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부웅-
나는 손톱을 튕겨내기가 무섭게 내 머리를 노리고 날아든 발을 피하며, 허리춤에서 단검을 하나 더 뽑아 들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건진 모르겠지만 조금 억울하군. 난 네 오빠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거짓말 마라! 그러면 왜, 대체 왜… 내가 십년도 더 전에 무리를 뛰쳐나간 오빠한테 처음으로 들어야하는 말이, 언젠가 네 녀석을 소개시켜주겠다는 얘기여야 하는 거냐!”
“…음?”
그게 무슨…
카앙-!
“큭….”
난 전혀 상상치도 못한 이유에 넋을 놓은 틈을 타 찔러 들어오는 손톱을 가까스로 피해내며, 황급히 셀레스트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뱀파이어한테 늑대인간을 소개시켜준다니, 그것도 제 여동생을 말인가?
녀석이 괴짜인 줄은 알았지만, 설마 그 정도였을 줄이야.
“곤란하군. 이쪽은 별로 사양하고 싶은데.”
“그건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젠장, 그 망할 오빠.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딱히 도와줄 녀석이 없어도, 나 혼자 충분히 무리를 이끌 수 있는데….”
나는 무엇 때문인지 자존심이 상한 듯 입술을 꾹 깨무는 그녀를 보며,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이 몸뚱이도 그렇고, 아이시스도 그렇고.
마족들은 왜 이렇게 형제 사이가 복잡한 건지.
아무래도 셀레스트 또한 제 오빠와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그나마 이쪽은 아이시스와 달리 마냥 싫어하는 눈치는 아닌 듯했지만…
“무리를 떠났으면 그냥 계속 지금처럼 신경 쓰지 말고 살 것이지, 이제 와서 오빠 노릇 좀 해보겠다고 괜한 참견을 하기는. 이게 다 네놈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진 모르겠지만, 네가 내 오빠를 그렇게 구워삶지만 않았어도 쓸데없는 혼사 얘긴 나오지 않았을 텐데!”
콰앙-!
순식간에 눈앞에 도착한 주먹을 보며 황급히 뒤로 몸을 던진 나는, 방금 전까지 내가 서있던 자리가 움푹 파인 것을 보고선 조용히 검기를 피워 올렸다.
아무래도 대충해선 안 되겠군.
“그러고 보니 너희 늑대인간들은 대장의 혼사 또한, 무리를 키우는데 아주 중요한 일이라 했었지.”
평범한 구성원들이라면 모를까.
늑대인간들에게 있어 대장의 혼사는 단순히 그 상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리와 무리의 결합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다고 한들, 만일 그 무리의 규모가 저보다 한참 모자라다면 제아무리 대장이라고 해도 함부로 혼사를 나눌 수 없었다.
그래서 보통은 더 이상 무리의 세를 늘릴 수 없다고 생각이 들 때, 저와 비슷한 크기의 무리를 이끄는 대장을 찾아 가족을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 그런데 너 때문에, 그 망할 오빠 때문에 일이 완전히 꼬여버렸다. 도대체 마왕님한테 뭐라고 간청을 드린 건지, 순식간에 내가 혼처로 흡혈귀를 원하는 괴상한 취향을 가진 여자로 소문이 나버렸단 말이다!”
헌데 그런 상황에서 대장이 타종족과 맺어지길 원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필연적으로 다른 무리들에 비해 도태될 수밖에 없겠지.
하물며 그 상대가 제 종족의 숙적이나 다름없는 뱀파이어라니.
당장에서 무리에서 이탈하는 구성원이 나오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널 박살내고 증명할 거다. 난 너희 뱀파이어 따위, 정말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걸 말이야!”
카앙-!
나는 검기에 맞서 녀석의 손톱에서 피어오르는 시퍼런 마력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과연 그렇게 나오겠다는 건가.
썩 괜찮은 방법이었다.
그녀가 정말로 흡혈귀를 혼처로 두길 원한다면, 굳이 이런 내기싸움에서 손속을 잔인하게 둘 필요가 없을 테니까.
혹여나 지더라도 정말 죽일 듯이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어느 정도 의혹을 떨쳐낼 수 있을 터였다.
“흠.”
캉-! 카가각-
나는 갈수록 매서워지는 공격을 여유롭게 받아내며, 이 일을 어떻게 써먹을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경험에 비하면 실력도 썩 괜찮고, 비록 나 때문에 계획이 엎어지긴 했지만 원래대로라면 선발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을 녀석이었다.
확실히, 늑대인간 중에 말 잘 듣는 개가 한 명쯤은 있어도 나쁠 건 없겠지.
셀파스트가 있긴 하지만, 그 별종은 따로 무리를 두고 있지 않으니까.
“어이, 흡혈귀! 도망치지만 말고 반격을 하라고, 반격을! 너한테 우리 부식이 다 걸렸단 말이… 응?”
스륵-
고민을 마친 나는, 쥐고 있던 단검을 다시 허리춤에 집어넣었다.
“네놈, 지금 뭐하자는 거냐!”
난 그 모습에 자존심이 상한 듯 이를 가는 셀레스트를 보며, 보란 듯이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기싸움이지 않나. 그런데 한쪽에 승산이 없어서야, 보는 사람도 재미가 없겠지.”
“…지금 그 말은 내가, 무기를 쓸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약하다는 거냐?”
“그래, 잘 알고 있군.”
사나운 개를 길들이기 위해선, 일단 상하관계를 확실하게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먼저 녀석의 자존심부터 확실하게 박살낼 필요가 있겠지.
“이, 이 빌어먹을 모기 자식이… 찢어 죽여 버리겠다!”
나는 단순한 도발에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그녀를 보며,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부웅-
잽싸게 고개를 숙여 정말로 나를 찢어발길 듯 거칠게 들어오는 손톱을 피해낸 나는, 곧바로 텅 빈 녀석의 품으로 파고들어가 허리를 붙잡았다.
“큿, 이거 풀엇….”
쩌억-!
“커헉!”
그대로 셀레스트를 들어 올려 바닥에 내리친 난, 일부러 끝내지 않고 조금 물러서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언제까지 누워있을 생각이냐. 그래가지고 도대체 누굴 찢어 죽이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크르륵… 빌어먹을, 얕보지 마라!”
나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사납게 이를 드러내는 녀석을 보며, 눈 깜짝할 새에 코앞에 다다른 발차기를 받아냈다.
쩌억-
“으음….”
난 양팔로 늦지 않게 막았는데도 찌르르 울리는 충격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젖혀 곧이어 날아든 손톱을 피했다.
“죽어!”
후웅-
쌩쌩하게 마력을 돌리고 있는데도 이 정도인가.
용사 시절 수많은 사선을 넘어가며 쌓아온 경험과 이미 완숙에 다다른 마력 컨트롤이 아니었더라면, 당장 이쪽이 무너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실력이었다.
길게는 못 끌겠군.
나는 갈수록 속도를 붙여가는 그녀의 연격에 슬슬 위협을 느끼며, 공격에 집중하느라 훤히 드러난 빈틈을 찔러 다리를 걷어찼다.
뻐억-!
“아윽!”
“좋았어, 그대로 밀어붙여!”
“셀레스트, 뭐하는 거냐! 어서 일어서!”
난 그대로 고꾸라진 셀레스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 녀석의 양팔을 붙잡고 한손으로 양 손목을 꽉 쥐었다.
“넘어진 꼴이 꼭 패배한 개 같구나.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사실이지.”
“젠장… 아직, 읏!”
꾸욱-
포기하지 않고 다시 덤비려는 셀레스트의 오금을 쳐 강제로 무릎을 꿇린 나는, 그대로 그녀의 발목을 꾹 밟아 더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 망할… 아읏!”
콱-
녀석을 완전히 제압하고서 머리채를 잡아 뒤쪽으로 당긴 나는, 굴욕적인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는 놈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렇게 약해빠져서야, 정말 혼처라도 구하는 게 낫겠어. 그 허접한 실력으로 아무리 날고 긴다한들, 네가 과연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닥쳐!”
후욱-
“…위험해라. 이미 승부는 난 거 같은데, 아직도 더 하고 싶나?”
“그으윽….”
갑작스레 머리를 움직여 내 팔을 물어뜯으려고 하는 그녀의 이빨을 피한 난, 슬며시 고개를 저으며 달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으하하하! 좋아, 아주 훌륭하구만! 설마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제압할 줄이야. 역시 카르카쉬 님과 악투스님께서 인정한 남자다워! 어이, 아베르. 승부에 이견은 없겠지? 부식은 나중에 한 번에 모아서 우리 막사로 보내라고!”
“큭… 이런 젠장! 셀레스트 너….”
나는 호탕하게 웃으며 내 등을 팡팡 두들기고 떠나는 달란과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셀레스트를 노려보는 아베르를 보고선, 이만 손목을 풀어주었다.
“…다들 돌아간다.”
“제기랄, 이번에야말로 발록 놈을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버릴 수 있었는데.”
“망할 녀석, 자기가 뭔데 아베르님 순서를 채가선 멋대로 져버리는 거냐고.”
“설마 그거 아니야? 그 왜, 요새 한창 떠들썩한 소문 있잖아.”
난 이윽고 주변에 있던 늑대인간들을 이끌고 자리를 떠난 아베르를 보며, 아직도 무릎 꿇은 채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녀석을 살폈다.
“흐윽….”
“울지 마라.”
나는 분한 마음에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셀레스트를 보며,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짜악-!
“멋대로 동정하지 마라! 이게 다 네놈 때문이잖으냐!”
녀석은 입술을 꾹 깨물며, 거칠게 내 손을 쳐냈다.
“읏, 이거… 이거 놔!”
난 얼얼한 손을 탈탈 털며, 궁지에 몰린 개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분한가?”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휙 돌리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끝까지 그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려드는군.
이제 더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주제에.
“이대로 돌아가면 네 무리는 뿔뿔이 흩어지겠지. 가뜩이나 그 소문 때문에 이리저리 얘기가 나오는 상황에서,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말이야.”
“…닥쳐. 그런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난 조용히 몸을 돌려 힘없이 제 막사로 향하는 녀석을 보며, 이내 천천히 미끼를 던졌다.
“그 소문. 네가 원한다면 처리해주마. 거기에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도록 도와줄 수도 있지.”
“…뭐?”
나는 솔깃한 제안에 귀를 쫑긋하며 우뚝 멈춰선 셀레스트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게 정말이냐?”
“음.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조건이라면….”
난 곧장 이쪽을 돌아보며 눈을 깜빡이는 녀석을 향해,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내 것이 되라.”
“뭣….”
늑대인간들 사이에 도는 정보와, 혹시 개중에 섞여있을지 모를 온건파의 색출.
그녀를 내 아래에 둘 수만 있다면, 그 모두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늑대인간 쪽은…
“너, 설마 날 좋아했던 거냐?”
“…응?”
“그래서 오빠가… 너, 너! 그럼 결국 다 네놈 때문이었던 것이지 않으냐!”
“그게 무슨….”
후웅-
나는 갑작스레 날아온 주먹에 흠칫 놀라 몸을 빼며, 복잡한 표정으로 이쪽을 흘기는 녀석의 모습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터무니없는 오해를 사버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