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계십니까?”
아이시스가 알려준 대로 첩자가 머물고 있는 방 앞에 도착한 나는, 천천히 문을 다섯 번 두드렸다.
“…없나?”
지금은 안에 없는 걸까.
어쩌면 정보를 수집하러 바깥에 나가 있는 걸지도 몰랐다.
난 아무런 대답이 없는 방을 보며, 어색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돌아올 때까지 내려가서 저녁이라도 먹어야겠군.
우당탕-
“음?”
그렇게 막 걸음을 뗀 찰나.
나는 뒤늦게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잠시 다리를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끼익-
“…누구? 일단 들어와.”
난 이윽고 조심스레 열린 문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미는 마족을 보고선,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에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낮에 그 목소리는 잘못들은 게 아니었나.
쿵-
나는 안쪽으로 들어오라 손짓하는 그를 따라, 천천히 방 안으로 발을 옮겼다.
“더럽군.”
난 문 앞에서부터 여기저기 널브러져있는 쓰레기들을 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녀석이 카르네몬에 도착한지 기껏해야 사흘이나 지났을까 싶은데, 벌써 바닥에 쉬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더럽다니. 그저, 정리가 조금 안 되어있을 뿐이지.”
셀파스트.
나는 늑대인간인 주제에 작고 호리호리하고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와 있는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폐인도 이런 폐인이 없군.
뭐 딱히 상관없나.
어쨌든 이쪽은 정보만 제대로 받을 수 있으면 그만이니.
“그래서, 요새 아주 유명한 주전파의 얼굴마담님께서 무슨 일로 나를 찾았을까.”
난 장난스러운 얼굴로 초승달처럼 눈가를 휘는 녀석을 보며, 슬그머니 주변을 살폈다.
바닥에 마냥 쓰레기인 줄로만 알았던 것들 중에, 알아보긴 힘들지만 꽤나 빼곡하게 글씨가 채워져 있는 종이들이 몇 보였다.
“음.”
개중에 그나마 읽을 만한 것들을 살짝 훑어보니, 꽤 훌륭한 정보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성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들의 숫자와 교대 시간. 그리고 성벽 밖으로 순찰을 도는 인원들과 그 루트까지.
역시 겉보기엔 그저 장난기 많은 꼬맹이처럼 보여도, 실력 하나는 확실한 녀석이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이 정말 그 셀레스트의 오빠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군.
“첩자 노릇 하는 정보원을 찾는 이유가 하나 말고 더 있겠나.”
“글쎄, 그렇게 말하면 나는 모르겠는걸.”
난 탁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가만히 어깨를 으쓱이는 셀파스트를 보고선, 짜게 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피곤하군.
용사 시절, 이 녀석을 쫓아 대륙 북부를 헤집고 다닐 때도 그랬었지.
거의 다 잡았다 싶으면 매번 메롱하고 혀를 내밀고선 귀신같이 모습을 감추는 저 장난기 가득한 얼굴에, 얼마나 주먹을 떨어대야 했던가.
“장난이야, 장난. 그렇게 무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아무리 같은 편이라고 해도, 겁먹어서 도망쳐버릴지 모른다고?”
나는 이내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는 녀석을 보고선, 조용히 그의 손을 맞잡았다.
“에릭 가이오스다. 도망쳐도 상관은 없지만, 가능하면 연락할 수 있는 방법 정도는 남겨줬으면 좋겠군.”
“…너, 생각보다 재밌는 녀석이구나?”
녀석은 천천히 손을 떼며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곧 슬며시 눈꼬리를 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아, 마음에 들었어. 셀파스트라고 불러. 그래서 우리 에릭은 나한테 무슨 정보를 받으러 온 걸까?”
그는 탁상 위에 잔뜩 놓인 종이를 들어 올리며, 보란 듯이 내 눈앞에서 팔락였다.
저게 다 빈 종이가 아니란 말이지.
적어도 내가 원하는 정보는 저 안에 다 들어있을 거 같았다.
“카르네몬에 주둔하고 있는 인류 제국과 수인 연합의 부대에 대해 알고 싶다. 가능한 지휘관급에 달하는 녀석들은 주로 어딜 돌아다니는지도 알려줬으면 좋겠군.”
누군가 병사들의 불만이 터지지 않도록 고삐를 꽉 쥐고 있다면, 더 이상 붙들고 있을 수 없게끔 손을 잘라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휘관씩이나 되는 놈들이 전쟁을 앞두고 멍청하게 혼자 다닐 리가 없었다.
가뜩이나 서로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쉬이 빈틈을 내보이진 않겠지.
그렇지만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분명 어딘가에는 흠이 있기 마련이었다.
“지휘관급이라면 누구? 설마 족장이나 단장들 전부를 말하는 거야?”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고작 한두 명이었으면 굳이 이렇게 정보원을 찾아올 필요도 없었겠지. 시간이 조금 촉박하긴 하겠지만, 그 정도는 직접 해도 문제없으니까 말이야.”
나는 질린 표정으로 이쪽을 훑는 셀파스트를 보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물론 말은 그렇게 했어도 결국 정보원이 있다면 그를 찾았겠지만, 확실히 고작 한두 명 가지고는 계획을 세우기엔 좀 무리가 있었다.
사람이 평소 다니는 동선이라는 게, 언제 어디서 변수가 터질지 모르는 거였으니까.
특히 전쟁을 앞두고 잠시 타지에 나와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변동이 심하겠지.
그러니까 혹시나 실패하더라도 곧장 다른 녀석을 노릴 수 있도록, 가능한 많이 놈들의 동선을 꿰고 있는 편이 좋았다.
“너, 그 정도 되는 녀석들만 해도 지금 여기 머물고 있는 게 몇 명 인줄 알아? 게다가 앞으로 합류할 녀석들까지 생각하면….”
“그래서 불가능한가?”
난 내 요구에 눈살을 찌푸리며 무어라 툴툴대는 녀석을 보고선, 조용히 그를 내려다봤다.
“…그럴 리가. 완전 가능하지.”
“음. 훌륭하군.”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이내 씨익 입 꼬리를 끌어올리는 셀파스트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주억였다.
다른 놈들이었다면 적당히 서너 명 정도만 받고 나머지는 내가 직접 조사해볼 생각이었지만, 이 녀석은 달랐다.
적어도 그는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 하나만큼은, 중간계와 마계를 통틀어 단연 최고였으니까.
“그럼 부탁하지.”
“잠깐만 기다려. 금방 골라서 줄 테니까. 어디 보자….”
녀석은 그득히 쌓인 종이들을 파라락 넘기며 중간 중간 하나씩 골라내더니, 이내 바닥에 널브러진 종이들을 하나씩 펴보며 무언가를 찾았다.
“됐다. 자, 이게 네가 원하는 정보. 아직 도착 못한 놈들은 동선이 없으니까, 그건 감안하고 보도록 해.”
“으음….”
나는 곧 스무 장 정도 되는 종이뭉치를 건네받고선, 중간 중간 알아보기 힘든 글씨에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뭐 그래도 앞뒤 내용을 생각하면 아주 못 읽을 건 아닌가.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직접 이 정보들을 구하러 발품을 파는 것보단 훨씬 싸게 먹히는 장사였다.
“알겠다. 그럼 나머지는 다음에 받으러 오지.”
“뭐? 그 말은 나보고 여기 동선이 안 적힌 녀석들이 올 때마다, 또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조사해놓으라는 거야?”
“당연한 소리를. 그게 네 임무지 않은가.”
“으으… 너, 보기보다 짓궂구나.”
난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푹 숙이는 셀파스트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이만 종이를 챙겼다.
“혹시 가기 전에 뭐 하나만 더 물어도 되겠나?”
“응? 바란다면 얼마든지. 대신 다음부턴 올 때 맛있는 것 좀 들고 와줄 수 있을까? 너도 오면서 봤겠지만, 여기 사람들이 짐승 귀랑 꼬리가 달린 놈들은 별로 안 좋아하는 분위기라서.”
뭐 그 정도야.
나는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최근에 국경에서 있었던 사건, 혹시 알고 있나?”
“아, 그 인간 기사들이 평화협정을 어기고 제멋대로 수인들 주둔지를 습격했다는 그거? 물론 알지. 안 그래도 지금 여기 머물고 있는 수인족들 사이에서 그 얘기가 많이 나오더라고. 그러고 보니 그것도 네 작품이라며?”
“음. 솔직히 그걸로 평화협정을 깰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말이다. 생각 외로 무탈하게 지나간 거 같더군. 혹시 양쪽에서 누가 협상을 맡았는지 알고 있나?”
계획대로 됐다면 굳이 여기서 고생하지 않아도, 몰려오는 마왕군만으로 쉽게 도시를 함락시킬 수 있었을 텐데.
벨라노르면 몰라도, 이곳 카르네몬은 원래 며칠 버티지 못하고 길을 내줬던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예정보다 빨리 두 종족이 연합을 맺은 터라, 어떻게든 수를 써놓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글쎄. 인간 쪽에선 누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수인들 중에선 누가 맡았는지 알고 있지. 잠깐 내가 준 종이 좀 줘봐.”
나는 탁자 위를 팡팡 두드리는 셀파스트를 보며, 품 안에 챙겨놨던 종이를 꺼내들었다.
“여기, 이 양반이야. 그리고 그때 옆에 꼭 붙어있었다던 놈이 바로 이 녀석.”
“이건….”
난 돌려받은 종이뭉치를 슥 넘기며 어딘가를 쿡 짚는 그를 보고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우르누이 칸. 그리고 세르노이.
“…대족장.”
나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그 빌어먹을 면상에 이를 으득 갈며 종이를 꾹 쥐었다.
그 망할 사자 새끼의 이름이 여기 적혀있다는 건, 녀석이 직접 제 무리를 이끌고 온다는 건가.
“뭐야, 알고 있었어? 하긴 넌 국경도 넘어갔다 왔으니까, 어디서 한 번쯤 들었더라도 딱히 이상할 게 없겠네.”
난 내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주억이는 셀파스트를 보며, 조용히 종이뭉치를 다시 챙겼다.
“이만 가보겠다.”
“벌써 가게?”
“음. 다음에 올 땐 원하는 대로 맛있는 걸 잔뜩 들고 오지.”
끼익-
나는 이내 방을 나서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대족장 우르누이.
사실 녀석은 걱정할 필요 없었다.
물론 그 수많은 종족들의 연합을 이끄는 놈이니만큼 절대 그 기량은 무시할 게 못됐지만, 이쪽도 마왕이 넷이나 몰려오고 있었으니까.
분명 강한 전사이긴 하나, 그 하나만으로 전쟁의 판도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세르노이….”
문제는 셀파스트가 그 뒤에 가리켰던 이름에 있었다.
대주술사 세르노이.
수인 연합의 그랜드마스터.
파괴력은 마법의 그것에 비할 바 아니지만, 주술의 매개가 되는 토템 아래 영향을 받는 아군 모두에게 강력한 힘을 불어넣는 그 기이한 기술은, 어찌 보면 마법보다도 더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이었다.
“서둘러야겠군.”
아무래도 놈들이 도착하기 전, 빨리 일을 마칠 필요가 있을 거 같았다.
설마하니 수인들이 제 대족장 앞에서 소란을 일으키려 들진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