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87화 (87/200)

제87화

“으음, 피곤하군.”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족장님.”

“그래, 부족장. 자네도 수고했네.”

셀파스트를 찾아, 카르네몬에 머물고 있는 지휘관들의 정보를 넘겨받은 다음날 저녁.

밤새 종이뭉치에 적힌 내용을 읽어가며 스무 명이 넘는 놈들의 동선을 모두 파악한 나는, 개중에 가장 혼자 머무는 시간이 긴 녀석의 뒤를 쫓았다.

“또 그 주점으로 가시는 겁니까?”

“그래. 요새 아랫놈들이 허튼짓 못하도록 자꾸 신경 쓰느라,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잖나. 이렇게라도 밤마다 취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또 내일을 마주할 수 있겠나.”

“적당히 드십시오. 그러다 몸 상하십니다.”

“으하하! 너무 그러지 말게. 어차피 곧 대족장님께서 도착하시고 나면 마시고 싶어도 못 마실 테니까”

정보대로라면 도시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부터 어제까지, 닷새 밤을 모두 같은 가게에서 보냈다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혼자, 구석에 있는 방을 빌려서 말이다.

그리고 보아하니, 오늘도 마찬가지로 주점에 들를 생각인 것 같았다.

“헌데 족장님. 그래서 저희가 인간 놈들을 이렇게까지 도와줘야하는 이유가 대체 뭐랍니까?”

“허허, 자네까지 이러긴가? 요전번에 같이 부족들 회의에 가서 들었지 않나.”

나는 제 부족장과 얘기를 나누며 광장으로 향하는 녀석을 조심스레 뒤쫓았다.

설마 이렇게 같이 들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단순한 병사였으면 모를까, 부족장과 함께 있다면 소란 없이 일을 치르고 나오는 건 불가능했다.

“으음, 마왕군이라는 놈들을 막기 위해선 서로 싸울 게 아니라 힘을 합쳐야 한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정말로 그 녀석들이 그렇게까지 강하단 말입니까? 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자네나 나나 그 마왕군을 직접 본 적은 없으니 말일세. 하지만….”

어떡하지.

난 예상치 못한 변수에 눈살을 찌푸리며, 지금이라도 다른 녀석을 찾을지 고민에 빠졌다.

“음. 이건 자네만 알고 있게나. 실은 세르노이 님께서 최근에 예언의 꿈을 꾸신 모양이야.”

“대주술사님께서 말입니까?”

그러다 곧 결정을 내리고, 다른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나는 귓가에 들려오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우뚝 발을 멈추고선, 슬며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인간들의 땅에서 흉흉하게 생긴 녀석들이 올라와 우리의 땅을 마구 짓밟고 있었다더구나. 거기에 마침 인간 쪽에서도 이대로 가다간 저들이 머잖아 멸망하리라는 신탁을 받았다 하니, 쉬이 넘기실 수가 없었던 게지.”

예언의 꿈? 신탁?

난 족장의 입에서 나온 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상하군.

벌써 계시가 내려왔다고?

“그럴 리가….”

나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분명 연합을 이루기 직전에야 그런 이야기가 돌았을 터였다.

설마 거짓말이었던 건가?

아니면…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어서 이 얘기를….”

“쉿. 조용히 하게. 내 방금 자네만 알고 있으라 하지 않았나. 모름지기 모든 일에는 다 알맞은 때가 있는 법일세. 대주술사님께서 우리의 입을 막으신 것은, 다 이유가 있으실 테지.”

그래, 그때도 단순히 그간 입을 막아왔던 걸지도 몰랐다.

제국이 멸망하니 수인 연합의 땅이 짓밟히니 하는 얘기가 세상에 퍼졌다간, 괜히 사람들 사이에 불안함만 심어줄 뿐이었으니까.

곧이곧대로 신탁을 믿고 제 안위를 위해 마왕군에 붙으려는 종자들과 겁에 질린 병사들의 탈영을 막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비밀로 하려고 했으리라.

“음….”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정말 내가 우려하는 대로, 조금씩 미래가 바뀌고 있는 걸지도 몰랐으니까.

어쩌면 연합이 더 빨리 이루어질지도 모르겠군.

젠장, 그렇게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건만.

물론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미래가 변하고 있다는 건, 그 빌어먹을 연합의 대가리들 또한 전과 달리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얘기였으니까.

게다가 아무리 위에서 쉬쉬하고 입을 막으려고 한들, 자꾸만 불을 붙이다 보면 언젠간 도화선이 타들어 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불씨는 언제든 내가 다시 지피면 그만이었고 말이다.

“그럼 이제 그만 들어가 보게나. 덕분에 오는 길이 심심하진 않았구먼.”

“예? 아닙니다. 벌써 며칠이나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계시지 않습니까. 적적하실 텐데, 괜찮으시면 오늘만이라도 제가 옆에서 말 상대를 해드리겠습니다.”

“허허. 됐네, 됐어. 어디 지금 나만 힘들 땐가. 자네도 고생이 많을 텐데, 밤사이에 푹 쉬어놔야지. 그 마음만 받겠네.”

나는 슬슬 가게 앞에 도착해 혼자 안으로 들어가는 족장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군.

괜한 걸음을 했나 싶었는데.

끼익-

“어서 오십시오.”

적당히 시간을 두고서 주점 문을 연 나는, 이번에도 안쪽에 방을 잡은 듯 테이블에 보이지 않는 녀석을 보며 천천히 주인장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 남는 방 있습니까?”

“방 말씀이십니까? 물론 있습니다만… 지금은 큰 방밖에 남지 않아서 말입니다.”

난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긁적이는 그를 보며, 종이에 적힌 대로 족장이 들어갔을 맨 왼쪽 끝 방을 가리켰다.

“괜찮습니다. 저 방으로 주십시오.”

“아, 거기는 방금 전에 손님이….”

“그렇습니까? 그럼 그 옆방으로 주시지요. 방 크기는 상관없습니다. 편히 쉬러 왔으니, 널찍하면 오히려 더 좋지요. 물론 값은 그만큼 지불하겠습니다.”

나는 품에서 은화가 가득 담긴 주머니를 꺼내 보이며,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곧 사람을 붙여드릴 테니, 필요한 건 그쪽에 말씀해주시면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난 고개를 꾸벅 숙이는 주인장을 뒤로하고, 천천히 방으로 들어갔다.

“음.”

확실히 넓군.

이 정도면 열 명이 술판을 벌이더라도 자리가 모자라진 않을 것 같았다.

똑똑-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머잖아 방으로 찾아온 직원을 보며, 적당히 안주를 시키고선 옆방에 귀를 기울였다.

반대쪽에도 손님이 들어찼는지 조금 시끌시끌하긴 했지만, 집중하고 있으면 충분히 넘길 수 있는 정도라 딱히 문제없었다.

오히려 어느 정도 주변이 소란스러운 편이, 조금 거친 소리가 나더라도 묻어줄 테니 좋았다.

“누구라고 인간 놈들이랑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싶겠느냐. 고얀 놈들….”

꼴꼴꼴 술잔을 따르는 소리와 함께, 힘없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기를 몇 번.

갈수록 늘어나는 한숨에 기회를 엿보던 난, 이내 점점 말수가 적어진 그를 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직-

“으응?”

건너편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에 로브를 걸치고 곧바로 벽을 잘라 뜯어낸 나는, 그 소리에 자다 깼는지 비몽사몽한 표정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족장을 향해 팔을 들어 올렸다.

“누, 누구….”

푹-

“컥, 컥….”

그대로 족장의 가슴에 깊숙이 단검을 박아 넣은 난,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누구긴 인간이지. 너희 수인들을 굉장히 증오하는.”

“으읍… 그짓, 므알….”

그새 눈치챘나.

생각보다 머리가 좋은 양반이군.

나는 꾹 눌린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말에 안타까운 표정으로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래, 거짓말이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진실보단 네 부하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가 더 중요하지 않겠어?”

“아, 안….”

난 끝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푹 떨구는 노인을 보며, 조용히 단검을 빼냈다.

뭐가 안 되는 거였을까.

제 부하들이 이로 인해 인간을 미워하지 말았으면 하는 걸까.

아니면 섣부른 판단으로 일을 벌이지 않기를 바랐던 걸까.

확실한 건 둘 중 뭐가 됐든,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으리라는 거였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기습으로 쓰러트렸습니다.]

[민첩이 ‘1’ 증가합니다.]

[레벨이 증가합니다.]

“…아니, 안 되지.”

이내 맥없이 쓰러지는 시체의 목에 본능적으로 이를 박으려다 흠칫 몸을 떼어낸 나는, 금세 상처에서 흘러나와 바닥을 적신 피를 보며 시체를 벽에 붙였다.

단순히 놈을 죽이러 온 거였다면 어떻게 하든 상관없었겠지만, 인간과 수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탱해주고 있는 살얼음을 깨기 위해선 인간의 짓으로 위장할 필요가 있었다.

괜히 여기서 능력치를 조금 올리자고 대의를 망칠 수는 없는 노릇.

난 손가락으로 바닥에 흥건한 피를 찍어, 시체를 눕혀놓은 벽 위에 글자를 새겼다.

‘짐승. 이는 여신께서 내리는 천벌이다.’

노골적이고 수상하기 짝이 없는 글귀였지만, 지금은 이걸로 충분했다.

이미 수인과 인간의 사이는 틀어질 대로 틀어져 있었으니까.

진짜 범인이 누군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부족을 이끄는 족장이 인간의 가게에서 죽었다.

그리고 당시 옆방을 빌리고 있던 손님 또한 인간.

슥- 슥-

시체의 옷가지에 날을 닦아낸 나는, 피가 튄 로브를 벗고 새것을 챙겨 방을 나섰다.

“음식이 아주 훌륭하더군요.”

“아. 감사합니다, 손님.”

“얼마죠?”

“다해서 은화 스무 개 되겠습니다.”

차르륵-

주머니에서 한 움큼 은화를 집어 계산대 위에 올린 나는, 도망치듯 건물을 빠져나가서 씨익 미소를 지었다.

내일이 기대되는군.

“어디 보자….”

이내 시간을 한 번 살핀 나는, 품에서 따로 족장들의 동선을 정리해놓은 종이를 꺼내 들었다.

다음은 누굴 노리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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