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이만 동굴을 나선 우리는, 머잖아 근처에 도착해 자리를 잡은 본대를 찾아 합류했다.
“그러니까, 지금 있는 건 그 대족장이라는 녀석이 전부란 말이지.”
“예. 인간 쪽에서 누가 더 올라오지 않은 이상 그게 끝일 겁니다.”
협곡을 가득 메운 천막들 중에 하나를 얻어 짐을 풀고 밖으로 나온 나는, 곧바로 투마왕을 찾아가 카르네몬의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으으음. 아쉽구만, 아쉬워. 강한 녀석은 많으면 많을수록 즐거운 법인데 말이야.”
“대주술사가 남아있었더라도 마왕님이 원하시는 것처럼 그녀와 치고 박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앞에 나서는 일 없이, 뒤에서 꽁꽁 보호받았을 테니까요.”
“그래도 그 주술인지 뭔지를 받으면 대족장이라는 놈도 더 강해질 수 있는 거잖나. 카르카쉬 그놈이 아래에서 웬 노인네를 상대로 재미 좀 봤다고 해서, 이쪽도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거야 원, 김이 다 새는구만.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그쪽으로 갈 걸 그랬어.”
나는 대주술사가 빠졌으니 싸울 맛이 팍 떨어졌을 거라고 투덜대는 악투스를 보며, 지끈거리는 미간을 짚었다.
이 철없는 전투광 같으니.
머릿속엔 어떻게든 강자랑 싸워볼 생각뿐이군.
“…아무튼 마왕님께서 그 대족장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사자갈기를 풍성하게 두르고 제 발로 맨 앞에 나와 있을 테니,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흐흐, 그래. 우르누이라고 했나. 정말로 카르카쉬가 싸웠다던 그 노인네만큼 강한 녀석이 맞는 거겠지?”
“으음, 굳이 따지자면 검귀가 좀 더 강할 거 같긴 합니다만… 대족장은 제 몸뚱이를 무기로 쓰는 녀석이니 싸우는 맛은 이쪽이 더 좋을 겁니다.”
그래도 그만큼 싸움을 눈앞에 두고선 사람이 단순해지니, 원하는 대로 써먹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가 대족장만 잘 막아준다면, 나머지야 뭐 볼 것도 없지.
“그럼 이만 내일 뵙겠습니다.”
“음… 아니, 잠깐.”
그렇게 보고를 마치고 배정받은 천막으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나는 꽤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멈춰 세우는 그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이제 와서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에릭. 내 노파심에 미리 일러두겠는데, 혹시라도 중간에 끼어들 생각은 하지 말도록.”
뭐야, 그런 거였나.
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아무래도 내가 마룡왕이 한창 싸우던 중, 검귀를 기습해 죽였다는 얘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애초에 전 전열에 섞여 싸울 생각이 없으니까요.”
전장에서의 내 특기는 어디까지나, 요인 암살 혹은 조용히 뒤로 돌아 적들의 후열을 헤집어놓는 것이었다.
남들처럼 앞에서 마구 몰려드는 적군을 일일이 상대하는 것은,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행동이었다.
그런 건 기사들이나 하는 짓이지.
펄럭-
남들과 달리 몇 배는 더 커다란 천막을 젖히고 밖으로 나온 나는, 곧바로 내가 배정받은 자리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오, 이게 누구야! 요새 우리 군에서 한창 떠오르고 있는 샛별 아닌가.”
그렇게 몇 분쯤 걸었을까.
나는 무슨 잔치라도 벌이는지 시끌시끌한 발록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던 도중,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내미는 누군가를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발라크보다 조금 더 큰 덩치에, 등에 커다란 몽둥이를 메고 다니는…
“아, 달란 님. 오랜만입니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나는, 곧 그의 이름을 기억해내고선 내밀어진 손을 마주잡았다.
“흐흐, 그래. 이렇게 얘기를 나누는 건 그때 수련장에서 다 같이 본 이후로 처음인가?”
“예, 그렇게 되겠군요.”
적당히 안면을 트고 인사를 나눈 나는, 그대로 꾸벅 고개를 숙이고선 다시금 가던 길을 따라 발을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고 했다.
“에헤이,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나. 눈앞에 이렇게 좋은 구경거리가 있는데, 이걸 놓치면 섭섭하지.”
우악스러운 손에 붙잡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달란을 돌아보았다.
돌아가서 아이시스한테 들어야할 얘기도 있는데다가 조금 피곤해서 빨리 자려고 했건만.
하지만 아주 무시하고 지나가기엔, 그가 말석이긴 해도 사천왕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하긴 뭐 급한 것도 없는데, 가능하면 좋은 인상을 심어놓은 편이 낫겠지.
“잘한다, 가르쉬! 아주 뭉개버려!”
“페레스트, 주저하지 말고 물어뜯어버려!”
이게 무슨…
하는 수 없이 그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눈앞에서 치고받고 있는 발록과 늑대인간을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실은 이 협곡을 지나는 동안 어디 들를만한 마을이 하나 없어서 말이야. 요즘 들어 밥이 나오는 게 영 시원치 않더라고. 그래서 이참에 찌뿌둥한 몸도 풀 겸, 늑대인간 놈들이랑 싸움 내기를 하고 있었다네.”
“싸움 내기, 말씀이십니까?”
“양쪽에서 한 명씩 총 다섯 번. 그중에 더 많이 이긴 쪽이 나중에 받을 부식을 전부 가져가기로 했지.”
음, 그런가.
아니 잠깐, 그럼 여기서 발록이 지면 우리 독립대의 부식도 같이 날아가는 건가.
나는 먹는 걸 좋아하는 카렌이 가뜩이나 저녁도 부실한데 부식도 받지 못했다간 또 무어라 투덜댈지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혹시 이게 몇 번째입니까?”
“마침 딱 네 번째군. 왜, 마지막은 자네가 한 번 나가볼 텐가?”
“음….”
달란의 제안에 침음을 흘리며 잠시 고민에 빠진 나는, 곧 결정을 내리고선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예, 맡겨 주십시오.”
“으하하! 좋아, 좋아. 원래는 내가 나가기로 했지만, 그러면 저쪽에서도 마찬가지로 사천왕이 나올 테니까. 괜히 전쟁을 앞두고 둘 중 하나가 다쳤다간, 벨룸한테 욕을 먹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럼 상대는 저쪽에서 알아서 정할 테니, 자네가 한 번 나가보게나.”
부하들의 부식을 챙겨주는 것도 엄연히 대장의 의무.
더구나 출정식 땐 발록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기에 타군에는 소문이 나지 않았지만, 이번엔 늑대인간과 붙는 싸움이니만큼 다른 부대에도 내 입지를 세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흐아아아압!”
뻐억-!
“컥….”
난 오랜 싸움 끝에 결국 늑대인간에게 밀려 무릎을 꿇은 발록을 보고선, 천천히 몸을 풀며 나갈 준비를 마쳤다.
“으하하! 가르쉬 녀석, 자신만만해하더니 결국 된통 깨졌구만!”
“이 멍청아, 지금 좋아할 때가 아니야! 이러다 우리 부식이 다 저 놈들한테 넘어가게 생겼다고!”
“뭣… 이, 이 가르쉬 멍청한 녀석!”
“크흐흐. 이 빌어먹을 발록 놈들. 드디어 오늘, 저번 주의 설욕을 되갚아 줄 수 있겠구나!”
마침 주변의 열기도 달아오를 만큼 후끈 달아올랐군.
나는 이윽고 다른 녀석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 나가는 발록을 보며, 천천히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응? 넌 뭐야?”
“다음은 달란, 그 사천왕 아니었어?”
“뱀파이어… 비열한 모기 자식이 여긴 무슨 일이냐! 네놈들 자리는 저 끝에 떨어져 있을 텐데?”
난 사방에서 들려오는 의문과 늑대인간들의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은 나다. 독립대긴 해도 엄연히 악투스 님 아래에 있으니까, 종족이 이래도 자격은 문제없겠지.”
“이 친구 실력은 내가 보증할 테니 걱정 말게.”
“달란! 이제 와서 갑자기….”
나는 원래 달란과 싸우기로 했었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를 박찬 늑대인간을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왜, 무섭나? 패배한 개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그럼 내가 나가는 건 없던 일로 하고 물러나도록 하지.”
“너, 이 같잖은 녀석이 감히! 마룡왕님의 무기고에 한 번 들어갔다 나왔다고 해서 그 오만함이 아주 하늘을 찌르는구나! 오냐, 이 내가 오늘….”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아베르님.”
난 으득 이를 갈며 앞으로 나오려는 사천왕을 가로막는 여자를 보고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거 참,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셀레스트,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제가….”
셀레스트.
나는 출정 전, 마왕에서 본 것을 마지막으로 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제가 하게 해주십시오.”
“너… 후. 그래, 알았다.”
멋대로 저를 제치고 앞으로 나선 셀레스트를 향해 무어라 소리치려던 아베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악귀처럼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을 보고선 한숨과 함께 한 발 물러섰다.
“에릭… 에릭 가이오스.”
“무슨 일이냐. 도대체 왜 그렇게 화났지?”
“…무슨 일이냐고?”
난 으득 이를 갈며 날카로운 손톱을 뽑아드는 녀석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가 별로 좋은 사이는 아니긴 했어도, 이 정도로 척을 지진 않았던 거 같은데.
물론 선발대 시절에 내가 북쪽에서 인간과 수인을 싸움붙인 덕에 그녀의 계획이 엎어지긴 했지만, 그걸로 화를 낼 거라면 그전에 얼마든지 그럴 기회가 있었다.
…이상하군.
“네놈….”
“음?”
“도대체 우리 오빠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응?
카앙-!
“크으으….”
나는 아직 시작한다는 사인도 없었는데 이쪽으로 달려든 녀석을 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손톱을 막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베일 뻔했군.
그런데 방금 뭐… 오빠라고?
“죽어!”
카각-
도대체 내가 제 오빠를 만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닌 거 같았다.
일단 때려눕히고 물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