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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97화 (97/200)

제97화

“고지가 머지않았다! 다들 공성추가 성문에 닿을 수 있도록, 조금만 더 길을 열어라!”

나는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제국군과 기사들의 공세에 잠시 주춤하고 멈춰선 공성병기를 보며, 슬며시 본대가 있는 뒤쪽을 돌아봤다.

슬슬 시작인가.

난 사태를 관망하다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선 마왕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페르세 릴리스.

그녀가 천천히 걸음을 옮길 때마다 훅 진해지는 아찔한 향기에, 조금만 긴장을 늦춰도 당장 이성의 끈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큽….”

주륵-

갈수록 어질어질한 정신에 지그시 혀를 깨문 나는, 금방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를 꿀꺽 삼키며 어느덧 빗발치는 화살들 사이로 끼어든 마왕을 바라봤다.

“무르구나.”

그녀는 한 쌍의 날개로 화살을 모두 받아내며, 이내 기사들이 모인 앞에 다다랐다.

“아흐….”

“으읏….”

“후후. 귀여운 것.”

이미 마왕이 전장에 발을 들인 그 순간부터 진즉에 매혹에 걸려든 그들은, 몽롱한 표정으로 몸을 축 늘어트린 채 황홀한 눈으로 릴리스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흐응… 어떤 아이부터 상을 주면 좋을까.”

짜악-!

제국군은 물론 마왕군의 병사들마저 정신을 놓은 고요한 전장에, 날카로운 채찍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으… 모, 몸이….”

“어머, 기특해라.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아이가 있다니.”

말없이 멈춰버린 전장을 훑던 그녀는, 꼴사나운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는 기사를 보고선 초승달처럼 눈가를 휘었다.

“히, 히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임프와 고블린들은 물론 공성추를 호위하던 발록들마저 무리 없이 베어 넘기던 그는, 릴리스가 가죽부츠를 또각이며 한 걸음 저에게 다가올 때마다 사시나무처럼 애처롭게 몸을 떨었다.

꾸욱-

“허윽….”

금세 기사의 앞에 도착한 마왕은, 기어코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무릎 꿇은 그의 머리 위에 발을 올리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딱 알맞은 발판이네.”

악취미로군.

용사 시절 그녀를 맞닥뜨렸을 적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지루한 마계 생활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흥거리에 목이 마른 모양이었다.

“자, 그럼 아이들아. 누가 나를 위해 성문을 열어주겠니?”

“…위해, 성문.”

나는 릴리스에 명에 따라 홀린 듯 비틀거리며 성문을 향해 돌아서는 제국군을 보고선, 조용히 성벽 위를 훑었다.

설마하니 이대로 저들의 손에 성문이 활짝 열리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테고.

분명 어디선가 수를 쓰고 있을 게 분명한데…

“…저기 있군.”

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는 사제 무리를 보고선, 조용히 손을 들어올렸다.

“부디 거악에 대적할 용기를. 그를 단죄할 철퇴….”

툭-

“대, 대사제님!”

“형제님, 기도를 멈추지 마십시오!”

나는 혈마법으로 조종한 피 바늘에 머리를 꿰뚫려 맥없이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사제를 보고선, 곧바로 다음 목표를 향해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성문을…

“성문, 열어….”

콰아앙-!

금세 문 앞에 다다른 제국군이 하나둘씩 손을 뻗어 억지로 성문을 열어젖히려던 순간.

난 홀로 병사 수십이 붙은 문을 거세게 밀어내며 등장한 사자 갈기의 수인을 보고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런 나약한 인간 놈들! 고작 계집 하나에 홀려서야, 도대체 어찌 네놈들의 땅을 지키겠다는 거냐!”

“아… 아!”

“내, 내가 방금 전까지 무슨….”

나는 우르누이의 입에서 터져 나온 고함에 서서히 총기를 되찾아가는 제국군을 보며,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하긴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흐응… 시끄러운 남자는 별로 인기 없는데.”

“닥쳐라, 교활한 것. 잔재주는 그만 부리고, 지금부턴 제대로 한 번 싸워보도록 하지.”

쿠웅-!

양 주먹을 부딪치며 릴리스를 노려보고 선 대족장은, 어느새 모두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달려 나가는 제국군 사이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싸움이라.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

펄럭-

“네 녀석… 지금 도망치는 거냐!”

“도망? 후후. 글쎄. 과연 어떨까. 마음 같아선 나도 즐기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쪽의 상대는 이미 선약이 있어서 말이야.”

그렇게 금방 마왕의 앞에 선 우르누이는, 곧 날개를 펼쳐 허공에 떠오른 그녀를 보며 으득 이를 갈았다.

“그것도 하필이면 아주 재미없고, 무시무시한 녀석이란 말이지. 아무리 탐스러워 보이는 먹잇감이라고 해도, 괜히 그놈이 침 발라놓은 거에 눈독을 들였다가 찍히는 건 이쪽도 사양이야.”

후웅-

“그럼 이만… 아참, 거기 귀여운 흡혈귀 씨. 아까는 고마웠어요. 후후.”

나는 성벽 위쪽의 병사들을 홀리러 날아가기 전, 슬쩍 이쪽을 돌아보며 싱긋 미소를 짓는 릴리스를 보고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젠장, 지금 이 상황에서 나한테 눈길을 돌리면…

“…네놈이냐?”

빌어먹을.

난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나와 눈을 마주친 우르누이를 보며, 식은땀을 주륵 흘렸다.

이건 얄궂어도 너무 얄궂은 것 아닌가.

이런 대형 폭탄을 나한테 떠넘기고 가다니.

“감히, 감히 나 우르누이를….”

그렇게 제 상대를 놓친 것에 분노한 대족장을 코앞에 두고 마주한 찰나.

콰아앙-!

“크으… 이번엔 또 뭐냐!”

“으하하하! 드디어 나왔구나, 이 겁쟁이 녀석.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

나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며 뭉게뭉게 일어난 먼지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악투스를 보고선,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릭, 네가 말한 게 이 녀석이 맞겠지?”

“예, 그렇습니다.”

“흐흐, 그래. 간만에 제대로 몸 좀 풀어볼 수 있겠구만!”

난 무언가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우르누이의 앞에 선 발록을 보며, 그 틈을 타 조용히 성문에 공성추를 붙이기 위해 움직였다.

본래는 벌써부터 눈에 띄게 날뛸 생각은 없었지만, 어차피 릴리스 때문에 한껏 주목을 끈 몸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성문이라도 빨리 열어 난전 속에 숨어드는 편이 더 낫겠지.

콰앙-! 콰작-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굉음을 무시하고, 릴리스의 매혹에 전장이 잠시 멈췄을 당시 무사히 화살 밭을 지난 녀석들과 함께 빠르게 공성장비를 옮기는데 성공했다.

“부숴! 성문을 부숴라!”

콰아아앙-!

으직-

커다란 금속대가 성문을 한 번 들이받을 때마다, 눈에 띄게 문짝이 우그러졌다.

“이 소리는… 젠장! 성문이… 크읍!”

“으하하! 아직 다른데 신경 쓸 여유가 남아있는 건가? 이거 즐겁구만!”

그나마 지금 공성추를 막을 수 있는 우르누이는 악투스에게 꽉 붙들린 상태.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이 급히 활을 놓고 끓는 기름과 무거운 철구라도 떨어트려봤지만, 이럴 때를 대비해 튼튼하게 지붕을 쳐놓은 공성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콰아앙-!

“막아! 막으란 말이….”

촤악-

성문 앞이 막힌 터라 반대쪽으로 빠져나온 수인 무리들이 뒤늦게 달라붙어봤지만, 이미 성문이 열리면 들어갈 준비를 마친 뱀파이어와 늑대인간들에게 간단히 막히고 말았다.

으직-!

“성문이 뚫렸다! 다들 공격해!”

이윽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난 성문의 빈자리를 통해, 마왕군이 물밀 듯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이쯤이면 슬슬 부를 때가 됐군.

“아이시스.”

[응, 기다렸어.]

“모두 데리고 와라.”

간단한 연락과 함께 수정구를 다시 집어넣은 나는, 곧 크게 떨어질 한 방을 기다리며 잠시 성문 밖에 몸을 숨겼다.

고작해야 한 번.

이후로 또 기회를 얻기 위해선 수년을 기다려야 하는 성역선포를, 설마하니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을 리는 없을 터.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건, 그 정도는 아니어도 충분히 강력한 수를 준비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번쩍-!

“크읏….”

나는 그리 예상하기가 무섭게 도시 위로 떠오른 찬란한 빛 무리를 보며, 성벽이 만들어준 그늘막이 있음에도 피부가 타들어가는 것만 같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캬아아아악!”

“허으윽… 모, 몸이….”

난 성벽 안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지그시 눈을 감고선, 이내 빛 무리가 점차 잦아들 때쯤 다시 조심스레 눈을 떴다.

“크으으… 방금 그건 도대체….”

“설마, 그게 마왕님들께서 말씀하셨던 신성력인가?”

“에, 엘케스트! 엘케스트!”

곧바로 성문 안쪽을 들여다보니 몇몇 건물 외벽에 붙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녀석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끔찍한 화상을 입은 채 바닥에서 꿈틀거리거나 재가 되어 사라져있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에릭! 방금 그 빛은 대체… 이, 이게 무슨!”

“…카렌, 아이시스. 발라크.”

나는 어느새 옆에 도착한 셋을 보며, 저 멀리 다시금 기도를 드리고 있는 성녀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쪽에, 가장 강력한 걸로 준비해라.”

“지, 지금 말이냐? 아니, 그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응, 알았어.”

난 성문 안쪽의 모습에 아직 당황한 카렌을 두고서, 곧장 도시의 예배당을 향해 뛰었다.

“크윽, 젠장. 힘이….”

“보아라, 여신님께서 우리를 굽어 살피고 계신….”

쩌억-!

[레벨이 증가합니다.]

“고, 고맙….”

“빨리 건물 안으로 숨어라. 적어도 본대가 도착할 때까진 녀석들 눈에 띄지 말도록.”

중간 중간 성기사들에게 둘러싸인 마족들을 구하며 벽과 벽 사이를 오가던 나는, 이내 바깥에 호위들이 빈틈없이 지키고 서있는 커다란 건물을 눈앞에 둘 수 있었다.

지금 저들을 뚫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

이제 남은 건 카렌과 아이시스가 잘해주기를 빌며 잠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후웅-

“저, 저기 봐! 하늘에….”

“엄청 큰… 불덩이?”

이것 참…

상당히 빠르군.

콰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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