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그래서 이 녀석을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건가?”
“음. 바로 그거다.”
금방 오해를 풀고 셀레스트와 함께 막사로 돌아온 나는, 먼저 도착해 쉬고 있던 세 사람에게 밖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에릭. 어디까지나 독립대의 대장은 너니 본녀가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도대체 그 녀석을 어떻게 강하게 만들어주겠다는 거냐. 설마 정말로 당분간 데리고 다니려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이미 제가 이끄는 무리가 있는 늑대인간이다. 아마 따라오라고 해도 자기가 거절하겠지.”
“날 따르는 아이들을 두고 혼자 무리 밖을 돌아다닐 수는 없다. 하물며 그 상대가 뱀파이어라니. 실은 지금 바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도, 상당히 무리하고 있는 거다.”
난 혹여나 셀레스트를 독립대에 들일까 걱정하는 카렌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능력만 보자면 데리고 있어서 손해 볼 건 없었지만, 녀석을 데리고 오려면 무리 전체를 데리고 와야만 했다.
그리고 그건 내가 굳이 독립대를 만들어 운용하는 취지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오히려 뱀파이어인 나를 따라야 된다는 사실에, 여기저기서 잡음만 계속 생겨날 터였다.
“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구나, 에릭.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이 녀석을 도우려는 거냐. 널 반푼이라 깎아내리고, 모기 자식이라 무시하는 이런 건방진 여자를 말이다.”
“…동감. 늑대인간들의 정보는, 셀파스트한테도 얻을 수 있어.”
“그, 그건….”
확실히 원하는 게 정보뿐이었다면 굳이 이렇게 공을 들일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바라는 건,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었다.
나는 카렌과 아이시스의 날선 의견에 무어라 반박하지 못하고 꼬리를 축 늘어트리는 셀레스트를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늑대인간들은 기본적으로 타종족에 대해 굉장히 배타적이다. 하지만 저들끼리, 특히 같은 무리끼리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빠짐없이 잘 뭉치는 편이지. 그러니까 언젠가 한 번 놈들의 전력을 써먹기 위해선, 내 대신 그들을 내 뜻대로 이끌어줄 녀석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셀파스트는 탈락이었다.
녀석은 무리가 없었으니까.
아니, 아예 늑대인간들 사이에서 별종취급을 받으며 사실상 타종족과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나마 능력이 있었기에 사천왕의 자리에 올라서 버티고 있는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에 타지로 쫓겨났어도 이상할 게 없는 놈이었다.
“사령탑으로 써먹겠다는 말씀이시군요, 형님.”
“음.”
다른 마족들에 비해 날렵하고 무리를 지어 쐐기처럼 적군 한가운데 파고들 수 있는 늑대인간의 특성은, 가능한 적은 병력으로 적들의 시선을 모아놓기에 유용했다.
특히나 보름달이 가까운 밤하늘 아래에서라면, 전장에서 꽤 커다란 변수로 써먹을 수 있을 터.
이번 카르네몬에서 이루어진 인간과 수인의 연합도 그렇고, 대족장과 대주술사가 직접 움직인 것도 그렇고.
갈수록 개변하는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선, 가능한 많은 패를 들고 있는 편이 좋았다.
“으음, 사령탑이라… 과연, 그렇구나.”
“그런데 에릭, 소문은 어떻게 풀어줄 셈?”
“그야 간단하지. 셀파스트에게 부탁해서 수습해달라고 하면 그만이다. 소문의 출처가 녀석이니만큼, 본인이 직접 오해였다 해명하는 편이 나을 거다. 물론 주변에서 눈초리 좀 맞긴 하겠지만, 별로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은 아닐 테니 상관없겠지.”
만일 그랬는데도 수습이 안 된다면, 내가 직접 찾아가 담판을 놓으면 그만이었다.
여차하면 이쪽이 부탁해서 그렇게 소문을 내달라고 했다면, 적어도 셀레스트에게 쌓인 의혹은 사라질 터.
그렇게 되면 내 이미지가 조금 타격을 입긴 하겠지만, 이미 그동안 쌓아놓은 게 있기에 그다지 치명적인 수준은 아닐 터였다.
늑대인간 무리.
그중에서도 썩 괜찮은 재능을 가진 그녀가 이끄는 무리는, 조금 손해를 감수하게 되더라도 꼭 손에 넣을 가치가 있었다.
지금 당장은 써먹기 애매할지 몰라도, 녀석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 무리도 점점 커지게 될 테니까.
“헌데 형님. 그러면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소문을 해결해주셔야 할 텐데. 이후에 저 놈이 모르쇠로 나오면 어떡합니까?”
“음. 그건 이 몸도 걱정이구나. 지금이야 상황이 급하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너한테 달라붙었겠지만, 볼일이 다 끝나고 나면 녀석이 돌아설지도 모르지 않느냐.”
“뭐, 뭣… 그렇지 않다! 나는 긍지 높은 보름달의 전사. 은혜를 입었으면 갚는 것이 당연한 도리다!”
“…그치만 너. 에릭, 반푼이라 무시했어. 말로만 하는 약속, 믿을 수 없어.”
“그으으… 그건….”
음, 확실히.
나는 혹여나 셀레스트가 제 소문만 처리하고 팽해버릴까 걱정을 내비치는 세 사람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물론 그녀가 정말로 모르는 척 넘길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섣불리 남을 믿고 괜찮겠지 싶다간, 용사 시절 그랬던 것처럼 또 이용당하기만 하고 버려질 뿐이었다.
“하는 수 없군. 발라크, 카렌. 붙잡아라.”
“예, 형님.”
“음. 알았다.”
“어, 어엇?”
난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셀레스트의 양팔을 꾹 붙잡은 둘을 보며, 녀석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냐! 네놈, 대체 무얼 하려고….”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딱히 심한 짓을 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저 네가 도망칠 때를 대비해서, 약간의 보험을 들어놓으려는 것뿐이다.”
나는 어느새 코앞에 다다른 나를 보며 흠칫 몸을 떠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 설마… 아니지? 아, 안 된다! 네놈, 처음부터 나를 죽일 셈… 읍!”
“시끄럽군. 조용히 좀 해라. 죽지 않게 잘 조절할 테니까. 오히려 그렇게 발버둥 치는 편이 상처가 벌어져서 더 아플 거다.”
손을 뻗어 시끄럽게 소리를 높이는 셀레스트의 입을 꽉 틀어막은 나는, 녀석의 어깨에 벌어진 입 사이로 날카롭게 튀어나온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읍! 흐읍, 으으….”
[긍지 높은 보름달의 전사, ‘셀레스트’를 흡혈했습니다.]
[대상의 모든 피를 마시지 않아, 흡혈의 효과가 감소합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힘이 ‘1’ 증가합니다.]
“프흐….”
꿀렁꿀렁 목을 넘어가는 진득한 피 맛을 조용히 음미하던 난, 곧 애처롭게 몸을 떠는 그녀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에흐, 아….”
지금껏 녀석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슬며시 치운 나는, 주륵 흘러나온 침으로 축축해진 손을 닦으며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카렌, 발라크.”
“무, 무… 무슨 일이냐!”
“예, 예!”
두 사람은 망가진 인형처럼 축 늘어진 셀레스트를 보며 과거 저들이 흡혈 당했을 적의 트라우마라도 떠올랐는지, 경직된 목소리로 크게 답하며 내 눈치를 슬쩍 살폈다.
“녀석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편히 쉴 수 있도록 눕혀줘라.”
“아, 알겠다! 맡겨만 두어라.”
“알겠습니다, 형님!”
귀엽긴.
나는 간만에 군기가 바짝 들어간 둘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 정도면 혹시나 도망칠 때의 대비로는 충분하겠지.
적어도 일 년은 흉터가 진하게 남을 수 있도록, 마력까지 써가며 상처를 남겼으니까.
흡혈귀에게 물린 늑대인간이라니.
이 사실을 무리에 들킨다면 더 이상 대장으로 남아있지 못할 터.
그렇기에 일부러 어깨를 문 것이었다.
맨살이 드러나기 쉬운 목과는 달리, 어깨는 조심해서 잘 가리기만 한다면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는 이상 쉬이 발견할 수 없을 테니까.
“아이시스.”
“응, 에릭.”
난 셀레스트를 데리고 바로 옆의 천막으로 향하는 카렌과 발라크를 보며, 잠시 나와 단둘이 남은 아이시스를 바라보았다.
“알아봐달라고 했던 건 어떻게 됐나.”
“…인간들, 생각보다 끈질겨. 벨라노르 이후로 점령한 건, 작은 도시 둘이랑 마을 몇 개가 전부.”
생각보다 느리군.
나는 가장 큰 난관이었던 벨라노르를 함락시켰는데도 도통 진전이 없는 소식을 듣고선,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마흐제브를 상대로 비교적 고전했던 일로 인해 움직이는데 신중해지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당장 후퇴하는 제국군을 쫓아 급하게 도시를 점령하기보다는, 천천히 군을 정비하며 북쪽이 합류하길 기다리는 쪽을 택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온건파 놈들이…
“으음….”
이유야 어쨌든, 덕분에 제국에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주어졌으리란 건 분명했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당장 이리로 놈들의 지원군이 오고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리고 에릭 말대로 흰색 옷을 입은 인간들, 올라오고 있댔어. 어쩌면 지금쯤 도착했을지도.”
역시 녀석들이 오는 건가.
교단의 개들이.
“…혹시 그중에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도 있었나?”
“으응, 모르겠어. 가까이 가면 들킬지도 모르니까, 멀리서 동선만 살폈댔어.”
그렇다면 그들 중에 정확히 누가 오는지는 아직 모른다는 얘기군.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젓는 아이시스를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겨들었다.
두 놈.
그 빌어먹을 교단의 미치광이들 중에서 가장 썩어빠진 두 녀석만 오지 않는다면, 이 이상 변수는 없으리라 봐도 무방했다.
그마저도 개중 하나는 설령 황제의 명이 떨어지더라도 쉽사리 교단 본청을 녀석이 아니니, 사실상 이리로 움직였을 가능성이 있는 놈은 하나뿐이었다.
“메리엘….”
성녀 메리엘.
난 연합의 그 누구보다도 상냥하며,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뒤틀린 성격을 가진 미친 광신도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에릭, 어디 아파? 안색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조금은 슬픈 표정으로 이쪽을 살피는 그녀를 향해 씨익 미소를 지어보이며, 앞으로 있을 전투를 대비해 약간의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메리엘.
마왕군의 입장에선 어쩌면 세르노이보다 까다로운 상대가 될 수 있는 만큼, 조금 무리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새벽에 녀석의 존재를 확인하고 올 필요가 있을 거 같았다.
교단이 다루는 신성력은, 마족들에게 있어 치명적인 약점이나 다를 바 없는 힘이었으니까.
아직 그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는 지금 곧바로 성녀를 맞닥뜨리게 된다면, 자칫 여기서 길게 발이 묶이게 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빌어먹을 년.
아무리 네가 직접 전장에 나서더라도, 그리 생각처럼 일이 쉽게 풀리진 않을 거다.
지금 여기 있는 마족들은 몰라도, 난 이미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