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95화 (95/200)

제95화

카르네몬.

곧 마왕군과의 커다란 싸움을 앞둔 도시는, 비장함과 동시에 불안함으로 가득 흔들리고 있었다.

“젠장, 그 대주술사라는 놈. 이럴 때 갑자기 당해서 빠져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이제 전투가 코앞인데….”

“…이길 수 있을까? 그 벨라노르도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는데. 아까 협곡에서 돌아온 척후병이 말하길, 아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들어차 있었댔잖아.”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잖아. 혹시라도 엄한 마음을 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군법으로 엄하게 다스리겠다고, 당장 오늘 아침에 으름장을 놓았는데.”

“있다가 새벽에 몰래 움직이면… 정지!”

두려워하는 얼굴로 협곡과 그 반대 방향으로 나있는 숲을 힐끔거리던 경비병은, 저 멀리 보이는 마차들의 행렬을 발견하고선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미 도시 사람들은 모두 다른 마을로 대피시킨 지 오래.

군납을 대는 몇몇 상인들을 제외하고는 아예 카르네몬으로 오는 것 자체를 금지시켰다 했으니, 지금 이 시기에 도착하는 이들이라면 적어도 일반인은 아닐 터였다.

“자,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창대로 성문 입구를 막은 그는, 마차들 앞에 새겨진 여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들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검문?”

“흡… 저, 그것이….”

교단.

곧 선두에서 마차를 이끌던 기사를 마주한 경비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자신을 훑는 그를 보고선 흠칫 몸을 떨었다.

“분명 이쯤 도착하리라 미리 사람을 보내 일러놓았거늘… 영주님께선 어디계신가. 교단에서 나왔다 이르도록.”

“아, 알겠습니다! 잠시만….”

“됐어요, 벨. 무언가 사정이 있으니 나오지 못하신 거겠지요. 시간이 없으니, 어서 검문을 받고 들어가도록 해요. 경비병 씨?”

“예, 예!”

경비병은 하얀 미사포로 얼굴을 가린 채 천천히 마차에서 내린 여인을 보며, 군기가 바짝 든 모습으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제국의 신민으로서 그리고 교단의 신자로서 확신할 수 있었다.

성녀.

오로지 여신에게만 제 얼굴을 비추는 것이 허락된 거룩한 신의 종.

“화, 확인되셨습니다!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혹여나 저도 모르게 불경을 저지를까 황급히 검문을 마친 그는, 곧장 뒤에 얼어붙어있던 동료에게 눈짓해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창대를 치웠다.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이윽고 다시 마차에 올라 성문을 통과한 성녀는, 마부석에 앉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성기사를 향해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까 그 둘. 밤새 목을 치도록 하세요. 여신님께서 내려주신 성전을 앞두고 감히 도망을 꾀하다니.”

그녀는 조금 전 제 날카로운 기감에 걸린 두 경비의 얘기를 떠올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불경스러운 것.

여신님의 바람에 방해만 되는 무지렁이들 같으니.

똑똑-

“저… 여, 영주님. 성녀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금세 영주성에 다다라 집사의 안내를 받고서 집무실 앞에 도착한 메리엘은, 올라오는 중간에 그슬린 자국이 선명했던 복도를 떠올리며 조용히 침음을 흘렸다.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영주가 제때 마중을 나오지 못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끼이익-

“아, 성녀님! 죄송합니다. 본래대로라면 제가 성문 앞에서 맞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황급히 문 앞으로 뛰어와 직접 문을 여는 영주를 보며, 살포시 미소와 함께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보아하니 안쪽에 계신 분과 급한 용건이 있으셨던 모양인데… 혹시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예, 예. 물론이지요.”

호위기사인 벨과 함께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메리엘은, 곧 영주인 발파기르 후작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그때 회장에 왔던 여자로군. 인간들의 신을 모시는 무녀라고 했던가.”

“오랜만이시네요, 대족장님. 그날 흔쾌히 제안을 받아주신 덕에 안심하고 돌아갈 수 있었답니다. 더구나 이렇게 본인께서 직접 도우러 와주시고…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흥. 가식은 필요 없다. 어차피 세르노이가 아니었더라면, 너희 구역질나는 인간들이랑 이렇게 손을 잡을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보다 가제프, 그 녀석은 오지 않은 건가?”

“후후. 가제프 경은 지금 제국 중부를 지키느라 바쁘셔서요. 대신 이렇게 제가 왔답니다.”

그녀는 영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자신을 훑는 대족장을 보며, 조용히 눈웃음을 지었다.

빌어먹을 자식, 뚫린 입이라고 멋대로 지껄이긴.

“쯧. 이런 손에 굳은살 하나 베기지 않은 계집애에게 등을 맡겨야한다니. 잠깐 연합을 맺기로 했다고, 이렇게 우리한테 짐을 전부 떠맡겨도 되는 건가?”

“네놈, 감히 성녀님께 그게 무슨….”

“벨. 누가 함부로 움직여도 된다고 했죠?”

메리엘은 저를 향한 비아냥에 눈살을 찌푸리며 검집에 손을 올리는 벨을 보고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훑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숙이고선 뒤로 물러나는 제 호위를 보며, 천천히 비어있는 자리를 향해 눈을 돌렸다.

“대족장, 부디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헌데 대주술사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신지 알 수 있을까요?”

성녀는 곧바로 제 호위의 실수를 대신 사과하며, 그나마 말이 통하리라 생각했던 대주술사의 행방을 찾았다.

위대한 여신의 종인 저뿐만이 아닌 한낱 북방의 짐승 따위가 같은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이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사태의 심각성을 직접 보았을 녀석이니만큼 곧 있을 전투에 큰 도움이 되어줄 터였다.

“아,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실은….”

하지만 여신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그녀를 찾은 메리엘은, 조심스레 운을 뗀 후작의 말에 점점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그 말은, 대주술사가 자객에게 당했다는 말씀이신가요?”

“예. 녹색 밭 거미라는 녀석의 체액에 중독됐는데, 누군가 어제 그 해독제가 되는 약초를 전부 사들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오늘 새벽에 다른 마을로….”

성녀는 중간 중간 대족장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말을 잇는 후작을 보고선, 지끈거리는 두통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왕군과의 격돌을 코앞에 두고, 사실상 이번 전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주술사가 빠지다니.

여신께선 분명, 대주술사의 힘을 빌려 함께 거악에 대비하라 하셨거늘…

“됐다. 이미 지나간 일을 어떻게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지금 중요한 건 저 앞에 진을 치고 있는 놈들을 어떻게 막을 것이냐다.”

생각이 깊어지던 메리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대족장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여신님의 신탁이 빗나가는 것은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래.

애초에 수인들과 이리 연합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 대주술사의 끈질긴 설득 덕이었으니, 지금 카르네몬에 주둔하고 있는 수인 부족들과 눈앞에 두고 있는 대족장 자체가 이미 그녀의 힘을 빌린 것이리라 볼 수도 있었다.

“어디 가시는 건가요?”

“정찰이다. 너희들이 보낸 척후병이 적병의 규모는 알아왔을지 몰라도, 녀석들이 무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선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더군. 기왕 들르는 김에 세르노이의 답례라도 대신 던져줄 생각이다.”

어차피 도망칠 수는 없었다.

이는 여신께서 내려주신 성전이었으니까.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그를 이 세상에 실현시킴이 바로 교단이 할 일이었다.

“물론 일이 끝나고 이번 사건에 대한 책임은 톡톡히 치러야할 거다. 도대체 경계를 어떻게 섰기에 이곳까지 자객이 들어올 수 있는 건지 모르겠군. 만일 어제 세르노이가 따로 호위를 두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이 도시는 저 마왕군들의 손이 아닌 내 손에 먼저 불타고 있었을 거다.”

끼익-

“잠깐만요.”

메리엘은 문을 열고 집무실을 나서는 대족장을 보며, 잠시 그를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이냐. 설마 말릴 생각은 아니겠지.”

“후후. 그럴 리가요. 그저 조금 도움을 드리고 싶을 뿐이랍니다. 정찰이시라니 발이 느린 제가 함께 가드릴 수는 없겠지만, 이참에 굳은살 하나 베기지 않은 계집이라도 충분히 등을 맡기실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서요.”

번쩍-

대족장을 향해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린 그녀는, 이내 포근한 빛으로 그를 감싸며 조용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 무운을.”

* * *

“흐아아악! 도, 도망….”

콰아아앙-!

바깥에서 울리는 굉음에 황급히 막사를 나선 나는, 여기저기서 비산하는 파편을 보며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바, 밖에 무슨 일인가 에릭!”

저 멀찍이 한참 떨어져있는 협곡 입구.

나는 그곳에서부터 포탄처럼 쏘아지고 있는 바위들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아무리 마력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한들, 이렇게나 커다란 바위를 멀리 날려 보낼 수 있는 녀석은 하나밖에 없었다.

“…우르누이.”

벌써 움직였나.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아직 적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혼자 온 건가.

곧 있을 싸움을 앞두고, 우리의 전력을 조금이라도 깎아먹기 위해서?

“쓸데없는 짓을….”

확실히 임프나 고블린 같은 말단 병사들 몇쯤은 수를 줄여놓을 수 있겠지만, 기껏해야 이런 크기만 커다란 바위를 던진다고 중요한 병력들을 어떻게 해볼 수는 없었다.

오히려 괜히 홀로 모습을 드러낸 걸로, 자칫 자기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을 텐데.

“다들 물러서!”

쿠웅-!

이내 금방 정신을 차리고 앞에 나선 발록들이 날아드는 바위 앞을 막아섰다.

이걸로 더 부상자가 나올 일은…

으득-

“컥….”

“무, 무슨….”

나는 자신 있게 바위를 받아낸 발록들의 몸이 충격에 꺾이는 것을 보며, 놀란 눈을 깜빡였다.

“…신성력인가!”

마족들이 다루는 마력과 부딪히면 서로 흩어지는 성질을 가진, 빌어먹을 여신의 힘.

그를 이렇게까지 많은 바위에 넘치게끔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녀석은, 교단 전체에서도 단 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메리엘.”

왔구나.

그렇지 않아도 확인해보려고 했었는데, 이거 괜한 수고를 덜었군.

나는 곧 마왕들이 움직이기 전에 자리를 뜨는 우르누이를 보며, 조용히 다시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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