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이거야 원. 남들은 제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데, 성녀라는 작자가 저 혼자 살자고 도망치는 꼴이라니. 이게 바로 교단이 그리 울부짖던 여신님의 사랑인가?”
“네놈, 어디서 함부로 주둥이를….”
“닥치세요!”
입가를 이죽이며 단검을 빼든 나는, 꾹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고함을 내지르는 메리엘을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성격이 나오려나 보군.
“감히… 감히 그 더러운 주둥이로 여신님의 뜻을 논하다니! 한낱 부정한 미물 따위가!”
번쩍-
나는 악에 받친 소리를 내뱉으며 허공에 빛 무리를 띄워 올리는 그녀를 보고선, 이만 조용히 자세를 다잡았다.
“벨!”
“성녀님, 진정하십시오. 여기서 소란을 일으켰다간 들킬 가능성이….”
“지금 여신님을 모욕한 종자를 눈앞에 두고서, 가만히 손을 놓고 있으란 얘긴가요?”
난 저 조그만 크기에 어마어마한 신성력이 응축되어 있는 빛 무리를 보며, 식은땀을 주륵 흘렸다.
아마 스치기만 해도 새까맣게 타버리겠지.
피한다면 전부 피할 수는 있겠지만, 이어서 날아들 저 호위기사의 일격까지 흘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금방 처리하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이 절대로 그를 날릴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그들은 지금 어디까지나, 몰래 전장을 빠져나온 입장이었으니까.
바보가 아니고서야 제 스스로 눈에 띄는 짓을 벌이진 않을 터였다.
스으으-
나는 김빠지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잦아든 빛 무리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벨. 부디 저를, 그리고 기회를 주신 여신님을 실망시켜드리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난 꾸벅 고개를 숙이고선 천천히 검을 뽑아드는 호위를 보며, 조용히 검기를 일으켰다.
말로는 녀석에게 맡기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어떨지는 봐야 아는 법이었다.
그리고 제가 믿는 여신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악행도 서슴지 않는 저 빌어먹을 년의 특성상…
번쩍-!
“그럼 그렇지.”
후웅-
나는 잠깐 허공에 반짝이더니 곧바로 이쪽으로 쇄도하는 빛 무리를 보며, 황급히 고개를 꺾었다.
비록 방금처럼 강대한 신성력이 담겨있진 않았지만, 닿는다면 제 호위에게 충분히 기회를 만들어줄 수 있는 수준은 되어보였다.
카가각-
“아무래도 네 주인은 널 믿지 못하나 보군.”
“상관없다. 악을 멸할 수만 있다면 고작 믿음을 받는 것이 무얼 그리 중요할까.”
난 뒤이어 내 몸을 반으로 가를 기세로 휘둘러오는 검을 받아내며, 다시금 저 멀리서 날아오는 빛을 피해 뒤로 물러섰다.
번쩍-!
치이익-
“큿….”
나는 방금 전까지 내가 대치하고 있던 자리에 떨어져 환하게 주변을 감싼 빛을 보며, 온몸이 타들어 가는 통증에 입술을 꾹 물었다.
“젠장, 귀찮게 하는군.”
바로 눈앞에서 터진 섬광에 지그시 눈을 감은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싸한 느낌에 곧바로 뒤를 돌아보며 단검을 휘둘렀다.
카앙-!
“앞이 보이지 않을 텐데, 용케도 막았군.”
“기척은 눈으로 느끼는 게 아니니까. 너희들이 몇 번이고 이런 같잖은 수를 쓴다고 한들, 내가 쓰러질 일은 없다는 얘기지.”
“…과연 언제까지 그렇게 기고만장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후욱-
가까이서 빠르게 내질러 온 검을 피해 옆으로 몸을 던진 나는, 슬쩍 성녀 쪽을 훑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지금이야 어떻게든 둘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하고 있긴 하지만, 이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터였다.
아무리 기척으로 녀석이 어디서 검을 휘둘러올지 알아챌 수 있다고는 해도, 직접 눈으로 보는 것만큼 대처가 빠른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계속해서 터지는 빛 무리에도 조금씩 누적해서 피해를 입고 있는 상태.
난 벌겋게 달아오른 피부를 슥 훑으며, 또 다시 날아드는 빛을 피해 박쥐로 몸을 흩트렸다.
촤라락-
“흥, 얄팍한 잔재주를… 읏!”
“성녀님!”
그대로 호위를 지나쳐 곧장 성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나는, 무방비하게 놓인 그녀를 향해 단검을 내리찍었다.
카챵-!
“잡았다… 라고 생각했겠지요. 부정한 미물 따위가, 여신님의 보호 아래 있는 제게 손끝 하나라도 닿을 수 있을 줄 알았나요?”
“이 빌어먹을 놈이, 감히 성녀님을 노리다니!”
나는 중간에 무언가 깨지는 느낌과 함께 턱 멈춰선 단검을 보며, 금세 이리로 돌아온 호위에게 나를 맡기고 뒤로 물러서는 메리엘을 향해 삐뚜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이미 닿았거든.”
“그게 무슨….”
난 허리춤에서 단검을 하나 더 뽑아 검기를 길게 늘어트린 뒤, 곧장 팔을 휘두름과 동시에 옆으로 몸을 날렸다.
사각-
“꺄아아악!”
“서, 성녀님!”
아슬아슬하게 검 끝에 걸린 로브를 벗어던지고 무사히 몸을 피한 나는, 얼굴에 긴 혈선이 그어지며 미사포가 잘려 나간 그녀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읏, 아흑….”
나는 제 얼굴을 부여잡으며 바닥에 주저앉은 성녀를 보고선, 바닥에 붉게 웅덩이가 맺힐 정도로 꽤 많은 출혈에 조용히 입술을 핥았다.
여신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여서는 안 되는 그녀의 특성상, 새 미사포를 구하기 전까진 함부로 고개를 들 수 없을 터.
그 말은 즉, 더 이상 그 망할 빛 무리도 쏘아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걸로 전세역전이군.”
“크윽….”
성녀의 도움을 받고서도 쉽사리 나를 잡지 못했던 녀석이, 과연 이젠 짐 덩어리로 전락해버린 그녀를 지키며 날 어디까지 상대할 수 있을까.
“그럼 슬슬 끝을….”
드르르륵-
“성녀님! 지금 마차를… 서, 성녀님!”
이런 젠장…
나는 막 성녀의 목을 노리고 들어가려던 찰나 뒤에서 들려온 외침에, 눈살을 팍 찌푸렸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타닥-
“저, 저기 도망친다! 잡아!”
“이 망할 마족 놈이 감히 성녀님을….”
난 곧바로 마차를 놓고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성기사들을 보며,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어디, 어디로 갔지?”
“저쪽이다! 놈이 나무 사이를 건너며 도망치고 있다!”
망할, 끈질기게도 따라붙는군.
“다들 그만!”
그렇게 생각보다 바짝 뒤를 쫓는 녀석들을 보며, 하는 수 없이 단검을 뽑아 들려던 순간.
“…쫓지 마라. 지금 그것보단 성녀님의 안위가 우선이다.”
그들을 모두 불러들이며 성녀를 데리고 마차에 오르는 호위를 보고선, 아쉬움에 입맛을 쩝 다셨다.
뭐. 오늘만이 기회는 아니니까.
이 이상 괜한 모험을 부리는 것보다는, 깔끔하게 여기서 물러나는 편이 낫겠지.
드르륵-
나는 곧 호위들을 태우고 출발한 마차를 바라보다, 천천히 나무에서 내려왔다.
비록 여기서 성녀를 죽이진 못했지만, 저 새하얀 미사포를 잘라내고 붉게 물들였으니 아주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한 번 여신의 성역을 펼치기 위해 희생을 치러야 하는 십 년을, 방금 그걸로 날려버렸으니 말이다.
순백의 미사포는 순수의 상징.
한순간 정갈함을 잃어버린 탓에, 지난 몇 년간의 고행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면 과연 무슨 기분일까.
뿐만 아니라 그녀는 이번 실패에 대한 책임을 톡톡히 치러야 할 터였다.
꼴좋군.
다음에 다시 마주칠 때, 어떤 표정을 지어줄지 심히 기대가 됐다.
* * *
뿌우우우-
“후퇴, 후퇴하라!”
아쉽게 성녀를 놓아주고 도시로 돌아온 나는, 바삐 도망치고 있는 인간과 수인들을 지나쳐 일행들을 찾았다.
화륵-
“히이익… 기, 길이….”
“하찮은 놈들, 어딜 도망치려… 음?”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성문에서 머지않은 곳에 훅 피어오른 불길에 혹시나 싶어 그리로 걸음을 옮긴 나는, 아직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 수인들을 쫓아 붙잡고 있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이렇게 된 이상 저 녀석이라도… 컥, 컥!”
“카렌, 발라크랑 아이시스는 어디 갔나.”
불길에 막힌 퇴로를 보며 이내 결의를 다지는 녀석의 목을 콱 잡아챈 나는, 금방 근처에 있던 놈들 모두를 무릎 꿇리고선 천천히 카렌에게 다가갔다.
“그 둘은 지금쯤 패잔병을 쫓고 있을 거다.”
“음, 그런가.”
어쨌든 모두 무사하단 얘기군.
그럼 잠시 마음 놓고 편히 쉬어도 될 거 같았다.
“아윽, 살살….”
“웃기는군. 포로로 잡힌 주제에 살살은 무슨. 에릭, 미안하지만 이것 좀 도와줄 수 있겠나?”
“그래, 알았다.”
근처에 아직 멀쩡한 건물을 찾아 휴식을 취하려던 나는, 붙잡은 포로들을 하나씩 결박하고 있는 카렌을 보며 그녀를 도와 밧줄을 들었다.
“헌데 에릭, 그 성녀라는 놈은 어떻게 됐나.”
“아쉽게 놓쳤다. 하필이면 승기를 다 잡은 때에 호위들이 마차를 몰고 오더군.”
“으음… 그런가. 그럴 줄 알았으면 이 몸이 늦게라도 도우러 갈 걸 그랬구나.”
난 안타까운 표정으로 침음을 흘리는 녀석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뭐 이미 지나간 일을 어쩌겠는가.
게다가 오히려 세 사람이 왔었다면, 상황이 더 안 좋게 흘러갔을 가능성도 있었다.
나야 메리엘이 날리는 빛을 어떻게든 피할 수 있었다지만, 발이 느린 카렌과 아이시스는 자칫하면 단번에 당해버렸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랬더라면 나도 마지막에 쉽사리 혼자 도망치지는 못했겠지.
“이쪽은 끝났다.”
“아, 고맙구나. 그럼 이만 쉬고 있거라. 마왕님들이 돌아오시면 본녀가 깨워주겠다.”
꽁꽁 밧줄을 묶어 열 명을 바닥에 눕힌 나는, 그대로 근처 건물에 들어가 적당히 평평한 곳을 찾아 누웠다.
이번 전투로 제국 북부는 물론 수인들 또한 큰 타격을 입었을 테니, 당분간 이쪽에 머무를 필요는 없겠군.
그럼 다음으로 노릴 곳은…
“…그러고 보니 그 녀석 얼굴을 못 본 지 너무 오래됐군.”
기껏 선물까지 그렇게 예쁘게 포장해서 보냈건만, 정작 기뻐하는 얼굴은 멀리서 지켜보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왔었지.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도 볼 겸, 카르네몬의 정리가 완전히 끝나고 나면 대륙 서쪽으로 향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기다려라, 에리스.
곧 지난 선물의 답례를 뜯어내러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