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다음!”
마차를 끌고 도시 안으로 들어온 나는, 예상대로 빡빡한 검문에 혀를 내둘렀다.
짐칸을 뒤지는 걸로도 모자라, 혹시 모른다면서 바닥까지 살피다니.
아무래도 애들을 데리고 들어오는 건 무리일 거 같았다.
“아쉽군. 가능하면 벨라노르 때처럼 성문을 열어버리고 싶었는데.”
물론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이곳에서 입지를 다지고 경비들과 친해진다면 아주 불가능할 것도 없겠지만, 아쉽게도 그러기엔 시간이 좀 모자랐다.
협곡을 넘어 마왕군이 도착할 때까지, 길어야 닷새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카르네몬.”
나는 양쪽으로 산맥을 끼고 있던 벨라노르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비견될 정도로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훑으며, 천천히 거리를 살폈다.
“…이상하군.”
성문 근처에서도 위화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몇 분 더 돌아다니고 나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수인.
난 도시 곳곳을 멀쩡히 활개하고 있는 수인족들을 보며,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 아직 국경에서의 일이 퍼지지 않은 걸까.
“음.”
그럴 리가.
나는 작게 침음을 흘리며, 다시 한 번 주변을 훑었다.
“젠장… 우리가 왜 빌어먹을 인간들 땅을 지켜줘야 하는 건데?”
“대족장님께서 명령하신 일이다. 다 무언가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생각은 무슨 생각. 그 노인네, 드디어 맛탱이가 가버린 게 분명해. 평화협정도 어기고 국경을 넘어 주둔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간 인간 놈들을,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도와주라는 거냐고!”
조금만 귀를 기울여도 여기저기서 불만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여기까지 소문이 돈 건 확실한 것 같았다.
그런데도 평화협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기어코 원군을 이곳 카르네몬까지 보냈단 말이지.
딸랑-
우선 애들한테 가져다줄 건량을 사러 식료품 가게를 찾은 나는, 제국과 수인 연합에 이런 깜찍한 짓을 벌일만한 녀석이 누가 있나 고민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샀으면 빨리 썩 꺼져! 수인 따위, 한시라도 더 보고 싶지 않으니까!”
“칫, 거 더럽게 까탈스럽군. 빌어먹을 영감탱이.”
“음?”
나는 열린 문틈으로 도망치듯 나를 스쳐간 남자를 슬쩍 돌아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후드로 가려져 생김새를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거기, 입구에서 뭐혀!”
“아, 예.”
가만히 서서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의 호통에 이만 시선을 거두고 매대를 살폈다.
“쯧쯧. 세상이 말세여, 말세. 저런 짐승 녀석들을 다시 도시에 들이다니 말이야. 고놈들이 국경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데!”
적당히 육포 몇 개와 건량을 골라 자판대로 향하던 난, 마치 들으라는 듯 수인에 대한 맹목적인 분노를 드러내는 노인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평화협정을 맺고 서로 마왕군을 막기 위해 협력한다고 한들, 그게 그리 순탄히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일 년 전부터 협정이 맺어진 최근까지. 그리고 이번에 에베르 후작가의 소가주와 기사단이 멋대로 국경을 넘어, 수인 연합의 주둔지를 습격한 일까지.
그동안 쌓아온 앙금이 아직 가슴에 그대로 응어리져있는데, 위에서 그렇게 억지로 시킨다고 이제 와서 하하호호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르신. 아무리 그래도 저희 도시를 같이 지켜주려고 먼 길을 달려온 사람들인데, 그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뭐여? 너무하긴 뭐가! 애초에 그놈들이 우리 젊은이들을 죽이지만 않았어도 도움 같은 건 필요도 없었어! 제기럴, 그랬으면 우리 아들내미도 아직….”
“아… 죄송합니다. 그런 사정이 있으신 줄도 모르고….”
나는 울컥 나에게도 화를 내다 곧 눈물과 함께 말을 삼키는 그를 보며, 속으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어쩌면 마왕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안쪽에서 서로 치고받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딸랑-
값으로 은화 한 개를 지불하고 양손 그득히 건량을 사서 밖으로 나온 나는, 곧바로 마차를 맡겨놓은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당장 나가! 너희들한테 팔 음식 따위, 이 가게엔 없으니까!”
“젠장, 그럼 도대체 우린 어디서 뭘 먹으라는 거야! 빌어먹을 놈들,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도와주러온 사람들을 이딴 식으로 대접하다니. 족장, 저희가 진짜 이런 소리까지 들으면서 인간 놈들 도시를 지켜줘야 되는 겁니까?”
난 중간에 가게 앞에서 이를 갈며 상인에게 으르렁거리고 있는 개 수인을 발견하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은혜를 따질 줄 아는 놈들이 이방인들에겐 그렇게 대했단 말인가.
웃기지도 않는군.
“수인 녀석들, 여기가 어디라고 겨들어와!”
“빌어먹을, 누구는 오고 싶어서 온 줄 아나!”
식료품 가게가 있던 광장 입구에서, 마차를 대어놓은 성문 앞까지.
그리 머지않은 거리를 걷는 동안, 인간과 수인이 서로 다투고 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고 도리어 나서서 챙겨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좁은 눈초리로 상대를 훑을 뿐이었다.
“다들 조용! 서로 마왕군이라는 공동의 적을 앞두고, 지난 일은 잠시 묻어두기로 했거늘. 지금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혹 앞으로 정당한 사유 없이 수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하는 자가 있다면, 엄벌이 있을 것이다!”
“누가 전쟁을 앞두고 사사로운 일로 하여금 군기를 흩트리라 하였는가! 인간들을 도와 이곳에서 마왕군을 막는 것은, 위대하신 대족장님께서 직접 명하신 일이다! 지금부터 함부로 이에 불만을 드러내는 녀석이 있다면, 그놈은 내 친히 군법으로 다스려주겠다!”
당장 어디서 폭발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꾸역꾸역 버티고 있는 것은 다 영주와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들이 발 벗고 나서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음.”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물론 그래봐야 겉으로 터지지만 않을 뿐 안쪽에선 계속 곪아가고 있을 테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어차피 마왕군과 한 번 전력을 맞대고 나면, 그들도 연합의 필요성을 자연스레 깨닫게 될 테니까.
“어서 옵쇼! 으응? 손님, 벌써 찾으러 오신 겁니까?”
“하하… 밖에 잠시 일이 생겨서요. 해가 지기 전에 금방 돌아올 겁니다. 그래서 그런데 혹시 모르니까 자리 좀 하나 남겨놔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 값을 추가로 지불하겠습니다.”
“아이고, 물론이죠. 걱정하지 마시고 갔다 오십쇼! 귀족 나으리가 오셔도 손님 자리는 꼭 비워두겠습니다.”
나는 호들갑을 떠는 마구간 주인에게 은화 하나를 내밀며, 천천히 도시 밖으로 마차를 몰았다.
저렇게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억지로 연합을 이룬 걸 보아하니, 과연 제국의 발등에 불똥이 떨어지긴 한 모양이었다.
하긴 지금 벨라노르가 함락당하고 수도가 있는 중심부까지 위협을 받고 있는 판국에, 어떻게든 북쪽까지 뚫리고 싶지는 않았겠지.
그랬다간 가뜩이나 상대하기 버거운 적을 양쪽에서 막아야할 테니까.
모르긴 몰라도, 국경에서의 일까지 책임지기 위해 꽤 많은 것을 내놓아야 했으리라.
“오셨습니까, 형님!”
“음. 그동안 별 일 없었나?”
“아무 일도. 그래서 구름, 세고 있었어.”
머지않아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는 협곡 근처 동굴에 도착한 나는, 가만히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아이시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선 짐칸을 열었다.
“혹시 모르니까 잔뜩 사왔다. 이 정도면 닷새는 충분하겠지.”
“매번 고맙구나, 에릭. 헌데 그보다 검문은 좀 어떻던가.”
“이번에도 몰래 숨어들어가는 건 어려울 거 같더군.”
“으음… 그런가. 미안하다. 매번 이렇게 너만 힘들게 고생시키는 거 같아서 마음이 아프구나.”
한쪽에 가득 실린 건량을 모두 바닥에 내려놓은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이쪽을 살피는 카렌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기특하군. 카렌, 네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에릭, 넌 대체 지금껏 본녀를 어떻게 보고 있었던… 읏! 머, 머리 헝클이지 마라!”
난 그녀의 새빨간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흐뭇한 미소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됐다. 지금은 이걸로 충분해. 어차피 곧 전쟁에서 죽어라 일하게 될 테니, 별로 미안해할 필요 없다.”
자기들이 멋대로 불러놓고선 강제로 사지에 밀어 넣고, 고마워하기는커녕 끝까지 장기 말로만 여기던 누구들하고는 달랐다.
나는 기특한 표정으로 이만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아이시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부탁한 건 어떻게 됐나.”
“연락, 받았어. 광장 구석에 있는 파란 지붕. 3층 맨 끝 방을 다섯 번 두드리라고 했어.”
“음, 고맙다.”
보아하니 일단 여관에 터를 잡은 모양이군.
“혹시 종족이 뭔지도 알려주던가?”
지금 정체를 속이고 도시 안에 들어가 있을 법한 건, 그나마 인간과 비슷한 뱀파이어나 가장 수인과 흡사한 늑대인간 정도일 터.
가능하면 내 종족에 적개심을 가질만한 늑대인간보단, 같은 뱀파이어면 좋을 거 같았다.
“으응… 지금 물어봐?”
“아니, 됐다. 어차피 첩자 노릇을 할 정도면 그리 멍청한 놈도 아닐 테니, 딱히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지.”
나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수정구를 들어 올리는 아이시스를 보고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설마하니 전쟁 중에 종족 간의 앙금을 따질 만큼, 바보 같은 녀석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터.
“그럼 이만 들어가지. 혹시라도 무언가 문제가 생기면 수정구로 연락할 테니, 한 명 정도는 꼭 살피고 있도록.”
다시 마차에 오른 나는, 곧바로 도시를 향해 말을 몰았다.
광장 구석의 파란 지붕이라.
썩 괜찮은 정보 좀 많이 물어놨으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