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91화 (91/200)

제91화

“대주술사님께서 병상에….”

“빌어먹을 인간 놈들, 도대체 그 침입자 하나 제대로 못 잡고 뭘 하고 있던 거야!”

무사히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편히 누워있던 나는, 광장에 모여든 성난 수인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로 그들을 내려다봤다.

“젠장, 이번에 또 무슨 소란이야?”

“그게… 새벽에 자객이 들었답니다. 그놈이 호위를 서고 있던 부족장들을 죽이고, 대주술사까지 노렸다는 모양입니다.”

“뭐? 아니, 분명히 어제 하루 영주성에서 머문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그 자객이라는 녀석이 영주성에 몰래 숨어들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빌어먹을, 이거 미치겠군.”

기사들은 어제와 달리 아무도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다.

증거도 없고 억울했던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확실히 인간 쪽에 책임이 있었으니까.

물론 문 앞을 지키고도 대주술사를 지키지 못한 호위들의 잘못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영주성에 침입을 허용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래서 증상은 어떻게 되십니까?”

“가끔씩 눈을 파르르 떠시면서 깜빡이고 계시긴 한데, 나머지는 전혀 움직이질 못하고 계신다. 다행히 아직 목숨엔 지장이 없으신 듯하지만, 그것도 갈수록 점점 호흡이 거칠어지고 계셔서….”

한쪽에선 몇몇 수인들과 사제복을 입은 인간들이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 세르노이가 대체 무슨 독에 중독됐는지를 찾고 있는 거겠지.

“그 정도로 심한 마비 증상이라니. 혹시 근처에 독이 떨어진 흔적 같은 건 없었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바닥에 웬 깨진 유리조각이 잔뜩 있었다. 그리고 개중에 진한 녹색 액체 같은 게….”

“진한 녹색? 설마….”

슬슬 눈치챘나.

나는 황급히 약초를 구하기 위해 가게를 찾는 사제들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백날 돌아다녀봐라.

떨어진 이파리 하나 구할 수 없을 테니.

“뭐, 뭐라고요? 말랭이 풀이 다 팔렸다고요?”

“어제 어떤 남자가 와서 전부 사갔다니, 그러니까 그게 대체 누굽니까!”

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고성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슥 둘렀다.

말랭이 풀은 대륙 남부에선 동네 뒷산에만 가도 흐드러지게 나있을 만큼 흔한 약초였지만, 북부에선 그 어느 곳에서도 자생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적어도 이 도시에 있던 물량은 내가 어제 전부 사들여 카렌에게 넘겼으니, 지금 당장 가장 가까운 마을에 가서 구해온다고 해도 꼬박 하루는 기다려야할 터였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세르노이를 직접 그리로 데려가는 거겠지.

어느 쪽이 됐든 그녀가 이번 전투에 참여할 일은 없을 터였다.

녹색 밭 거미의 체액은 해독하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물건이었으니까.

쿵-!

“세르노이!”

나는 한창 혼란스러운 가운데, 북적이는 인파를 뚫고 영주성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구의 수인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대, 대족장님!”

대족장 우르노이.

난 잔뜩 성난 얼굴로 영주성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가는 사자 수인의 모습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빌어먹을 전쟁광 녀석.

아무래도 새벽에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온 모양이었다.

이방인들은 사지불구가 되어 돌아와도 어떻게든 다시 전선에 밀어 넣던 주제에, 고작 독에 조금 중독된 것 가지고 웃기지도 않는군.

“뭐, 뭐하시는 겁니까! 아무리 대족장이라고 해도, 영주님의 허락도 없이 안으로 들어올 수는….”

“비켜라.”

쿠웅-!

“커억….”

녀석은 당황한 표정으로 제 앞을 막아선 병사를 가볍게 날려버리며, 성큼성큼 저택으로 향했다.

“흐흐. 화가 아주 머리 꼭대기까지 찼나보군.”

이후로는 섣불리 들어갈 수 없어 어떻게 됐는지 자세히 살펴보진 못했지만, 곧 족장 몇을 포함한 병사들이 세르노이를 데리고 도시를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호위가 많이 붙었군.”

적당히 족장 한둘만 붙여 보냈더라면 따라가서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입술을 핥으며, 성문 쪽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아이시스.”

[응, 에릭.]

난 천천히 방에 있는 물건들을 챙기며,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마왕군이 도착할 때까지 앞으로 얼마나 남았지?”

[오늘 밤, 협곡 앞에 도착해서 쉴 예정. 공격은, 내일 아침.]

“음, 알았다. 그럼 곧 거기서 보도록 하지.”

나는 그녀의 대답에 조용히 고개를 주억이고선, 여관을 나서 마차를 구해 올라탔다.

이제 더 이상 도시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대주술사도 근처 마을로 실려 갔으니, 남아있는 변수는 대족장 하나뿐.

그 정도야 투마왕 혼자서도 어렵지 않게 정리할 수 있을 터였다.

아마 놈들이 도시 안으로 들어가 성벽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더라도, 넉넉히 이틀이면 함락시킬 수 있겠지.

그마저도 뻔한 싸움을 굳이 길게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 실제로는 하루도 안 돼서 도시를 버리고 도망갈 게 분명했다.

제국에서 또 다른 변수를 보내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히히힝-

“오셨습니까, 형님.”

“생각보다 일찍 왔구나, 에릭.”

“중간에 일이 좀 틀어져서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 마무리는 내고 와서 다행이군.”

머잖아 세 사람이 머물고 있는 동굴 앞에 도착한 나는, 근처에 마차를 숨기고선 짐을 풀기 위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음? 이 냄새는….”

난 동굴 입구를 지나기가 무섭게 코를 간질이는 구수한 냄새에, 주린 배를 쓰다듬었다.

“스튜다. 오늘은 아이시스가 당번이지.”

스튜라.

기대되는군.

생각해보니 새벽 늦게 들어와 바깥의 소란에 깬 터라, 아직 한 끼도 입에 대지 못한 참이었다.

“꽤 먹을 만하실 겁니다, 형님. 만일 누구 당번이었다면 얘기가 좀 달랐겠지만….”

“뭣… 그, 그거 지금 본녀한테 들으라고 한 소리냐? 그러는 네 음식도 형편없지 않느냐! 끽해봐야 그대로 불 위에 올린 게 전부였던 주제에.”

“먹지도 못할 이상한 걸 만드는 것보단, 차라리 그냥 구워먹는 게 낫다.”

“네, 네놈….”

나는 양옆에서 서로를 보고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선, 넓은 공동 가운데서 스튜를 끓이고 있는 아이시스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맛있겠군. 먼저 한입 먹어봐도 되나?”

“으응… 에릭, 너무 일찍 왔어. 점심, 아직 안 됐으니까.”

난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묵묵히 스튜를 젓는 그녀를 보며, 흐뭇한 미소와 함께 새하얀 머리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탁-

“이번엔, 안 돼. 음식에 머리, 들어가니까.”

“으음, 알았다.”

그러기 무섭게 날아온 손짓에 손목을 맞은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이쪽을 쏘아보는 아이시스의 모습이, 마치 사춘기를 맞은 딸을 보는 것만 같아 조금 서운했다.

“…완성되면 바로 에릭부터 줄 테니까.”

“음, 그거 영광이군.”

나는 이윽고 나를 쳐낸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는지 우물쭈물 말을 붙여는 그녀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에릭, 아까 중간에 일이 틀어졌다고 한 건 무슨 소린가.”

“그거 말인가. 본래는 주둔하고 있는 녀석들의 앙금을 이용해서 싸움을 붙이려고 했는데, 하필 막 터지려는 순간에 생각지도 못한 놈이 끼어들어서 말이지. 도중에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놈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냐?”

“대주술사. 전에 벨라노르에서 봤던 검귀랑 마찬가지로, 그랜드마스터라 불리는 놈들 중 하나다. 차이가 있다면 그쪽은 전직, 이쪽은 현직이 되겠군.”

“검귀라면… 그때 홀로 아버님의 앞을 막아섰다던 그 늙은 노인 말이냐? 으음, 이번 전투는 생각보다 쉽지 않겠구나.”

그랬겠지.

내가 그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도시를 나와 버렸다면 말이다.

난 꽤 심각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침음을 흘리는 카렌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인간과 수인 놈들 사이를 갈라놓지 못한 대신, 그 녀석을 중독 시키고 오는 길이니까. 적어도 이번 전투에서 대주술사가 나설 일은 없을 거다.”

“그, 그런가?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역시 대단하십니다, 형님!”

톡톡-

“에릭.”

“음?”

이후로 두 사람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던 나는, 조용히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스튜, 거의 다됐어. 에릭부터 주기로 했으니까.”

“아, 고맙다. 그럼 바로 덜어먹을 접시를….”

꾸욱-

“음?”

점심이 다 됐다는 얘기에 곧장 식기를 챙기러 일어난 나는, 내 소매를 붙잡고 꾹 잡아당기는 아이시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가지러가는 김에 따로 부탁할 일이라도 있나?”

“으응… 이거.”

난 그대로 손에 쥐고 있던 국자에 스튜를 조금 떠서 내미는 그녀를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간을 봐달라는 건가?

“아. 후, 후.”

그녀는 잠시 당황한 내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이고선 바람을 불어 스튜를 식혔다.

“응, 이제 됐어. 자, 아.”

이윽고 뿌듯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주억인 아이시스는, 쭉 팔을 뻗어 내 입으로 국자를 내밀었다.

후룹-

“맛있어?”

하는 수 없이 그대로 스튜를 받아먹은 나는, 어딘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그녀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음. 맛있다.”

“…응.”

정말로, 제법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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