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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100화 (100/200)

제100화

“흐으, 아깝구만. 도시가 그렇게 빨리 함락되지만 않았어도, 재미 좀 더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패잔병들을 쫓아 멀리까지 나갔던 부대들이 모두 돌아온 밤.

덕분에 한숨 푹 자고 일어난 나는, 어딘가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는 투마왕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기왕이면 조금 늦게 움직이지 그랬나. 모처럼 썩 괜찮은 상대를 만났는데, 이렇게 찝찝하게 끝나버려서야 원.”

“하하… 그래도 그 상대, 제가 미리 귀띔해드렸지 않습니까.”

“으하하! 농담이네, 농담. 그보다 그 성녀라는 자는 좀 어땠나? 좀 강하던가?”

나는 내 등짝을 팡팡 두드리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그를 보고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마왕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수준은 아닐 겁니다. 애초에 성녀는 앞에 나서 싸우는 전사가 아니니까요.”

난 지금쯤 얼굴을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에 이를 갈고 있을 메리엘을 떠올리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흐흐, 그렇구만. 헌데 이제부터 어떡할 생각인가. 자네만 괜찮다면 이대로 합류해서, 같이 그 수인 놈들을 잡으러 북쪽으로 가도 괜찮을 거 같은데 말이야.”

“제안은 영광입니다만, 아쉽게도 이미 어디로 향할지 정해놔서 말입니다.”

“으음, 그런가. 아쉽구만. 그럼 오늘이라도 푹 쉬었다 가게. 그리고 혹시 뭐 필요한 거 없나? 마음 같아선 훈장이라도 주고 싶지만, 이번엔 자네가 세운 공이 워낙 겉으로 티가 안 나서 말이야. 그 대신이라고 하긴 조금 그렇지만, 원한다면 군량이라도 한가득 실어주겠네.”

필요한 거라.

나는 마왕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조용히 고민에 잠겼다.

“그리 급히 생각할 거 없네. 그저 출발하기 전에만 와서 말하게나.”

“…아뇨. 그럼 염치불구하고 하나만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그렇게 부담가질 필요 없네. 편히 말하게나. 자, 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

그 녀석, 아직 떠나진 않았겠지.

난 셀파스트와 했던 약속을 떠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기 좀 받을 수 있겠습니까?”

“고기?”

“예, 대충 대여섯 명이서 배부르게 먹을 정도면 됩니다.”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탁상을 두드렸다.

“으하하하! 그래. 내 사람을 시켜 군량을 맡은 녀석에게 일러놓을 테니, 가서 마음껏 들고 가게! 아, 그렇다고 다 가져가려고 하지는 말고. 생각보다 얼려놓은 게 양이 많거든.”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그래, 편히 들어가게. 거기, 밖에 누구 있나!”

“예, 악투스 님! 부르셨습니까!”

나는 곧바로 막사 앞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를 부르는 악투스를 보며, 천천히 천막을 나섰다.

* * *

투마왕이 있던 건물을 나와 곧장 일행들이 머무는 막사로 돌아간 나는, 그들 모두를 이끌고 한가득 고기를 챙겨 어느 건물 앞에 도착했다.

“…에릭, 정말로 여기가 맞나?”

“음, 분명 이 건물이라고 하긴 했는데….”

동문 근처에 있는 초록색 지붕의 여관.

셀파스트가 수정구를 통해 일러준 대로 어찌 그 앞에 도착하긴 했건만, 이미 반쪽이 무너져 내린 건물을 보아하니 선뜻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이거 안전한 거 맞겠지?

“참 취향이 특이한 녀석인 거 같습니다, 형님. 사천왕이라면 충분히 더 좋은 곳에서 머물 수 있을 텐데.”

“소문대로, 괴짜.”

고민도 잠시.

이내 마음을 다잡은 나는, 곧바로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가장 끝 방이라고 했던가.

그나마 반파된 곳에선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라 다행이었다.

똑똑-

“셀파스트, 나다.”

“아, 에릭! 마침 딱 알맞게 도착했네.”

끼이익-

나는 노크를 하기가 무섭게 반가운 얼굴로 문을 여는 셀파스트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지러울 정도로 꼬리를 붕붕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 같아서 절로 입 꼬리가 솟았다.

물론 이쪽을 보고 그러는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내 손에 들린 고기를 보고서 그러는 거였지만 말이다.

“으음, 고기 냄새… 응? 그쪽은….”

“내 일행이다. 같이 들어가도 되겠나?”

“흐음… 뭐, 좋아. 원래 처음 보는 손님은 별로 반기지 않는 주의지만, 다들 빈손은 아닌 거 같으니까. 게다가 누구는 안면 정도는 튼 사이인 거 같고.”

“그럼 잠깐 실례하지.”

난 어깨를 으쓱이며 옆으로 비켜선 그를 지나쳐, 천천히 방 안쪽을 훑었다.

녀석 또한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인지, 저번처럼 발 디딜 틈조차 없이 어질러져 있지는 않았다.

“자, 일단 고기는 다 이쪽에 내려놔. 스읍… 이게 대체 얼마만의 고기인지. 그동안 더럽게 맛없는 밀빵만 뜯어먹느라 얼마나 괴로웠다고. 이 빌어먹을 마왕군은 도통 활동비를 지원 안 해준단 말이야. 물론 서로 쓰는 화폐가 다르니, 중간계로 넘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나는 미리 주방에서 가져다 놨는지 구석에서 불판을 꺼내는 셀파스트를 바라보다, 저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꼬리만 바닥에 살랑거리고 있는 누군가를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셀레스트, 거기서 뭐 하고 있나.”

“…설마 그러고 있으면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하는 건가?”

“읏….”

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떠는 셀레스트를 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에 그녀가 했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자그마치 몇 년 만에 제 오빠를 마주한 자리일 텐데.

설마 우리가 도착하기 전부터 계속 저러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에릭. 어제 피, 너무 마신 거 아니야?”

“으음… 그런가. 새벽에 열심히 훈련할 때까지만 해도 멀쩡해 보였는데 말이지.”

“지, 지금도 아직 멀쩡하다! 이건 그냥, 그냥 저 망할 오빠 때문에….”

나는 울컥하며 드디어 이쪽을 돌아보는 녀석을 보고선, 조용히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아까부터 계속 콧노래를 부르며 고기 구울 준비를 하고 있는 제 오빠를 보고선, 무어라 입을 뻥긋거리다 이내 체념한 듯 이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후우, 좋아. 이제 고기만 올리면 되겠어. 아, 셀레스트. 이제 화는 다 풀린 거야?”

“화는 다 풀렸냐고? 8년 전, 나한테 아무 말도 없이 혼자 멋대로 무리를 떠난 주제에. 그동안 연락 하나 없이 얼굴도 안 비추고 살다가, 이틀 전에 기껏 처음으로 건넨다는 말이 어떻게… 웁!”

“됐다. 남매싸움은 나중에 하고, 우선 고기부터 먹도록 하지. 이러다 다 타겠군.”

난 불판을 둘러싸고 앉기가 무섭게 축 가라앉은 분위기에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그동안 꾹꾹 눌러놓았던 말을 내뱉는 셀레스트의 입에 고기를 가득 쑤셔 넣었다.

“으음….”

나는 입 안 가득 들어찬 고기에 꼬리를 흔들면서도 중간중간 자신을 노려보는 동생의 모습에 말없이 침음을 흘리는 셀파스트를 보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용사 시절 기어코 그를 붙잡아 죽이기 전에 연신 제 동생 걱정을 늘어놨던 것을 생각해보면, 아무 이유도 없이 혼자 무리를 뛰쳐나온 것은 아니었을 텐데.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될 것을, 무엇 하러 이리 돌아가려 하는지.

“음, 이거 맛있구나!”

“고기, 맛있어.”

“형님, 형님도 어서 드셔보십시오!”

난 가만히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다, 곧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는 고기를 향해 눈을 돌렸다.

안타깝긴 하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남의 일에 그리 신경을 쏟아붓고 있을 만큼, 지금이 한가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카르네몬을 떠나기 전에 굳이 그를 찾아온 것도, 단순히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듣고 싶은 정보가 있기 때문이었으니까.

“셀파스트. 아까 부탁한 건 어떻게 됐나.”

“우움. 구거 마리냐.”

“다 먹고 말해라, 다 먹고.”

나는 쉴 새 없이 고기를 집어 먹느라 양 볼이 빵빵해진 채로 급하게 내용물을 삼키는 셀파스트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마찬가지로 셀레스트 또한 옆에서 한시도 손을 멈추지 않는 걸 보아하니, 확실히 남매는 남매인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건 그냥 육식을 좋아하는 늑대인간들의 모두의 특성인 걸지도.

“음. 그거라면 이미 저 책상 위에 따로 준비해놨어. 제국 서부, 엘프들의 동향에 대한 정보. 맞지? 아직 거기까지 숨어든 애들이 없어서 대부분 흘러들어온 소문들밖에 없지만, 그래도 꽤 흥미로운 게 몇 개 있더라고.”

흥미롭다라.

난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책상으로 향하는 녀석을 보고선,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종이를 받아들었다.

“우선은 그게 전부지만, 에릭 네가 원한다면 개인적으로 조금 더 조사해볼게. 이번엔 또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무언가 재미있는 일을 꾸미고 있는 거 같은 냄새가 나니까.”

나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셀파스트를 보고선, 씨익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부탁하지.”

“응. 뭔가 알아낸 게 있으면 따로 연락할게. 아니면 그쪽에서 먼저 연락해도 괜찮고.”

난 고개를 주억이며 마저 고기를 집는 그를 보고선, 조용히 종이 뭉치를 품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벌써 다 먹은 건가?”

나는 분명 넉넉하다 못해 차고 넘칠 정도로 싸 왔는데 어느새 바닥을 보이는 고기를 보며,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늑대인간 남매를 훑었다.

“뭐, 뭘 그렇게 보는 거냐. 나만 먹은 게 아니다! 거기 있는 용족 아가씨도, 옆의 악마족 꼬맹이도 많이 먹었단 말이다!”

“…난 아직 아무 말도 한 적 없다.”

“그으윽… 바, 밥 먹는 데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 모르나? 이건 내거다.”

난 별로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제 접시를 가리는 셀레스트를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딱히 뺏어 먹을 생각도 없었는데 말이지.

“형님, 모자라시면 제 거라도 좀 드시겠습니까?”

“에릭, 먹을래?”

“으음, 됐다. 그다지 배가 고픈 건 아니니까.”

나는 이윽고 금세 동이 난 고기를 보며, 썩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셀파스트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온 나는, 품속에 챙긴 종이를 꺼내 천천히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에리스.

난 그 속에서 그녀가 복수를 위해 갈아놓은 것으로 보이는 칼날의 흔적을 발견하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거 잘만 하면 그대로 제 등을 찌르도록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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