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에릭! 무사했… 뭐, 뭐냐 그 피는!”
금세 세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바위 근처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입고 있던 갑옷을 벗어 칼리스의 시체에 다시 입혔다.
“걱정할 거 없다. 별 거 아니니까.”
“별 거 아니라니. 이렇게나 많이 흘렸지 않느냐!”
“연기 좀 하려고 일부러 살짝 다쳤을 뿐이다. 그보다 서두르지. 지금도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으니 말이야.”
나는 혈마법을 이용해 시체의 입가에 피를 묻히고선, 적당히 바위 근처에 앉힌 뒤 자리를 떠났다.
“형님, 정말로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에릭, 불편해보여.”
셋을 데리고 빙 둘러 산맥을 내려가던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계속 이쪽을 살피는 녀석들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그들의 걱정대로 몸 상태가 아주 정상은 아니긴 했다.
누가 호랑이 수인 아니랄까 봐 족장의 힘이 생각보다 강했던 터라, 가능한 끄트머리에 얻어맞았는데도 아직까지 속이 찌르르 울렸다.
내장을 좀 다쳤나.
아마 갑옷을 입지 않았더라면 몸이 반으로 갈라졌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을 거 같았다.
그래도 뱀파이어 특유의 회복력이 있기에, 이 정도면 사흘 안에 멀쩡해질 터였다.
“음. 그냥 조금 쓰라릴 뿐….”
“에잇.”
“윽!”
이 정도는 거뜬하다는 듯 살포시 미소를 지어보이던 나는, 갑작스레 옆구리에서 훅 밀려오는 통증에 몸을 확 움츠렸다.
“에릭, 거짓말쟁이. 무리하면 안 돼. 조금, 쉬었다 가.”
“으음… 알았다. 알았으니까 그만 찔러라.”
나는 조용히 눈살을 찌푸리며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아이시스를 보고선, 하는 수없이 잠시 근처에 앉아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응.”
난 그제야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토닥이는 그녀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뭐, 썩 나쁘진 않군.
* * *
“칼리스는, 내 아들은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냐!”
“그, 그것이….”
칼리스가 제 옛 연인의 복수를 하겠다며 기사들을 이끌고 국경으로 떠난 지 어느덧 일주일째.
에베르 후작은 돌아올 때가 진즉에 지났음에도 얼굴을 비치지 않는 제 아들을 보며, 불안한 표정으로 손톱을 깨물었다.
“전에 국경으로 보냈던 녀석들은 어떻게 됐지? 그들은 뭐라고 하던가.”
“그게… 혹시나 싶어서 국경 근처에 있는 마을 모두에 사람을 보내봤지만, 지금껏 돌아온 이들 중에선 도련님은 물론 저희 기사단조차 본 사람이 없답니다.”
“…그 말은 지금, 칼리스가 수인들한테 당해서 산맥을 내려오지 못하고 있기라도 한다는 게냐? 국경에서 따로 보낸 기사들까지 스물이 넘는데,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고? 적은 고작 두 명, 그것도 마법사라 하지 않았더냐!”
쿵-!
후작은 이어진 집사의 보고에 이를 악물며, 책상을 내리쳤다.
가문의 훌륭한 기사들이, 그리고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러움이 없던 자랑스러운 아들이.
고작 수인 두 명에게 당했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의뢰인! 그 의뢰를 내걸었다던 상인은 어떻게 됐나.”
“그때 자리에 있던 병사의 말로는, 낮에 다 같이 들어갔다 달이 중천에 뜰 때가 돼서야 혼자 나왔다고 합니다.”
“그놈 혼자 나왔다고? 혹시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얘기는 없었나?”
“전해 듣기로는 산맥을 반쯤 올랐을 때, 위쪽에서 마법이 날아왔다고 합니다. 그 뒤로는 도련님께서 먼저 내려가 기다리고 있으라 하셔서, 이후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답니다.”
“…그러고 아무리 기다려도 내려오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혼자 돌아왔다고 하던가?”
“예, 그렇습니다.”
그는 자식의 행방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찾을 수 없는 절망스러운 상황에,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 일단 그 상인부터 좀 수소문해보게. 그리고 다시 국경에 사람을 보내서….”
쿵-!
“후, 후작님! 큰일,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니, 무슨 일이냐. 그리고 대체 누가, 내 허락도 없이 문을 함부로 열어도 된다고 했나.”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게….”
후작은 노크조차 하지 않고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젊은 기사를 보며,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화를 꾹꾹 눌렀다.
“…되었다. 그보다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급히 뛰어온 것이냐.”
“그… 소, 소영주님께서….”
“칼리스가 왜, 혹시 그놈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느냐?”
“소영주님께서, 타계하셨습니다.”
“뭐?”
떨리는 목소리로 제 아들의 얘기를 꺼내는 기사의 모습에 혹여 소식을 알 수 있을까 싶어 반색하던 그는, 이어진 말에 쩍하고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냐. 칼리스가 어떻게 됐다고?”
넋이 나간 듯 작게 벌어진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나왔다.
허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에, 눈물조차 맺히지 않았다.
하지만 침통한 표정으로 조용히 눈을 감는 기사의 모습이, 이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걸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거기에 소영주님께서 국경을 넘어, 수인 연합의 주둔지 하나를 완전히 괴멸시키셨다고 합니다.”
“그건, 그건 또 무슨 얘기냐. 칼리스가 국경을 넘었다고? 게다가 주둔지 하나를 괴멸시키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이미 파르메르 백작께서 확인하셨답니다. 국경 너머에서 저희 기사단과 수인들이 부딪친 흔적은 물론, 소영주님의 시체까지 그곳에 있었답니다. 게다가 수인 연합의 주장대로, 그들의 주둔지에 불에 탄 창고와 화상 흔적이 뚜렷한 부상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불? 우리는 기사들만 보냈는데 어떻게… 서, 설마!”
후작은 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눈을 크게 뜨며,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파르메르… 이 빌어먹을 놈들이, 설마 그때 자기들을 의심했던 걸 가지고 앙심을 품고….”
한순간의 의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확신으로 변했다.
애초에 아무리 제 아들이 복수에 미쳐있는 상태였다 하더라도, 곁에 말려줄 기사들이 있었는데 그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국경을 넘었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아니, 하다못해 정말 그랬더라도 애꿎은 주둔지를 공격했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물며 날붙이만 지닌 기사들 사이에서 불이라니.
이건 누군가 마법사들이 뒤에서 수를 썼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전쟁이다. 전쟁이야! 망할 파르메르 놈들. 내 그 간악한 녀석들의 사지를 기필코 다 찢어버리겠다!”
“후작님, 진정하십시오! 아직 증거도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보다 지금, 수인 연합과의 오해를 푸는 게 먼저입니다!”
“크으윽… 으아아아아!”
후작은 당장이라도 파르메르 백작가에 쳐들어가겠다는 듯 검을 빼들며, 노성을 터트렸다.
“마, 막아라! 빨리 후작님을 진정시켜!”
“비켜라, 비키란 말이다!”
그리고 곧 몰려온 기사들에게 제압당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툭 떨궜다.
* * *
“지금쯤이면 후작가에도 슬슬 소식이 돌았겠군. 그 양반이 쉽사리 잘못을 인정할리 없으니, 당분간 평화협정은 무용지물이 될 거다.”
“응. 그러니까, 지금이 적기. 투마왕님한테 얘기했어.”
“음, 잘했다. 아이시스.”
산맥을 내려와 병사들에게 맡겨 놨던 마차를 찾은 뒤, 꽤 멀리 빙 돌아 내려온 세 사람을 태우고 길을 떠난 지도 어느덧 열흘.
나는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협곡 앞에 세워진 도시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아이시스, 정말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은 거냐?”
“마왕님한테 허락, 받았으니까. 협곡에서 있을 전투까진, 에릭이랑 함께.”
“그런가. 든든하군.”
“…응.”
난 조용히 고개를 주억이는 아이시스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금방 협곡에 도착해 마차를 멈춰 세웠다.
“자, 다들 내려라. 금방 돌아올 테니, 괜히 돌아다니다 인간들한테 들키지 말도록.”
“에릭, 또 혼자 가는 거냐?”
“음. 괜찮으면 돌아왔을 때 다시 데리고 가겠다. 아이시스, 마왕군이 도착하는 게 언제쯤이라고 했지?”
“나흘 뒤. 늦어도 닷새면 도착한다고 했어.”
늦어도 닷새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슬슬 짐칸을 닫았다.
“아, 그리고 혹시 전에 물어봐달라고 했던 건 어떻게 됐지?”
“…첩자? 그거, 아직. 오늘 저녁에 다시 물어볼게.”
“음. 부탁한다.”
난 마차를 타고 오던 중 아이시스를 통해 윗선에 부탁했던 내용을 떠올리며, 조용히 마부석에 올랐다.
지금쯤이면 마족 첩자들이 하나둘씩 활동하기 시작할 때가 됐을 텐데.
언제까지고 내가 도시에 숨어들어서 자잘한 정보까지 수집할 수는 없는 노릇.
그들의 힘을 빌릴 수만 있다면 더 쉽게 계획을 준비할 수 있었기에, 상부에 그들과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얘기해놓은 상태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형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괜히 저번처럼 무리하다 다치진 말거라.”
“걱정하지 마라. 적어도 도시 안에선 뭐가 됐든 앞에 나설 생각 없으니까.”
나는 금방 손을 흔들어주는 일행들을 뒤로한 채, 천천히 말을 몰아 도시로 향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슬슬 한 번 만나봐야겠군.
용사 시절처럼 적이었을 때라면 몰라도, 아군이라면 굉장히 쓸 만한 정보통이 되어줄 테니 말이야.
난 전혀 늑대인간 같지 않은 괴짜 사천왕의 모습을 떠올리며, 성문 앞에 길게 늘어선 줄 뒤쪽으로 마차를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