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89화 (89/200)

제89화

쾅-!

“셀파스트.”

광장 구석에 있는 파란지붕.

그 3층 맨 끝 방 앞에 도착한 나는, 꽉 쥔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끼이익-

“…에릭, 암호는 어따 팔아먹고 이렇게 마구잡이로 두드리는 거야?”

“변수가 생겼다. 계획이 엎어졌어.”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문을 여는 셀파스트를 보고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곳 카르네몬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선, 이번 작전을 꼭 성공시킬 필요가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시간은 조금 걸릴지언정 큰 피해 없이 마왕군이 점령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국 북부의 전력만이 도시를 지키고 있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아무리 그간 수인들과의 분쟁과 에베르 후작가의 부재로 인해 인간들의 전력이 비교적 약화되어 있다고는 한들, 대족장과 대주술사가 이끄는 수인들의 저력은 절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이쪽은 마왕이 네 명이나 있으니 제국에서 가제프라도 보내오지 않는 이상 절대 패배할 일은 없겠지만, 이대로 가다간 분명 꽤나 고전하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무언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뭐? 그게 무슨… 음, 일단 들어와.”

난 곧 활짝 열린 문 안쪽으로 발을 옮기며, 바닥에 널린 쓰레기들을 피해 의자에 앉았다.

“변수가 생겼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히 좀 얘기해봐.”

“대주술사가 도착했다. 젠장,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벌써? 그럴 리가. 어제까지만 해도 대족장이랑 같이 여기서 이틀거리는 떨어진 마을에 있었을 텐데.”

나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그를 보며, 슬며시 눈을 빛냈다.

보아하니 진즉에 그 마을을 비롯해 여기저기 첩자를 심어놓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 벌써부터 그만큼이나 되는 정보를 모을 수 있었던 거겠지.

이건 앞으로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겠군.

“대족장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혼자 먼저 도착한 거 같더군.”

“혼자서…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면 녀석이 출발했을 때, 나한테 보고가 들어와야 했을 텐데. 설마 벌써 들켰다고?”

난 당황한 얼굴로 손톱을 깨무는 셀파스트의 모습에, 씁쓸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럴 만도 하지.

만일 저쪽이 첩자들의 존재를 눈치 챈 거라면, 당분간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정보를 모을 수는 없을 테니까.

“아니. 어렴풋이 누군가 제 동선을 감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만, 네가 여기저기 사람을 심어놨다는 사실은 아직 들키지 않았을 거다.”

“그걸 네가 어떻게 장담하지? 아니, 애초에 걸리지 않았는데 누군가 자기를 감시하고 있다는 걸 무슨 수로….”

“예언의 꿈.”

나는 교단의 성녀가 부여받는 여신의 신탁처럼, 대주술사인 세르노이에게 내려오는 계시를 떠올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제 죽인 놈들 중 하나가 제 부족장에게 그런 말을 하더군. 대주술사가 꿈을 꾸었다고. 그리고 족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 마왕군에 대한 경고를 늘어놓은 모양이다. 그들이 그렇게까지 잡음을 눌러가며 인간들과 손을 잡은 것도, 모두 그것 때문이라더군.”

“그 말은 지금, 그년이 미래를 볼 수 있기라도 한다는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꿈이겠지.”

“말도 안 돼….”

녀석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주먹을 꾹 쥐었다.

“미래를 알 수 있다니. 그럼 정보고 작전이고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잖아!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전에 피해버리던가 따로 대책을 세워버리면 그만일 거 아니야.”

“아니, 그랬다면 애초에 인간들과 치고 박지도 않았겠지. 아마 제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은 아닐 거다.”

난 꽉 쥔 주먹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성녀의 신탁 그리고 대주술사의 예지는 확실히 대단한 능력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이렇게까지 불안해할 정도로 만능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겠지. 에릭, 네 말이 맞아. 원하는 대로 미래를 엿볼 수 있다면, 애초에 저들끼리 쓸데없이 제 살을 파먹는 일 따위를 벌이고 있진 않았겠지.”

“셀파스트.”

물론 미래를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도움이 되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계속해서 내가 용사 시절에 겪었던 일과 들었던 사실들을 이용해오고 있지 않았던가.

“아주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쪽에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간단한… 해결책?”

“그래.”

나는 솔깃한 제안에 그 폭신해 보이는 귀를 쫑긋 세우는 녀석을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죽이는 거다.”

대주술사, 세르노이를.

* * *

“내가 알아낸 건 이게 전부야.”

“음, 고맙다.”

셀파스트로부터 내용이 빼곡하게 들어찬 종이 몇 장을 건네받은 나는, 전과 마찬가지로 삐뚤빼뚤한 글씨를 보고선 흠칫 몸을 떨며 품에 챙겨 넣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녀석의 습관까지도 전부 캘 수 있었을 텐데. 뭐, 녀석을 죽이려면 대족장이 도착하기 전에 일을 시작해야할 테니 어쩔 수 없지.”

“됐다. 이거면 충분해.”

난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는 그를 보며,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셀파스트가 짧은 시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해온 정보에는, 지금 세르노이가 묵고 있는 영주성의 구조와 오늘 하루 임시로 호위를 맡은 이들의 명단이 들어있었다.

“…정말로 혼자 괜찮겠어? 듣자하니 인간들 중에 검귀라고 불리는 녀석이 벨라노르에서 마룡왕님의 인정을 받았다던데. 대주술사도 그놈과 같은 그랜드마스터 아니야? 심지어 그쪽은 은퇴한 노인네고, 이쪽은 현역….”

“걱정할 거 없다.”

검귀, 마흐제브.

나는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리운 이름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이만 등을 돌렸다.

“제아무리 그랜드마스터라고 한들 주술사는 주술사. 방심하고 있다면 아주 못 잡을 것도 없지. 게다가 여차하면 도망치는 것 정도는 문제없을 거다.”

무투파인 대족장이라면 모를까.

대주술사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물론 평소 같았으면 그마저도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지금은 전에 잠시 머물던 마을에서 첩자들의 눈을 피해 나오느라 제 호위도 놓고 온 상태였다.

전화위복이라 하던가.

녀석이 인간과 수인의 충돌을 막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온 것이, 어찌 보면 연합의 가장 큰 전력 중 하나를 제거할 기회가 되어준 셈이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다.”

“잠깐만!”

그렇게 이만 방을 나서려던 나는, 문고리를 잡기가 무섭게 뒤에서 나를 붙잡는 셀파스트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거.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이리로 연락해라.”

난 녀석의 손바닥 위에 놓인 수정구를 내려다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영광으로 알라고. 우리 마왕님을 제외하면, 아직 아무한테도 준 적 없으니까.”

그런가.

그럼 사실상 개인적으로 직접 연락할 수단을 받은 건 내가 처음이로군.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수정구를 집어 들었다.

“고맙군.”

“고마우면 죽지만 마. 괜히 찜찜할 거 같으니까.”

죽지 말라니.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군

끼익-

난 조심스레 품속에 수정구를 챙기며, 곧바로 방을 나서 광장으로 향했다.

대주술사를 죽일 준비를 마저 끝마치기 위해서.

* * *

“마, 말랭이 풀을 전부?”

“예. 창고에 있는 것까지 싹 다 사겠습니다.”

여관을 나서 밖으로 나온 나는, 곧바로 도시에서 약초를 취급하는 가게들을 찾아 모조리 돌아다녔다.

“도대체 무슨 일로 그걸 전부 사들이겠다는 거요? 물론 나야 좋긴 하지만, 그게 그렇게 쓸데가 많은 약초는 아닌데.”

나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창고에서 무언가를 들고 꺼내오는 주인장을 보며, 조용히 품을 뒤적였다.

쿵-

“여기 있수. 우리 가게에 있는 건 이제 전부요. 미리 말하는데, 혹시나 나중에 쓸데없다고 다시 가져와도 돈을 돌려줄 수는 없수.”

“괜찮습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으니까요.”

팅-

“허, 허업… 감사합니다, 손님!”

아까 꺼낸 주머니에서 금화를 하나 집어 그에게 튕긴 나는, 약초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어 몰고 온 마차에 실었다.

이걸로 마지막이군.

“아이시스.”

“응.”

그 길로 곧장 성문을 나서 아침에 미리 불러놓은 아이시스를 만난 나는, 조용히 마차에서 내려 그녀를 마부석에 앉혔다.

“짐칸에 든 거, 다 태우면 돼?”

“음. 그럼 잘 부탁하마.”

“…응. 알았어.”

덜컹-

그리고 곧바로 그녀를 카렌들에게 돌려보낸 나는, 서둘러 다시 도시로 걸음을 옮겼다.

말랭이 풀.

제국 남부에서 잡초나 다를 바 없이 흔히 볼 수 있는 그 누런 풀은, 약초로써 오로지 한 가지 목적으로만 쓰이고 있었다.

“훌륭하군.”

나는 품에서 진한 녹색으로 빛나는 불길한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내들며, 조용히 장갑을 끼고 단검의 날에 그걸 펴 발랐다.

녹색 밭 거미의 체액.

아주 극소량만 잘 활용한다면 말을 절고 손끝을 떠는 환자들을 단박에 치료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약재지만, 많이 쓰면 순식간에 상대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맹독이 되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이 체액에 중독된 사람을 고치는 방법은 단 하나.

말랭이 풀을 찧어, 그 즙을 달여 먹는 것뿐이었다.

“이러면 만일 실패하더라도, 최소한 이번 전투에서 그 빌어먹을 년의 낯짝을 보게 될 일은 없겠지.”

난 씨익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도시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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