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빨리 빨리 움직여! 거기, 부상자들은 다 옮겼나?”
“예, 족장님!”
“그러면 가서 불탄 자루들 중에 멀쩡한 게 있나 한 번 살펴보도록. 다행히 주술사들이 빠르게 불길을 꺼트렸으니, 개중에 건질 수 있는 게 좀 있을 거다.”
인류 제국과의 국경에 걸친 산맥 앞을 지키는 수많은 주둔지들 중 하나.
수십 분 전에 군량을 쌓아둔 창고 위로 커다란 불덩이가 하나 떨어진 이곳은, 아직도 그 여파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코네!”
“네, 네! 족장님!”
“부족장은 아직인가?”
주둔지를 책임지는 족장은, 불덩이가 날아온 곳을 살피러 떠난 부족장을 떠올리며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험준하고 꽤 높이가 있는 산맥이라고는 해도, 부족원들 중에 가장 발이 빠른 아이들만 뽑아 보냈으니 슬슬 돌아올 때가 됐을 텐데.
어찌된 일인지 멀리서 내다봐도 그들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설마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마른하늘에 난데없이 불덩이가 떨어질리 없으니, 당연히 무언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했다.
날아온 방향을 생각하면, 아마도 인간들 중에 누군가가 그 마법이라는 특이한 주술을 부린 거겠지.
하지만 이제 평화협정이 이루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놈들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일을 벌일 리가 없었다.
그들은 지금 저들 땅을 헤집고 다니는 마왕군인가 뭔가 하는 녀석들을 막기 위해선 반드시 연합을 이루어야한다고, 이쪽에 머리를 숙여가며 도움의 손길을 바라던 참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일을 벌인 녀석은 이미 도망가고 없는데, 뭐라도 찾기 위해 주변을 마구 뒤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 불덩어리 때문에 창고를 지키고 있던 병사 둘이 죽고, 근처를 지나던 넷이 중상을 입었으니까.
“미치겠군.”
그놈의 평화협정만 아니었더라면 곧장 범인을 찾아 국경을 넘었을 텐데.
상황이 이래서야 상부를 통해 인간 놈들에게 항의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물론 그 특이한 주술의 흔적이 있으니 어느 정도 보상이야 받아낼 수 있겠지만, 정작 불덩이를 날린 녀석을 찾아 처벌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마도 그건 힘들 테지.
놈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미 진즉에 도망치고도 남았을 테니까.
“조, 족장님! 저기 누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부족장인가? 음, 녀석은 아닌 거 같은데. 아무튼 혼자 오는 걸 보아하니, 그놈이 늦을 거 같다고 먼저 보낸 모양이군.”
족장은 저 멀리 빠르게 산을 타고 내려오는 부족원을 보고선, 그를 맞이하기 위해 주둔지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허억, 헉… 조, 족장님! 큰일,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니? 잠깐 숨 좀 고르고 천천히 얘기해 보거라.”
금방 보고를 듣고서 됐으니 이만 돌아오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족장은, 거친 숨을 훅훅 내쉬며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부족원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예상한 것과 달리,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인간… 인간 놈들이 국경을….”
“…국경을? 그 불덩이를 날린 주술사가 국경을 넘었단 말이냐?”
평화협정을 맺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 국경을 넘다니.
당연히 바깥에서 멀찍이 불덩어리만 날렸을 줄 알았기에, 녀석을 잡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건만.
국경을 넘은 걸로도 모자라 그 흔적이 남았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자칫하면 다시금 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일이니만큼, 인간들도 어떻게든 범인을 찾아 내려고 할 터.
이러면 다행히 그 기이한 주술에 휘말린 부족원들의 넋을 어느 정도나마 기릴 수 있을 거 같았다.
“그, 그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부족장님께서 위험합니다. 빨리 도우러 가야….”
“뭐? 부족장이 위험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설마 부족장과 우리 천둥 호랑이 부족의 용맹한 전사들이, 고작 주술사 하나한테 밀리고 있기라도 한다는 말이더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주술사라 하더라도, 혼자서 다수의 전사들을 상대하기란 어려운 법이었으니까.
하물며 부족장은 근처의 다른 부족들 사이에서도 강하고 용맹하기로 소문난 진짜배기였다.
더구나 그 말고도 쉽사리 불덩이를 맞출 수 없을 정도로 발이 빠른 전사들이 여럿 붙었는데.
그들 모두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라면, 이건 단순히 개인이 멋대로 국경을 넘은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정도면 인간 놈들 사이에서도 꽤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주술사가 아닙니다. 그 튼튼한 갑옷을 입고 있는 전사들이… 그것도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튼튼한 갑옷? 설마 기사들이 국경을 넘었단 얘기냐!”
쿵-!
족장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이를 갈며 제 무기를 꺼내들었다.
단순히 주술사 한 명이 국경을 넘은 거라면, 어떻게든 그의 독단으로 포장해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계속 무기를 맞대던 기사들이, 그것도 혼자가 아닌 여럿이 국경을 넘었다는 건 절대 곱게 지나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게다가 부족장이 위험하다는 말이 나온 걸 보면, 이미 싸움으로까지 번진 모양이었다.
이는 자칫 잘못하면 다시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당장 안내해라. 다들 부족장을 구하러 간다! 그리고 감히 국경을 넘은 걸로도 모자라 먼저 공격까지 한 빌어먹을 인간 놈들을, 모두 짐승 먹이로 만들어버리겠다!”
* * *
“분위기 한 번 살벌하군.”
칼리스의 갑옷을 걸치고 수인 병사가 남긴 흔적을 따라 산맥을 내려온 나는, 저 멀리 주둔지에서 들리는 함성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열이 바짝 오를 대로 올랐군.
조금만 건드려도 알아서 펑 터지겠어.
아무래도 그 병사가 생각보다 일을 잘해준 모양이었다.
아니면 카렌이 떨구어놓은 불덩이가 보기보다 피해를 많이 끼쳤던가.
“…에릭, 이거 정말 괜찮은 건가? 적어도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데 말이다.”
“상관없다. 놈들을 전부 상대할 것도 아니니까.”
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아래를 살피는 카렌을 보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어차피 앞에 나가서 싸울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저 그들의 눈앞에, 이 흑장미 기사단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국경을 넘었다는 사실을 각인시켜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적당히 모습만 보여주고, 녀석들이 쫓아오기 시작하면 바로 도망칠 거다. 그전에 우선, 큰 걸로 한 방 부탁하지.”
“으음, 그런 거라면… 알겠다.”
난 곧바로 허공에 마법진을 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빠르게 입구 쪽으로 모여들고 있는 수인병사들을 살폈다.
카렌은 먼저 보내더라도 나는 좀 날뛰어줘야겠지.
모습을 보인 건 기사들뿐인데 정말로 마법만 날리고 도망친다면, 혹시라도 괜한 의심을 사게 될지도 모르니까.
“파이어 스트라이크.”
머잖아 마법을 완성시킨 카렌이, 병사들이 모인 곳을 향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시동어를 읊었다.
쿠구구구-
쩌적-
동시에 꽤 멀찍이 떨어져 있음에도 여기까지 진동이 전해질 만큼 바닥이 거세게 떨리더니, 이내 그들이 서있던 땅이 갈라지며 시뻘건 불길이 날름거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좋아, 지금이다.”
이윽고 커다란 불기둥이 솟아올라 수인들을 덮친 그때.
나는 카렌을 데리고 슬쩍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봤군. 카렌, 도망쳐라.”
“알겠다. 그런데 에릭 너는….”
“곧 합류하마. 걱정하지 말고 빨리!”
난 금세 우리를 발견하고 달려오기 시작하는 덩치 큰 호랑이 수인을 보고선, 카렌을 먼저 보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이 빌어먹을 인간 자식이!”
도착했나.
그렇게 내려온 길을 다시 반쯤 올랐을까.
나는 뒤쪽에서 노성을 지르며 덤벼드는 녀석을 보며 조용히 검을 뽑아들었다.
카앙-!
시퍼런 검기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쇳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이 녀석이 족장인가.
난 힘 싸움에서 밀려 조금씩 가까워지는 놈의 대검을 보고선 이를 악물었다.
“네놈, 그 갑옷… 눈에 익구나. 흑장미 기사단이었던가. 감히 평화협정을 어기고 국경을 넘은 걸로도 모자라, 우리 부족원들을 해쳐? 전쟁이 두렵지 않은가!”
“닥쳐라, 이 씹어죽일 수인 녀석! 이건 복수다! 일 년 전, 네깟 버러지들한테 죽임당한 메르시안의 복수!”
카가각-
“으아아아!”
촤악-
가까스로 녀석의 대검을 쳐낸 나는, 곧바로 이어지는 공격에 일부러 안쪽으로 파고들어 놈의 다리를 베어냈다.
“크으… 멍청한 놈, 제 발로 사지에 기어들어오다니. 죽어라!”
쩌억-!
“컥….”
이윽고 아슬아슬하게 대검에 맞아 튕겨져 나간 나는, 온몸을 찌르르 울리는 통증에 숨을 헙 삼키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빌어먹을, 생각보다 너무 아프군.
하지만 이걸로 이제 충분했다.
“허으윽… 욱, 웨에에엑!”
혈마법을 통해 피를 역류시켜 보란 듯이 핏물을 한 바가지 토해낸 나는, 다리를 절뚝이며 천천히 이리로 다가오는 족장을 보고선 조용히 몸을 돌렸다.
“뭣… 이 빌어먹을, 도망치는 거냐!”
“조, 족장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다. 일단 저 녀석, 저 망할 인간 놈부터 쫓아라! 피를 그렇게 토했으니, 쉽게 달아나지는 못할 거다!”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수인 병사들을 피해, 빠르게 산을 올랐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절뚝이는 걸음으로 나를 쫓는 족장을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멍청하긴.
오더라도 같이 와야지, 이렇게 부하들만 보내면 쓰나.
“이 자식, 죽어….”
촤악-
“코, 코네! 이런 젠… 컥!”
푹-
가볍게 뒤에 붙은 병사들을 처리한 나는, 그대로 아이시스와 발라크가 기다리고 있을 바위 근처로 향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난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절뚝이는 다리를 가지고 열심히 쫓아오고 있을 녀석이 있는 방향을 내려다보았다.