간들을 암살하려고 했다 한들 그리고 그 증거가 남아있다고 한들, 고작 그것만으로는 그녀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었다.

그들이 제멋대로 저지른 거다.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꼬리를 잘라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물론 그렇게 하면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불신을 살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됐든 책임은 피할 수 있을 터였다.

“으음….”

그러니 녀석을 확실하게 나락으로 보내기 위해선, 본인을 직접 그 장소로 불러내는 수밖에 없었다.

엘프들이 드워프들과 내통하고, 인간들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증거들이 모여 있는 곳.

아까 그 여관의 바닥 아래, 폭탄들이 잔뜩 숨겨져 있는 그곳으로 말이다.

“좋아, 이만하면 잘 썼군.”

그를 위한 첫 번째 초석.

에리스에게 전달할 편지를 모두 작성한 나는, 꽤 유려한 글씨로 크게 적힌 내용을 다시 훑고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지난 선물은 잘 받았을지 모르겠구나. 반년이 넘도록 답이 없는 걸 보아하니,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가. 이번에는 부디 만족할만한 선물이 되길 바라며 이를 부친다. 답장은 네 부하들이 작당모의 하던 그 여관에서 받도록 하마.]

고이 접어 밀랍으로 편지를 봉한 나는, 종이와 같이 사 온 예쁘장한 상자에 그를 붙이고선 흐뭇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릭. 잘 썼다니, 무얼 말이냐?”

“…그런 게 있다.”

나는 옆에서 주인장이 문 앞으로 가져다준 저녁을 먹고 있던 카렌의 물음에, 어물쩍 말을 넘기며 조용히 내 몫을 들었다.

“혹시 엘프들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형님?”

“음.”

이제 남은 건 에리스가 도착하길 기다리며, 상자에 채워 넣을 선물을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닷새 뒤라고 했던가.

마침 그때가 마지막이라고 했으니, 뒤처리만 깔끔히 마친다면 적어도 거사를 치르는 놈들이 그 사실을 알고 중간에 도망칠 일은 없을 터였다.

물론 나 혼자 숲에서 케레스를 포함한 엘프 여럿을 모두 상대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만…

“카렌, 발라크. 일이다. 닷새 뒤… 아니, 그보다 하루 먼저 숲으로 간다.”

“숲?”

“알겠습니다, 형님.”

두 사람의 도움이 있다면 충분히 다 잡을 수 있을 터였다.

거기에 혹시나 도망치는 놈이 있다면 절대 놓치지 않도록, 함정 같은 것도 몇 개 준비해놓는다면 완벽하겠지.

* * *

카앙-! 캉-!

대부분의 가게가 아직 문을 닫은 이른 새벽.

광장에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쇳소리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선 나는, 입구부터 썩 괜찮은 물건들이 늘어서 있는 대장간을 보고선 조심스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캉!

“아직 시간 안 됐수. 올 거면 조금 있다 오쇼.”

난 발소리에 잠시 망치를 놓고 흠뻑 젖은 땀을 닦아내는 주인장을 보며, 믿음직스러운 표정으로 매대를 살폈다.

“여보쇼! 영업시작 안 했다니까? 빨리 나가지 않으면 경비병을 부를 테니….”

짤그랑-

나는 작업을 하다말고 인상을 팍 찌푸리며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를 보고선, 조용히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 들었다.

“여기 있는 창들. 제가 전부 사겠습니다.”

난 드워프들이 만든 무기들만큼은 아니지만 어지간한 대장간들의 간판급 장비보다 더 훌륭한 품질의 창을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를 모두 가리켰다.

“저, 전부 다 말씀이십니까. 손님?”

“음. 그리고 가능하면 창고에 있는 것도 좀 보고 싶은데.”

“아이고, 물론이죠! 여기 잠시만… 아니, 직접 들어오셔서 보시겠습니까?”

나는 번쩍번쩍 빛나는 금화들을 보고선 단숨에 태도가 바뀐 주인장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하긴 지금 매대에 올라가 있는 것과 벽에 걸려 있는 창들만 하더라도 서른 개 남짓 되는 수였다.

이 정도 품질의 무기라면, 적게 잡아도 하나에 은화 스물은 줘야 할 터.

거기에 창고에 박혀있을 재고들까지 처리할 수 있다면, 단번에 금화 열 개 이상 가는 매출을 올리는 것도 꿈이 아니었다.

끼이익-

“자, 여기 이쪽입니다. 원하는 만큼 둘러보시지요.”

“으음.”

밖에서 봤던 건물의 크기만큼이나 꽤 넓은 창고 안으로 들어온 나는, 한쪽 구석에 그득히 쌓여 있는 창들을 보고선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왼쪽에 있는 것들은 상태가 그다지 좋다고는 못하겠군요. 관리를 소홀히 한 건 아닌 거 같은데.”

“허허. 손님, 무기 보시는 눈이 상당하시군요. 실은 그쪽에 있는 건 제가 아니라 조수들이 만든 것 중에,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걸 가져다 놓은 겁니다. 물론 품질은 제 기준에 한참 못 미치긴 하지만, 모든 분들이 항상 최고의 물건만을 원하시는 건 아니니까요.”

그야 그렇겠지.

누구든 가능하면 좋은 무기를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아무래도 사람마다 주머니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었으니까.

“그럼 일단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밖에 진열된 것들이랑 같이 계산해주십시오.”

난 아무리 함정을 만들 때 쓸 물건이라고는 해도 너무 수준 미달인 녀석들은 옆으로 슬쩍 치운 뒤, 그 옆에 있는 물건들만을 가리키며 한 움큼 금화를 집어 들었다.

“이, 이걸 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나는 창고를 보자는 말에 내심 기대하긴 했어도 설마하니 정말로 이렇게까지 살 줄은 몰랐는지 눈이 휘둥그레진 주인장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예순하나, 예순둘, 예순셋… 다해서 금화 아홉에 은화 서른 개 되겠습니다!”

음, 생각보다 그리 비싸진 않군.

창고에 있던 것들은 대충 밖에 진열해놓은 물건의 절반을 받는 건가.

차르륵-

“그, 금화 열 개 받았습니다! 그럼 은화를….”

“아. 혹시 남은 걸로는 뭐 좀 만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아, 네. 물론 해드려야지요. 어떤 걸 원하십니까. 대검? 아니면 갑옷?”

난 여기서 더 돈을 쓴다는 얘기에 함박미소를 지으며 귀를 기울이는 그를 향해, 조용히 여관에서 준비해온 도안을 꺼내 들었다.

“이건….”

“가능하면 잘 부서지는 재질로 부탁드립니다. 개수는 될수록 많으면 좋고요.”

“아, 알겠습니다. 헌데 가져가시는 건 어떻게….”

“이틀 뒤에 한 번에 찾으러 오겠습니다.”

딸랑-

“안녕히 가십시오, 손님! 그때까지 꼭 전부 만들어놓겠습니다!”

이만 계산을 모두 마치고 가게를 나온 나는, 건물 밖까지 따라 나와 연신 허리를 숙이는 주인장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역시 돈이 좋긴 좋다니까.

* * *

푸욱-

“음.”

대장간에 주문을 맡기고 카렌과 발라크와 함께 숲으로 들어온 지 이틀.

나는 여기저기 깊게 파여 있는 구덩이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로 삽을 내려놓았다.

“으으… 에릭, 이제 다 끝난 건가? 더 이상 팔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구나.”

“고생 많았다. 나머지는 대장간에서 물건을 받아온 다음에 하도록 하지. 이만 동굴에 가서 쉬고 있어라.”

난 팔을 축 늘어트리며 바닥에 푹 쓰러진 카렌을 보며, 조금은 미안한 마음으로 그녀를 부축해 동굴로 향했다.

원래대로라면 내일부터 데려와 일을 시킬 생각이었지만, 생각보다 함정에 쓸 창을 많이 구한 터라 어쩔 수 없었다.

나 혼자서는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울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덕분에 엘프들을 맞을 준비는, 본래 계획했던 것보다 더 성대하게 마칠 수 있을 듯했다.

“나, 나머지? 뭐가 더 남았단 말이냐?”

“그야 당연히 구덩이를 팠으면 아래에 무기를 꽂아야겠지. 그리고 당연히 위쪽도 가려야 할 테고 말이야.”

“그런….”

나는 또 다시 일할 생각에 울상을 짓는 카렌을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래도 구덩이를 파는 것만큼 힘들진 않을 테니까.”

“형님, 저쪽도 다 끝냈습니다!”

“음. 너도 고생 많았다, 발라크.”

난 저 멀리서 온몸에 흙을 묻힌 채 달려오는 발라크를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난 이만 갔다 올 테니, 여기서 다들 얌전히 기다리고 있도록.”

“예, 형님!”

나는 내게서 카렌을 넘겨받고 동굴로 향하는 그를 보며, 곧바로 마차를 타고 도시로 향했다.

케레스가 다시 공터를 찾을 때까지 앞으로 이틀.

그리고 회담이 열리는 날은 그로부터 정확히 닷새 뒤였다.

물론 그 당일에 막 도착하지는 않을 테니, 에리스가 이곳 에란델에 머무는 건 대충 엿새 뒤부터가 되겠지.

카앙-!

금방 성문을 지나 도시 광장에 도착한 나는, 맑은 쇳소리가 흘러나오는 건물 앞에 마차를 대고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끼이익-

“부탁한 물건은 다 됐습니까?”

툭-

난 이틀 전과 마찬가지로 가게 한구석에서 열심히 쇠를 두드리고 있는 주인장을 보며, 창고 앞에 한가득 쌓여 있는 얇은 판 앞에 섰다.

이게 부탁했던 그 물건인가 보군.

생각보다 괜찮게 잘 나왔는데.

“아이고, 오셨습니까. 손님! 지금 거의 다 완성된 것까지 해서 열두 개 정도 만들었는데. 어떻게, 마음에 드십니까?”

“예. 개수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만, 혹시 강도는….”

“부탁하신 대로 아주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낙네 혼자 위에 올라가더라도 뚝 부러질 물건이지요.”

그는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창고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아마 모양이 잘못 나와 빼놓았던 걸로 보이는 판을 가져와서 보란 듯이 양팔로 뚝 부러트렸다.

“어떠십니까.”

“음. 아주 훌륭하군요. 그럼 마차에 좀 같이 실어주시겠습니까?”

“하하! 물론이지요. 하지만 일단 저 남은 하나를 마저 마무리해야 하니, 애들을 시켜서 같이 옮겨드리겠습니다. 거기! 어서 와서 이 손님 좀 도와드리거라.”

나는 싹싹한 미소와 함께 저 대신 조수를 붙이고선 다시 망치를 잡으러 가는 주인장 보며, 우선 창고 한쪽에 따로 모아놓은 창을 들고 가게를 나섰다.

번쩍-

“…좋아.”

엘프 놈들이 과연 어떤 비명을 들려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

난 빛을 받아 시퍼렇게 번뜩이는 창날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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