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96화 (96/200)

제96화

“다시.”

한차례 소란이 지나가고, 부상자들과 곳곳에 널린 파편들의 조치가 모두 끝난 깊은 밤.

나는 혹여나 괜한 의심을 사지 않도록 셀레스트를 무리로 돌려보내기 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막사에서 조금 떨어진 동굴로 나왔다.

“으… 정말 이런 걸로 강해질 수 있는 거냐?”

“그거야 너에게 달렸지. 널 계속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쳐줄 수 없으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렇게 방법을 알려주는 것뿐이다. 지금 네게 부족한 건 신체능력이나 전투센스가 아니야. 어떻게 하면 마력을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는가. 이건 그를 빠르게 익히기 위한 수련이다.”

“아, 알았다.”

난 난리 통에 주워놓은 파편 몇 개를 가져와 손톱으로 검기를 일으켜 깎는 그녀를 보며,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쩌억-

“너무 강해. 다시.”

나는 중간 중간 올곧은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파편을 쪼개버린 녀석에게 새 것을 쥐어주며, 그 옆에 교보재로 내가 깎아놓은 조각을 바라봤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정육면체의 바위 조각은, 어느 정도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면 금방 만들어낼 수 있는 아주 기초적인 단계에 불과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다 깎을 생각이냐. 이러다 날 새겠군.”

“으윽… 그, 그럼 어떡하란 말이냐! 조금만 힘을 줘도 뚝 부러지는데.”

난 그럼에도 도통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셀레스트를 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고작 몇 시간도 안 됐다고는 하지만, 벌써 날려먹은 파편만 해도 수백 개였다.

이런 차마 눈 뜨고 못 봐줄 수준으로, 도대체 검기는 어떻게 만들어내고 있었던 건지.

혹시나 싶어 물어봤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계속 마력을 들이부으니까 됐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뿐이었다.

“하란다고 마냥 무식하게 손대지만 말고, 요령을 좀 익혀라.”

“흥.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었으면 진즉에… 읏!”

뻐억-

“씨이… 긍지 높은 보름달의 전사인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을….”

“딴소리할 시간 있으면 집중이나 해라.”

교보재로 꼬박꼬박 말대답이나 하는 녀석의 머리를 내리친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다시 조각에 열중하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이만큼이나 절망적으로 마력을 못 다루고 있었다는 건, 다르게 말해 마력만 제대로 써먹을 수 있어도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여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잘만 키우면 꽤 쓸 만한 패가 되겠군.

“으음. 에릭, 이렇게 하면 되는 거냐?”

“그래. 거기서 더 얇게 조각할수록 더욱 도움이 될 거다.”

나는 어느새 심심하다는 핑계로 끼어든 카렌이 뚝딱 만들어낸 정육면체를 보며, 나지막이 고개를 주억였다.

비록 검기를 만들어 깎은 건 아니고 단순히 마력을 뭉쳐 만들어낸 칼날로 조각해낸 것이었지만, 고작 설명 한 번만 듣고 그 자리에서 곧잘 만들어낸 것을 보아하니 과연 마법사는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에릭. 만들었어.”

“음? 아이시스, 너도 왔었나.”

난 언제 왔는지 뒤에서 소매를 꾹꾹 잡아당기는 아이시스를 보며, 조용히 그녀의 손에 들린 조각을 내려다봤다.

“…이건 뭐냐.”

“에릭, 만들었어.”

나는 한손에 단검을 쥐고 휘두르고 있는 꽤나 정교한 모양새의 조각상을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날 보고 만든 건가.

비록 이건 파편을 가지고 깎아낸 것도 아닌 제 마법으로 만들어낸 얼음조각에 불과했지만, 그 완성도가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감히 흉내조차 못 낼 수준이었다.

“잘했다. 훌륭하군. 이 정도면 굳이 연습할 필요 없겠어.”

“…응.”

난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이는 그녀의 모습에, 흐뭇한 얼굴로 새하얀 머리칼을 살살 쓸어내렸다.

“형님, 저도 성공했습니다!”

“음. 소질이 있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가르쳐줄걸 그랬어.”

나는 이어서 열두 번째 도전 만에 정육면체를 완성시킨 발라크를 보며, 꽤 놀란 표정으로 그를 살폈다.

카렌과 아이시스는 기본적으로 마법사니 그렇다 치더라도, 녀석이 이렇게 빨리 성공할 줄은 몰랐는데.

내가 이방인 시절, 이를 통과하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전전긍긍했던 걸 생각하면 꽤나 대단한 재능이었다.

물론 그때는 검기는커녕 제대로 마력을 다룰 줄도 몰랐던 애송이였기에 출발선이 다르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녀석은 확실히 소질이 있었다.

“제길… 왜 나만 이렇게 안 되는 거냐!”

툭-

“아, 아앗….”

난 짜증과 함께 순간 거칠어진 검기에 뚝 부러진 조각을 보고선 울상을 짓는 셀레스트를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선 다음 파편을 내밀었다.

“다시.”

* * *

뿌우우우-

이른 새벽.

밤늦게까지 셀레스트의 수련을 봐주고 무리로 돌려보낸 뒤 짧은 단잠을 마친 나는, 머리가 다 지끈거릴 정도로 요란한 소리에 금방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출진이다!”

“다들 서둘러 이동한다!”

난 이미 한참 전에 열을 맞추고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 사이를 지나, 어딘가 모여 있을 일행들을 찾았다.

“아, 형님! 이쪽입니다!”

나는 번쩍 손을 들어 올려 나를 부르는 발라크를 보며, 천천히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시간이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도 깨워주질 않다니.

아니, 어쩌면 내가 계속 곯아떨어졌던 걸지도 모르겠군.

요새 그렇지 않아도 새벽에 족장들과 대주술사를 암살하러 다니느라 피곤했던 참에, 셀레스트를 봐주겠다고 제대로 자질 못했으니.

“다행히 너무 늦지 않게 일어났구나. 몇 번을 깨우러갔는데도 다시 잠들어서, 이제는 정말 억지로라도 막사에서 끄집어내야하나 고민중이였다.”

“으음, 미안하군. 그보다 아이시스, 상황은 어떻게 됐지?”

날카로운 카렌의 눈빛에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인 난, 이내 옆에서 병사들의 행렬을 지켜보고 있던 아이시스를 찾았다.

“…일단은 돌격. 아직 다들 성벽 안에 있어. 도시에 남아 수인으로 위장하고 있는 첩자들에 따르면, 우선 성벽을 끼고 수성에 집중할 생각.”

우선은 수성에 집중인가.

하긴 벨라노르 때는 도시에서 모두 수용하지 못할 만큼 많은 병력이 있었기에 그리고 양옆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는 산맥이 있었기에 군을 밖으로 돌렸던 것이지, 지금처럼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굳이 성벽 밖에서 싸움을 받아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성문을 부술 공성병기가 도착하면 놈들도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을 거다. 성벽 위의 궁수들도 서큐버스들이 한 차례 훑으면 쉽게 무력화되겠지. 아직 녀석들은 매혹에 대처할 방법을 찾지 못했을 테니.”

기본적으로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상대라면 쉽사리 매혹에 당해주지 않겠지만, 어차피 성벽 위를 차지하고 서있는 녀석들은 대부분 평범한 병사들일 터였다.

물론 사제들이 조금 거슬리긴 하겠지만, 이쪽이 저들을 모르는 만큼 저쪽도 우리들에 대해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어제 신성력에 대해선 어느 정도 귀띔해놓았으니, 오히려 유리하면 유리했지 절대 불리할 일은 없었다.

“우리가 나서는 건 성문이 열리고, 뱀파이어와 늑대인간들이 한바탕 도시 안쪽을 휘젓고 다닌 후가 될 거다. 카렌, 아이시스. 일단은 수정구로 신호를 주기 전까진 함부로 들어오지 말고 바깥에서 기다려라. 그리고 발라크, 너는 이 둘을 지키도록.”

“음, 알았다.”

“예, 형님. 맡겨만 주십시오!”

나는 우선 간단하게 우리 독립대의 작전을 설명하고선, 곧바로 병사들의 행렬에 붙어 카르네몬으로 향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녀.

메리엘 그 녀석이 마음대로 활개 칠 수 없도록 방해하는 것이었다.

항시 정갈한 몸을 유지한 채, 매일 같은 수 시간 고행과 기도를 마치는 삶을 자그마치 십년간 계속해야 한 번씩 펼칠 수 있다는 여신의 성역.

지금이라면 그녀가 성녀가 된지 십 몇 년쯤 되었을 테니, 못해도 한 번은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인간과 수인 그리고 애초부터 마력을 다룰 수 없는 드워프를 제외한 엘프까지.

중간계의 종족들에게는 아무런 위해도 없이, 오로지 마족들의 마력만을 흩트리는 금제.

교단이 이르길 여신의 뜻에 거스르는 모든 부정한 것의 힘을 금제하는 성역은, 마족들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사지나 다름없는 장소였다.

실제로 악마왕, 벨제붑이 성역에 갇혀 무력하게 죽어갔었지.

뿌우우우-

“전군, 돌격!”

난 저 멀리 성벽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울린 나팔을 보며, 우렁찬 함성과 함께 달려가기 시작하는 병사들을 바라봤다.

“카렌, 아이시스.”

“음. 화끈하게 한 발 날리고 시작하지.”

“공성병기, 지키면 되는 거?”

나는 아이시스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주억이며,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적어도 성문이 열리기 전까진 나도 딱히 할 게 없으니, 일단은 이 둘이 편히 마법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엄호하는 게 좋겠지.

후웅-

“형님!”

카앙-!

“이쪽은 걱정하지 말고 네 할 일에 집중해라, 발라크.”

난 적당히 자리를 잡기가 무섭게 저 멀리서 쏟아져 내리는 화살들을 쳐내며, 천천히 성문에 가까워지고 있는 공성병기들을 훑었다.

“하찮은 것들, 모조리 불살라주마!”

“…투석기, 안 돼.”

화륵-

콰아앙-!

나는 성벽 위의 병사들을 노리고 떨어지는 화염구와, 공성병기를 노리고 날아드는 바위를 가로막는 커다란 얼음벽을 지켜보다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발라크. 이제 맡기겠다.”

“예,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슬슬 도착할 때가 됐군.

나는 어느덧 성문에 거의 다다른 공성추를 보며, 조심스레 성벽을 향해 걸었다.

끼이익-

“부숴! 절대 성문에 닿게 두어선 안 된다!”

이윽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살짝 열린 성문의 틈새로 쏟아져 나오는 기사들의 모습에, 조용히 검기를 피워 올렸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에 시선을 끌게 되면 곤란하니, 일단은 적당히 움직여볼까.

“이 빌어먹을 마족 놈들, 그 이상 한 발자국도 지날 수 없다! 카르네몬은, 제국은 우리가….”

푹-

“주절주절 말이 많군.”

자, 언제 나타날 거냐.

우르누이, 메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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