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88화 (88/200)

제88화

“빌어먹을 인간 놈들, 감히 도와주러 온 은혜를 이딴 식으로 갚다니!”

밤새 두 명의 족장을 더 암살하고 적당히 광장 근처 여관에 방을 잡아 잠을 청하던 나는, 창밖으로 들리는 소란에 부스스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망할 수인들이 지금 뭐라는 거야?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막 교대하려고 나왔는데, 앞에 모여서 이렇게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시작됐나.

슬그머니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나는, 한 기사단이 숙소로 잡은 듯한 여관 앞을 둘러싼 수인 무리들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새벽까지 깨어서 고생한 보람이 있군.

쿵-

“아침부터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야!”

“다, 단장님!”

나는 곧 여관 문을 박차고 나온 육중한 갑옷의 기사를 보며, 즐거운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너희들은 뭐냐! 분명 전쟁을 앞두고 당분간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은 없기로 하자 했거늘.”

그는 흉흉한 분위기로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수인들을 보며, 불편한 기색으로 그들을 슥 훑었다.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은 없기로 하자고? 감히, 감히 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을 내뱉는 거냐!”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밤새 그런 짓을 벌여놓고서, 그따위 망발을 내뱉다니!”

“뭣….”

단장은 도리어 고함을 지르며 자신을 노려보는 이들을 보고선, 당황한 표정으로 뻐끔거렸다.

“망발? 이 짐승 새끼들이, 감히 지금 누구한테….”

“다들 조용!”

금방 정신을 차린 그는 상관의 모욕에 발끈하며 나서는 부하를 제지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짓이라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밤새 어떤 일이 있었던 거지?”

“이 자식, 지금 모르는척하겠다는 거냐! 네놈… 네놈이 어젯밤, 우리 족장님을 죽였잖느냐!”

수인들은 비통한 표정으로 이를 갈며 주먹을 꾹 쥐었다.

나는 개중 몇몇이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제 무기에 손을 올리는 모습을 보며, 조용히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스릉-

“이, 이 미친놈들이 무기를… 한번 해보자는 거냐!”

“단장님께서 누굴 죽였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더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단장님!”

난 그에 재빨리 검을 뽑고 대치하는 기사들을 보며, 슬쩍 주변을 넓게 내려다봤다.

“방금 들었어? 인간 놈들이 어디 족장을 죽였다는데?”

“저거 푸른 가젤 부족 아니야? 그러고 보니 아까 붉은 늑대 부족에서도 밤새 족장이 돌아오질 않는다고 하던데, 설마….”

마침 근처를 돌아다니다 소란에 잠시 걸음을 멈춘 구경꾼들 사이에서, 조금씩 의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진 딱히 수인들의 말을 증명할만한 증거가 없었기에, 족장을 잃은 부족원들을 제외하고는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좀 거들어줘야겠군.”

나는 생각보다 미적지근한 태도로 서로 노려보기만 하는 구경꾼들을 보며, 천천히 창문에서 떨어졌다.

하긴 인간들과 괜한 다툼을 벌였다간 군법으로 다스리겠다는 엄중한 경고가 떨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누가 벌써부터 총대를 메고 싶어 하겠는가.

그랬다간 괜히 제 부족한테까지 피해가 갈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끼익-

금방 로브를 둘러쓰고 바깥으로 나온 나는, 구경꾼들 속에 숨어들어 다시금 상황을 자세히 살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 난 어제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너희들의 족장이 누군지조차 모른다.”

“거짓말하지 마라! 네놈들의 견장에 달린 그 문양. 족장님의 손바닥에 그것과 똑같이 생긴 핏자국이 눌어붙어있었거늘!”

“그게 무슨, 그럴 리가….”

제 기사단의 상징인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견장을 내려다보며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단장의 모습에, 난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혹시 단원 중에 정말로 범인이 있는 건 아닐까.

복잡한 눈빛으로 뒤쪽을 한 번 슥 훑은 녀석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다시 눈앞의 수인을 바라보았다.

국경에서 몇 번이고 직접 무기를 맞대어봤을 그가, 족장들의 강함에 대해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아무리 밤새 술에 취해있었을지도 모른다 한들, 제 단원들이 그만한 강자를 상처 하나 없이 멀쩡히 죽이고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아니다.”

“이 자식이 끝까지 발뺌을!”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내가 너희 족장을 죽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마왕군을 앞에 두고 지난 앙금을 이 자리에서 풀만큼 우린 멍청하지 않다.”

“그건….”

나는 생각보다 차분히 상황을 헤쳐나가는 기사단장을 보며,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귀찮게 만드는군.

그래도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경우 중 하나였다.

보통 병사들과는 달리 기사.

그것도 단장의 직위에 오를 정도의 실력자라면, 못해도 승계가 가능한 귀족 가문의 자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서 순간 머리가 굳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만한 재목들이었다.

“분명 누군가 우릴 음해하려고….”

“그러면 어젯밤에 어디 있었는지 증명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해를 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의 이야기였다.

난 천천히 제 생각을 풀어놓는 녀석의 말을 끊으며, 말뚝에 쐐기를 박아버렸다.

“그, 그래. 어제 여관 안에 틀어박혀 있었든, 어디 밖을 돌아다녔든. 누군가 본 사람이 있을 거 아니야?”

“맞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

나는 내가 던진 한 마디에 여기저기서 고개를 주억이며 맞장구를 치는 구경꾼들을 보고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과연 일리가 있군. 족장님의 시체는 성벽 밖의 숲 쪽에 놓여있었다. 요새 밤마다 머리 좀 식히러 산책 좀 하고 오시겠다고 나가서 새벽에 들어오시곤 했는데, 오늘따라 너무 늦으셔서 찾으러 나갔더니….”

그에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부족장이 어느 정도 흥분을 가라앉힌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으음, 확실히. 인간, 네 말대로다. 너희가 굳이 우리 족장님을 죽일 이유가 없어.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어제 밤에 어디 있었는지만 알려줄 수 있겠나? 만일 그때 네가 성벽 밖으로 나가 있지 않았다면, 내 책임지고 이번 소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하마.”

난 씁쓸한 표정으로 성난 부족원들을 물리며 무기를 집어넣는 부족장을 보고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내며 기사단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젯밤, 어디에 있었지?”

“윽, 그건….”

나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침착했던 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든 것을 보며, 씨익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대답하기 곤란할 테지.

왜냐면 녀석은 그때 성벽 밖을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물론 푸른 가젤 부족의 족장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갑갑함을 풀기 위함이었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이유가 어찌 됐건 밤새 성벽을 나선 기록이 있는 사람들 중, 그 족장을 홀로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실력자는 그밖에 없었으니까.

거기에 시체의 손바닥에 제 견장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문양의 핏자국이 찍혀있기까지 했으니,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안 봐도 뻔했다.

“나, 나는….”

마음 같아선 대충 거짓으로 둘러대고 싶겠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어젯밤 그가 도시를 나설 적에, 성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가 있을 터였다.

지금 당장은 이 자리에 없을지 몰라도, 이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괜히 여기서 없는 이야기를 지어냈다간, 나중에 혹여나 자신이 성문 밖으로 나갔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큰 역풍을 맞게 될 터.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또 사실대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

“왜 그러나. 어째서 대답을 못 하는 거지? 설마….”

스릉-

난 사면초가에 갇혀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리는 녀석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로 이만 구경꾼들 속을 빠져나왔다.

곧 벌어질 소란 속에 끼어 있어 봐야, 딱히 좋은 꼴은 보지는 못할 테니까.

자, 그럼 이제 바로 다음 계획을…

“다들 멈추세요!”

그렇게 막 광장을 떠나 셀파스트가 머무는 여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나는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에 으득 이를 갈며 뒤를 돌아보았다.

“대, 대주술사님!”

대주술사 세르노이.

난 온몸에 기이한 형태의 해골 목걸이를 비롯한 십 수 개의 장신구를 주렁주렁 걸치고 있는 검은 머리의 고양이 수인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째서 녀석이 벌써 여기에?

분명 대족장 우르누이와 같이, 내일 저녁쯤에 도착할 예정이었을 텐데.

“푸른 가젤 부족의 게브린이 대주술사님을 뵙습니다!”

시커먼 꼬리를 살랑이며 기사들과 수인 사이에 선 그녀는, 자신 앞에 부복한 수인들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군요.”

“늦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푸른 가젤 부족의 게브린. 분노를 가라앉히세요. 어젯밤, 족장들을 죽인 범인은 여기 이 인간이 아닙니다.”

“예? 그렇다면 대체 누가….”

젠장… 이 빌어먹을 자식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다니!

나는 갑자기 나타나선 한순간에 상황을 일축해버리는 세르노이를 보며,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우리 수인과 인간의 연합을 어떻게든 갈라 먹고 싶어 하는 누군가.”

난 곧 세로로 길게 찢어진 눈동자로 주변을 슥 훑는 그녀를 보며, 흠칫 후드를 꾹 눌러썼다.

망할 녀석.

설마 꿈에서 이걸 보고 온 건가.

“분명, 지금도 이 근처에서 저희를 지켜보고 있겠죠.”

“이, 이 근처에서 말입니까?”

실패다.

발록과 마찬가지로 강자에게 절대 복종하는 저 짐승 녀석들의 특성상, 대족장 바로 아래에 위치한 녀석이 저렇게 나온다면 더 이상 둘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무리였다.

아마 밤사이 족장들을 암살하는 것 또한 어려워질 터.

나는 이를 악물며 이만 조심스레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들 주변에 수상한 자가 없는지 살펴라!”

“족장님의 원수다! 어디에 숨어있을지 몰라. 빨리 찾아내라!”

셀파스트.

난 뒤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재빨리 골목으로 돌아 몸을 숨기며, 곧바로 여관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

아무래도 계획을 다시 짜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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